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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대/녹두대 이야기

| 조회수 : 9,028 | 추천수 : 59
작성일 : 2008-06-29 01:13:09


80년대 중반, 전설의 남총련 산하 전남대 오월대와 조선대 녹두대.. 이들은 1개 소대의 병력으로 1개 중대의 전경들을 무장해제 시켰다는 전설적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깃발이 보이면 악독했던 5,6공의 백골단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남총련 깃발
89년 임수경 방북 때 한양대 철길 진입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수많은 학생들이 멈춰진 전철에서 일제히 뛰어내려 한양대로 뛰어가던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양대역 플랫폼에서 대기 중이던 전경들은 허를 찔려 황당하고 허탈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역력합니다. 당시 한양대를 지켜준 선봉대가 남대협입니다. 그 후신이 남총련이고요.. (아래, 아고라에서 퍼온 28548번 글이 바로 이 사건을 묘사한 글입니다.)

"백만학도 뛴다 투쟁전선에 너와 내가 손잡고서 두려움없이 싸워나가자 호남벌판 황톳길에...."

선봉대들이 남대협가를 부르며 등장하면 환호성이 대단했습니다.든든한 오월대와 녹두대의 용맹성은 당시 학생이 아닌 군특공대 처럼 보일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이 저리 용맹한 투사로 변한 것은  광주항쟁으로 맺힌 한과 윤상원 열사의 후배들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결합돼 백골단들도 오금을 못 펴게 만드는 전투력으로 승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혹자는 8,90년대 남총련 전투조들은 공포에 의해서 더 자기방어적인 물리력을 강하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그건 공포에 의해서가 아니라 5.18에 대한 분노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에서였습니다. 공포로 추동되는 폭력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아울러, 신념이 없는 물리력은 금새 방향성을 잃고 제풀에 쓰러집니다. 하지만 분노와 신념을 바탕으로 한 행동은 더 강합니다.

제가 직접 겪고 들은 바를 근거로 또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를 근거로 저는 남총련이 과격하고 무식한 집단이 아니라 분노의 신념에 찬 집단이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좌빨이네 주사파네 뭐네 욕을 하더라도요. 마치 지금 촛불집회에 나오는 유모차부대가 북한의 지령에 홀려서 그렇게 나온게 아님과 같습니다.


녹두대 깃발
첫번째 이야기

1989년, 임종석 전 국회의원이 전대협 의장으로 있던 시절. 여학우들이 임종석 의장 나오는 포스터를 찢어서 집에 가져가 붙일 정도로 당시 '얼짱'이었던 임의장의 인기는 높았었지요. 평양에서 열리는 평양축전에 즈음하여 서울에서도 대규모 집회를 주관하였습니다. 한양대에서 행사 중, 임수경 학우가 평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했을때 집회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압부대는 한양대에 총 공세를 강행하여 수천명의 학우가 한양대 건물 안에 갇힙니다. 이른바 89년 평축 임수경 북파 사건(?) 이지요.

한양대는 원래 처음부터 완벽히 봉쇄되었습니다. 결국 집회참가자들은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한양대에 진입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뚝섬역에 내린 후 철로를 따라 한양대역 근처에 와서 미리 준비한 사다리를 타고 한양대에 진입을 하기로 한 것이지요.

이때 남대협의 학우들은 전경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왕십리와 한양대 입구쪽에서 가혹한 가투를 벌입니다. 어렵사리 진입한 한양대였지만 언제 경찰병력이 진입을 할 지 모르는 상황..

전경병력 절대다수가 배치된 정문쪽은 녹두대와 오월대의 남대협과 전북학협(전북지역 학생조직)이 맡고 있었고 끝까지 잘 버티고 있었는데, 결국 서총련과 경인총련이었나? 암튼 서울쪽 사수대가 맡고 있던 한양대 병원쪽이 뚫리고 학내에 전경들이 밀물처럼 쳐들어 왔습니다.

각 지구에서 방어하던 학우들도 혼비백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인근의 가까운 건물들로 대피했습니다. 정문쪽을 막던 남대협도 눈물을 머금고 지도부를 호위하며 한양대 인문관으로 퇴각, 농성을 시작합니다.

다른 건물로 산재한 학우들은 경찰의 검색에 의해 많은 이들이 연행이 되었습니다. 훗날의 후일담으로 어느 건물로 퇴각한 시위대 몇 명은 꼬박 이틀동안 숨어있었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물로 버텼다고도 하죠. 혹시라도 일어서서 창문에 그림자가 비칠까봐 똥오줌도 누워서 해결을 봤을 정도랍니다. 그 이틀동안 한양대 인문관은 섬이었습니다. 김원중이라는 가수가 5.18 광주를 섬처럼 느껴져서 부른 노래 '바위섬'처럼 한양대 인문관에 모든 이들이 고립되었습니다.

