추상미술,추상표현주의 미술,여기까지는 즐겁게
볼 수 있지만 다다,그리고 초현실주의에 이르면
사실 무엇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화가의 내면을 살피는 것도 어려워서 일부러 들여다보게
되지는 않는 그런 그림들입니다.
현대미술 강의에 신청을 했을 때는 혼자 보기 어려운 그림을
강사의 도움으로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보자는 의도가
있었는데 이번 강의로 어느 정도 문이 열린 기분이 드네요.
surrealism 영어식 표현이고요
surrealisme은 불어식 표현이라고 합니다.
둘 다 앞에 sur가 붙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비평가에 따라서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고 하네요.
현실을 초월하는가,현실을 확장하는가 하는 의미에서요
어떤 미술활동이건 화가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고
물리적 법칙을 완전히 넘어서 사는 일이 불가능할진대
아무리 현실을 초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속에서
조금 더 제대로 살기 위한 몸부림일테고
그런 의미에서 현실을 초월하기 위한 노력도 결국은
현실의 확장에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 이번 강의의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강의들은 다다가 없었더라면 초현실주의가 태동했겠는가 그렇게 논의될 정도로 다다는
초현실주의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하네요.
다다는 일차대전속에서 피어난 파괴의 미학이라고 한다면
파괴뒤에 남은 사람들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을 찾던 중 만난 세계라고요.
다다는 예술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인 반면
초현실주의는 예술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양한 갈래로 노력한 점에서 지향점이 다르다고 하는 것도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유래를 살펴보면 피카소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아폴리네르가 1917년 부조리극 타레지아의 유방이란 극에서
부제로 초현실주의 테마란 말을 썼다고 하네요,
사실 이 극은 무대에서 상연되기도 했다고 하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문제제기되고 있던 저출산 문제에 대해
아폴리네르가 티벳의 전설에서 차용하여
한 번에 말도 되지 않는 숫자의 아이를 낳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는 초현실주의가 바로 채택된것이 아니고
1924년 브르통이 초현실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이즘으로 발전한다고요.
그는 이 선언문에서
말로든 글로든 사유의 현실 작용을 표현하려고 하는
순수한 심적 오토마티즘, 이성에 의한 아무런 통제가 없이
미적,도덕적 선입관 없이 행해지는 사유의 옮겨쓰기가 바로
초현실주의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초현실주의는 문학에서 먼저 시도되고 그것이 미술에
영향을 끼친 사조라고도 알려져 있지요.
미술에서 사용된 기법은 대략 일곱가지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업중에 주로 르네 마그리뜨를 다루었지만
사실 이 사조를 대변하는 인물은 살바도르 달리라고 하는군요.
살바도르 달리하면 아,그 늘어진 시계라고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자동기술법,프로타쥬,(이렇게 말하면 어려운 미술용어같지만
동전위에 종이를 올려놓고 긁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바로 프로타쥬이고요)
데칼코마니(이것도 역시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해본 방식인데
그러고보면 처음 나올 때는 신기한 기법도 어느새
제도권에 들어와서 미술시간에도 시도하는 기법이 되어버리는 것이 신기합니다.)
데페이즈망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수법인데
뒤샹의 변기도 이 범주에 들어가고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수법입니다.)
이 기법을 통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던 사물이
본래의 맥락과 멀어지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우리의 무의식을 건드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요.
에리요그램이란 기법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감광 재료위에 물체를 얹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명암속에서 추상적인 형태를
보게 되는 것으로 만레이 작품으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해가 되더군요.
나머지 두 기법은 꼴라쥬와 오브제인데요
미술책에서 오브제란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영어의 OBJECT를 불어식으로 읽어서 오브제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예술과 관련없는 물건,혹은 그 부분을 본래의 일상적인 용도
에서 떼어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잠재한 욕망이나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기능의
물체 자체를 오브제라고 한다면
데페이망은 그런 오브제를 통해 낯설게하는 효과를
말하는 것인가 혼자 생각해보게 되네요.
수업중에는 강의 듣느라 두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는데 강의 노트 보면서 글을 쓰다보니
그 두가지사이의 연결에 주목하게 되는군요.
여기까지가 초현실주의의 배경,그리고 어떤 기법을 사용했는가를 다룬 것이니
다른 날에 비해서 서론이 길었던 셈인데요
그만큼 바로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겠지요?
한숨돌리고 잠깐 쉰 다음
르네 마그리뜨로 들어갔습니다.
지난 번 시립미술관에 전시된 르네 마그리뜨
한 번은 제대로 표를 사고 들어갔고
그 다음에는 초대권이 생겨서 다시 한 번 갔었습니다.
두 번 보았다고 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그것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많이 친숙해진 느낌이고 이제 마그리뜨 그림을 만나면
선뜻 손을 뻗어서 보게 된 것이 소득이라고 해야될까요?

마그리뜨의 생각의 원천들이라고 해서
수업중에 들은 이야기가 몇가지 있습니다.
우선 로트 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시집의 구절에서 충격을 받아서 작업을 한 측면이 있고
(실제로 시를 몇 구절 읽어주었는데 이런 상상력이 그
시절에 가능했었나,놀랍다,그러나 참 곤란하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유행했던 소설 팡토마가 있었다고 하네요.
1911년 신문연재소설이었다고 하는데
기괴하고 잔인한 스토리를 통해 범죄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기성 사회에 도전하는 인물들이 나오는 이 이야기에
당시 젊은이들이 환호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이야기는 지금 말하자면
시에스아이의 선조격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미국 액션물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 작품의 포스터를 마그리뜨가 그린 것이라고요.
이 작품도 바로 이 이야기가 관련된 그림이라고 하네요.

