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에 시작한 노성두 선생님의 미술특강이
강사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마지막 한 강의가 미루어져
어제야 바로크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가 카라바지오로 박사논문을 썼다는 것을 처음
알았지요.
그래서 더욱 흥미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바로크에 묻어서 살짝 지나가는 강의가 아니라
4번정도의 집중강의가 있으면 좋겠다,슬라이드
강의만이 아니라 미리 읽을 텍스트를 선정해서 사전
공부를 한 다음
슬라이드를 통해서 작품분석하는 것을 듣고
의문나는 것에 대해서 질문도 하고
그의 영향을 받은 후대작가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시간
그런 강의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에 슬쩍 이야기를 던져보니
의의로 선생님은 그것이 더 좋다고,흔쾌하게 대답을 하네요.
그렇다면 겨울방학이나 봄방학때쯤 그런
강의를 기획해보는 것도 가능한 일이겠지요?

바로크라고 하지만 바로크가 한 갈래가 아니란 것
그리고 바로크에 대해서 한마디로 하자면 설득의 미학이라고
한 것이 가장 인상에 남았습니다.
무엇을 설득하는가?
당연히 카톨릭 교회가 이 지상에서의 신의 섭리를 대변하는
조직은 카톨릭이다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종교적인 소양이 없는 제겐
성경속의 이야기를 그린 바로크보다는 인물화,정물화,
풍경이 살아있는 그림들에서의 바로크,그리고 무엇보다도
초상화속의 그림들이 더 인상적이어서
제겐 루벤스나 카라치의 바로크보다는 역시
카라바지오나 렘브란트의 바로크
그리고 카라바지오의 영향을 받은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더 큰 관심이 가네요.
1596년도 작품이라고 되어 있는 위에서 소개한 그림은
성 프란체스코의 상흔을 다룬 작품인데요
이런 주제를 다룬 조토의 그림에서 참 멀리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천사가 프란체스코의 상처를 돌보는 모습을 디테일로
잡은 것이네요.

신화속의 인물 바쿠스를 카라바지오는 마치
현실속의 한 존재인것처럼 그려냈네요.
그런데 캔버스속의 과일들이 약간 상하고 벌레먹은 모습으로
그린 것은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을까요?

아직 숨이 끊어지기 전의 인물의 공포와
목을 베면서도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제겐 이미 아르테미시아의 유디트가
있어서 그런지 자꾸 비교하면서 보게 되는 그림입니다.

마태를 부르는 예수의 부름에 저말입니까? 하고
응답하는 장면인데요
빛의 역할이 이 그림의 주인공이란 느낌이 드네요.

수업중에 이 주제를 다룬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비교하면서 그림을 보는 것이 주는 이점을 느낀 날이었는데요
집에 걸고 싶은 그림과 실제로 우리의 인식에
충격을 주는 그림은 사실은 다른 경우가 많겠지요?

주제를 선택했으면 다른 잡다한 것을 다 생략하고
과감하게 배경을 없앤 다음
주제에 집중하는 그림,그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로 그 주제에 몰입하게 하는 큰 재능이 있던 화가가
바로 카라바지오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화면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공식 종교가 되고 나서 그림에서 만나는
성화속의 인물들은 사실 너무 고결한 사람들로 묘사가
되지만 실제 갈릴리에서 예수를 따라다닌 제자들은
당시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이었지요.
그러니 카라바지오가 포착한대로 옷도 남루하고
그들의 모습에서도 위엄보다는 서민들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한데도 그런 모습이 권위를 깍아내린다고
오히려 구박을 당했다고 하네요.
아마 이런 사실성이 그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되는
요인인지도 모르지요.
금요일 강의에서 제일 인상적인 슬라이드는
렘브란트의 마치 판화같은 느낌의 유화 한 점
바로 이 주제를 다룬 것이었습니다.

카라바지오의 그림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바로 의심하는 토마스 이 그림인데요
제게 숙제로 남아있는 부분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네요.
의미를 떠나서도 이 그림이 주는 충격은 여전하지만요.


등장인물들이 앞으로 확 쏠려서 나오는 그의 그림들
그러고보니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무대로군요.
이번 수업시간에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나니
그림을 다시 보는 중에 눈이 달라졌네,그런 기분이
들어서 신기합니다.
기본적인 그림들을 한 번 보았으니
시간이 날때마다 조금씩 더 보충하면서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