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전화가 왔습니다.오랫만에 통화를 최윤희씨가
물어봅니다.선생님,목요일 오전에 시간이 있는가하고요
목요일 오전 물론 수업이 있는 날이라 물론 시간이 없지만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서울 문화재단의 일을 맡아서 하고 있는 오진이씨가
목요일 프로그램중에 화가 방혜자님의 서울 전시가 있으니
투어에 참석하는 것은 어떤가 하는 권유를 받았다고요.
사실 개인적인 이유로 목요일 수업을 빼먹는 경우는
너무 아파서 병원을 가야하는 것이외에는 거의 없는 일이라
많이 망설였습니다.
그래도 단 번에 거절을 못한 이유는 방혜자님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그리고 사람을 만나는 일
그 두 가지 이유때문이었는데
마침 목요일 수업을 대신 맡아주겠다고 박혜정씨가
선뜻 수락을 해주어서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떠날 수
있었지요.
서울가는 좌석버스속에서 오랫만에 이어진 대화
참 맛난 이야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맛나다,이런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으나
마음속의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는 상대방의 힘때문에
가능한 시간이었을까요?
시청 가는 길에 노성두선생님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나누면서
사람의 인연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강의로 안면을 트지 않았더라면 아마
어라,어디서 본 얼굴인데,어디서 본 것일까?
그렇게 궁금해하면서 지나쳤겠지요?
목요일 전시에 대해서 알고 나서 제비꽃님에게도
알렸습니다.
그녀가 방혜자님의 그림 한 점을 집에 걸어두고
매일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 행운을 누리고 있는지라
아무래도 전시회 소식을 알면 반가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전시에 그녀의 그림도
빌려드려서 함께 전시가 된다고 하네요.
전시회에 동참하겠다는 말을 들어서
오진이씨와 인사를 나눈 뒤 뚤레뚤레 찾아보니
지하도에서 막 올라오고 있는 중이네요.
버스속에서 서울문화재단이 하고 있는 행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서울 도심속의 문화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의 탐사가
이루어지고 있구나,그런데 날짜가 맞지 않아서
어느 곳도 참여하긴 어렵지만
서울안에 가고 싶은 곳,가보면 좋을 곳에 대한
정보를 그 곳에 들어가서 알아보아야지
한 가지 머릿속에 기억을 담아두고 나니
벌써 내릴 시간이 되었네요.
그런데 환기미술관 들어가는 길목이 바로
말로만 들었던 커피프린스 일호점이란 드라마와 관련된
부암동이라고 해서 웃었습니다.
저 방앗간 이런 말도 들어서 바라보니
방앗간 밖에 나붙은 종이 글씨가 다정합니다.
우선 미술관의 건축물에 관한 것,이 미술관의 설립에
얽힌 이야기들을 미술관 측에서 나오신 분께 설명을
들었습니다.
이상하게 이 동네에 왔어도 다른 미술관에는 여러 차례
들렀지만 이 미술관과의 인연은 처음인지라
새로운 눈으로 이모 저모 살펴보았지요.
인상적인 것은 미술관 안에 원색으로 그려진
여러가지 선,원,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지난 해에 이 곳에서 전시를 마친 해외화가들이
이 미술관에서 받은 인상을 나름대로
벽면에 표현한 것이라고요.
그것이 미술관과 묘한 조화를 이루어서 감탄하면서
바라보고 사진을 찍기도 했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올려보려고 새로 사진파일도 만들어달라고
보람이에게 부탁해서 폴더를 따로 만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는데 아뿔싸,오랫만에 만지는 카메라가 그런지
컴퓨터와 연결하는 짹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네요.
스페인 여행가기 전에 새롭게 카메라와 친해지려 했는데
이것이 일차 고비가 되는군요.
아마 그래서 김이 새는 기분이어서 그랬을까요?
어제 즐거웠던 시간을 기록으로 남길려고 하다가
어제는 그냥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사진이 기록을 재촉하기도 하고 무산시키기도 하는
요상한 현상이지요?
미술관자체에서 제 눈을 끌었던 또 하나의 장소는
벽의 창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그것이 작품이로구나 생각한 것이
사실은 수화 김환기의 작품을 유리에 작업해서 창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주변에 반사되어 묘한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있더군요.