수업중에 많은 그림을 다루었으나
가져올 수 있는 소스가 많지 않아서 그림이 가능한 것만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군요.
이 그림의 제목은 인간 조건인데요
언뜻 보면 창문처럼 보이는 그것이 사실은 캔버스이지요.
그런데 내부와 외부를 다룬다고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내부는 풍경화 그 자체라면 외부는 풍경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는 색을 칠하기 위해 하늘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하늘을 그리기 위해 색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었다고 하네요.
1955: Minneapolis Institute of Art
"In front of a window seen from inside a room, I placed a painting representing exactly that portion of the landscape covered by the painting. Thus, the tree in the picture hid the tree behind it, outside the room. For the spectator, it was both inside the room within the painting and outside in the real landscape. This is how we see the world, we see it outside ourselves, and at the same time we only have a representation of it in ourselves. In the same way, we sometimes situate in the past that which is happening in the present. Time and space thus lose the vulgar meaning that only daily experience takes into account"
La Ligne de Vie II, February 1940
외부와 내부에 대해서 화가 자신이 말한 내용이 있어서
옮겨놓습니다.
우리가 바라본다는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하는 구절이네요.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작품이지요.
현실속에서는 불가능한 구조,나무 사이를 달리는 말이
몸의 일부가 베어져 버리는 상황
그런데 화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런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잠깐 잊고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게 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견고하다고 생각한 현실에 마치 구멍이 뚤리고
다른 것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허용하는 조금 달라진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고 할까요?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자,이 동물은 벨기에 왕가를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벨기에 출신인 마그리뜨는 파리에서 활동하다
다시 벨기에로 돌아갔는데
그 당시 이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벨기에도 역시
히틀러 군대의 침략을 받게 됩니다.
화가 자신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평자들은 이 그림에서 나라의 운명과 연관지어 사자를 보고
날개달린 천사를 화가 자신으로 파악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제목은 homesickness인데요,무엇에 대한 homesick인지는
화가 자신만 아는 것일까요?

앞에서 캔버스에 그려진 풍경에서도 인간조건이란
제목이 붙여져 있었는데 이 작품도 제목이 같네요.
바다를 배경으로 세워진 하얀 막대도 함께 등장하고요.
이 그림을 보니 화가가 색에 대한 감각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
새롭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이 그림에서 하늘의 색과 새속에 비친 색이 달라서
불가능한 세계를 한 화면에 병치해놓은 것이 주는
충격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래도 참 멋진 이미지라고 감탄하게 되지요,처음
충격이 가시고 나면
그는 이런 충격요법을 통해서 우리가 관습적으로 생각하는
본다는 행위에 딴지를 거는 것일까요?


지난 전시에서 만날 줄 알았다가 오지 않아서 아쉬웠던
작품인데요 빛의 제국이란 제목입니다.
마침 소설가 김영하가 그의 소설제목을 빛의 제국이라고
명명하고,소설의 표지를 이 그림으로 했더군요.
이야기를 읽어가는 중에 왜 작품의 제목이 빛의 제국일까'
고심하다가 나중에 이야기속에서 한 에피소드를 통해
풀이라는 과정에서 아,역시 소설가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이미지를 절묘하게 연결하는 존재인가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현실에서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두 시간대의 겹침이
주는 것이 각자에겐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한 번 그림앞에서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흥미있을 것 같은
작품이네요.

수업중에 다루어진 작품은 아니지만 오늘 검색하면서
만나고,한참 들여다본 작품이 바로 마네의 발코니입니다.
마네의 작품을 차용해서 이런 그림을 선보이는 그의 능력이
돋보이네요.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시대에 그려졌던
삼미신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마네의 그림처럼 일종의 이미지 차용이지만 완전히
다른 느낌의 그림이라서 골라서 보게 되었습니다.

불어로 씌여진 이 글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말이라고
너무나 유명한 그림이지요.
이 그림에서 파이프이면서 동시에 파이프가 아닌
그래서 언어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그런 그림이라고요
이성과 추론으로 논리를 적용시켜서 움직이는 사회에서
언어가 갖는 기능은 막강하지만 막상 그 언어가
다른 사회에서도 통용이 되는가하는 문제
그렇다면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언어의 약속은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를 도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파이프이면서 동시에 그림속에서 파이프는 현실에서의
기능을 못하는 존재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인식 지평을 불러일으키는 그림
그런 점에서 르네 마그리뜨의 그림은 철학적인 접근이
많이 되는 편이라고 하는데 미학 오딧세이 2권에서 진중권도
계속해서 마그리뜨의 그림을 사이 사이에 넣어서
설명하고 있더군요.
처음 읽었을 때는 어렵다고 느꼈었는데 이번 마그리뜨
수업을 받기 전에 한 번 다시 읽어보면서 아,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구나 저자가 하고 고개 끄덕인 것도 있었고
아직도 역시 어렵네,언제 한 번 미학 오딧세이를 제대로
강의속에서 만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수업중에 이야기된 그림들중에서는
붉은 모델이란 작품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신발아래에 발이 놓여있는 작품입니다.
전시장에 왔던 그림이기도 한데요
신발의 기능은 발을 감추는 것이라면
이 그림에서는 오히려 신발은 발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채현회화가 이제껏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었다면
마그리뜨의 그림에서는 그렇게 감추었던 것을 보여주는
작업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그런 것중에서 옷의 기능을 뒤집어 보게 만드는 그림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번의 강의로 한 화가를 제대로 다 알겠다는 것은
욕심이니 이렇게 조금 알게 된 것을 무기로
조금씩 더 다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