그 곳에 가서 제일 많이 들여다본 공간이 바로
그 창이었습니다.
실제 수화작품은 상설전시가 없다고 하네요.
그래서 미술관 입구에 세워져 있는
종이반죽으로 만든 어떻게 보면 사람같고
어떻게 보면 나무같은 오브제 한 점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오브제의 색이 인상적이어서 한참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는 그의 노동으로가 아니라 그의 비전으로
평가된다는 어떤 화가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그것은 작품자체도 그렇지만
작업을 통해 보여주는 바라보는 것의 새로운 시선
한 번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를
우리 눈앞에 펼쳐보여서
그 이전과 그 이후가 다르다는 느낌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저를 전시장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제 마음속을 들여다본듯
방혜자님이 첫 인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우리가 빛에서 온 존재이지만
일상에서 사느라 그런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살기 쉽다고,자신의 작품에서 빛에서 온 색감을 통해
삶에 긍정적인 에네르기를 얻고 돌아가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요.
전시장에서 화가 본인의 작품,혹은 작품이 태어나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을 보는 시간이란
흔하지 않은 경험이어서 짧지만 참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터넷상에서 검색해서 보게 된 그녀의 그림
색에 놀라서 좋아하게 되었지만
실제로 작품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처음입니다.
역시,작품은 실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날이었는데요
색이 뭐랄까 그 앞에서 떠나지 못하게
자꾸 일행과 떨어져서 그 앞으로 다시 가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스며들고 밖으로 새어나오면서 앞뒤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런 색감
병원생활을 하면서 종이접기하다가 그림으로
완성했다는 작품들앞에서는
갑자기 반룬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사람들이라는.
beyond description이란 말이 있지요.
설명할 수 없는,설명을 넘어선
그런 느낌이 전시장에서도 들었습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만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기 어렵다는 것.
수화 김환기를 기리는 의미로 설치작업을 한 작품도
좋더군요.
앞에 설치한 유리와 뒤쪽의 그림이 서로 반응하면서
묘한 느낌을 주는 것,그림만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조금 색다른 색의 주고받음이라고 할까요?
어린 시절 냇가에서 물이 빛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는 것에
사로잡혀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이래로
오랜 세월이 흐르고 지금 그것이 작품으로 표현되어 나타난다는
몇 작품앞에서는 각각 다른 색으로 표현된 물살의 느낌을
제대로 느껴보려고 한참 비교하면서 들여다보기도 했지요.
우리를 추동하는 힘,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요?
무엇이 우리를 자극하고 무엇이 우리를 정지하게 하는것일까?
그것이 어떻게 하면 순한 에너지,때론 격한 에너지가 되어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것일까?
미술관에 와서 갑자기 철학적 명제와 맞닥뜨린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방에 들어가니 저 그림이 바로
우리 집에서 온 그림이라고 제비꽃님이 알려주시더군요.
그림의 중간에서 노란 빛이 퍼져나가는 공간이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된 세계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 그림앞에서 매일 하루중의 어느 순간
바라보면서 행복해하고 그림속의 색과 교감하고 있을
그녀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마침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중에 방혜자님이
제비꽃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림 주인이 이 곳에
와 있다고 우리들에게 알려주시더군요.
그림을 그린 사람과 그림을 소장한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보는 느낌과는 달라도 인터넷상에 올라온
그림 (마침 성곡 미술관에서 오래 전 전시한 적이 있어서
그림이 몇 점 올라와있네요) 에서라도
빛의 숨결을 느껴보실래요?



전시장에서의 그림 보기가 끝나고
교육관으로 가서 방혜자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중에
한국에 있을 때는 한국인이란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살았으나 오히려 프랑스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고 공부하게 되었다는 대목이
귀에 선명하게 들어와 박히더군요.
자기 정체성이란 결국 자기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하다는 것

다과시간이 준비되었지만 아무래도
목요일 오후 수업때문에 미리 빠져나와서
손만두집에서 맛있는 점심을,그리고 덤으로 부암동의
에스프레소 커피하우스에서 커피 한 잔을
그 사이에 이어지는 이야기까지
참 즐거운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마음 가득 행복한 기운이 퍼지는 기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