경찰이 철통같이 한양대 인문관을 포위 해버리고 만 상태에서 그대로 고사되어 제2의 건대사태가 발생할 지도 모르는 시점.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전대협 지도부는 정면돌파를 시도합니다. 한양대 인문관은 삼면이 절벽같은 산만디(^^;)로 되어있는 건물이어서 들고 나는 건 모두 현관쪽을 이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때 남대협(후에 남총련으로 확대재편되는 전남지역 대학생 대표자협의회)의 학우들이 선봉에 서서 수천명의 경찰이 진을 친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합니다. 이 작전을 위해 인문관 옥상에는 수십명의 학우들이 깃발을 걸고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경찰들에게 정면돌파의 낌새를 눈치 못채게 하기 위해서지요. 당황한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시위대를 돌파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도부를 중심에 두고 남대협 학우들이 둘러싼채로 정면돌파한 후 우회로를 통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합니다. 이미 학내외 주변에 수만명의 경찰병력이 포진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인근 가옥의 돌담과 지붕을 넘어 퇴로를 확보합니다. 또 이들을 쫓기 위해 백골단과 체포조들이 따라다니르라 수많은 가정집들의 옥상과 기와가 거의 초토화될 지경이었다고 하지요.

일각에서는 경찰이 일부러 봐줬다는 설이 있으나 당시 여러 정황을 고려해서 봐준 것 같지는 않고요, 아무튼 오월대와 녹두대를 주축으로 한 남대협은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녹두대 깃발
두번째 이야기

90년 광주 전남대에서 전대협 출범식이 열립니다. 시민들의 도움으로 폐타이어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칩니다. 이때 대구,부산, 대전, 서울 등 각 지의 전경들도 차출되어 광주에 집결합니다. 온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집니다.

친구 하나가 전남대 출신인데 학생들은 봉쇄된 전남대에 들어가기 위해 여학우와 함께 정장을 입고 갔다고 합니다. 부부처럼 보이고 싶어서였지요. 광주공영터미널에서부터 대학생으로 보이면 무조건 검문검색을 해서 다른 지역 학생이면 닥치고 닭장차에 연행하고 저 멀리 순창같은 허허벌판 논두렁에 내다버리고 오곤 했었거든요. 여차저차해서 전남대에 들어간 다음에 교문을 뚫고 나와서 시내에서 가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광주쪽은 전경이나 백골단들도 상상초월입니다.

본대에 있다가 진압이 들어와서 대오가 흐트러져서 어떻게하다보니 백골단 뒤쪽근처로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황당~ 어디로 가야할 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이쪽 백골단으로 화염병이 날아오며 전투가 붙었다고 합니다.

친구녀석이 직접 목격한 백골단 한 명은 화염병을 방패로 막는데 병이 깨지면서 머리 뒤쪽으로 불길이 옮겨붙었답니다. 동시에 소화기 꺼내서 치치칙 뿌리더니 태연히 불 다끄고 욕 허벌나게 뱉어내더니 또 다시 전방으로 나가서 진압했다 하더군요. 독한 놈들... 그런 애들하고 남대협하고 붙는 싸움은 정말 전쟁같았다고 합니다.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벌이는 집회와 진압이 아니라 마치 원수나라의 군인들이 벌이는 싸움.

남대협 전투조와 싸워본 적이 없던 타 지역의 전경들은 곳곳에서 무장해제를 당합니다. 이당시 전경으로 차줄되어 진압에 참가했던 한 후배녀석은, 다른 지역은 지랄탄 쏘고 SY-44탄 날리고 연기 자욱한 상태에서 소리 지르며 달려가면 애들이 멀찌감치 물러서 다 도망가곤 하는데, 남대협 애들한테 똑같이 그렇게 해서 연기속에 막 달려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대협 애들하고 막 뒤섞여서 싸우고 있더랍니다. ^^;


오월대 깃발
세번째 이야기

범민족대회가 연세대에서 열렸는데 집회장소가 원천봉쇄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 연세대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골목 어귀에 범대회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한 수십명 되었습니다. 골목 저 앞 쪽에는 전경 수백명이 틀어막고 있습니다. 그때는 뭐 당연히 핸폰같은 건 없고 삐삐도 광역삐삐가 나왔나 어쨌나 모르겠으나 암튼 뭐 택(전술지침)전달이 안되어서 저기를 뚫고 가냐 아니면 다른데로 모이냐 우왕좌왕하던 차였습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뜬금없이 전라도 사투리 걸쭉하게 쓰는 몇 명이 그러더군요.

"보씨시요, 쩌그 쟈들이 얼마 안됭께, 우리가 저짜로 뛰어가면서 쟈들을 유인할텡께, 그 참에 조오~기로 뛰가서 담치기(담장넘어)해서 들어가씨씨요. 돌 좀 모아보소, 병은 못 만들것고..."

다른 학우들이 말리자,

"이거 말고 방법이 없응께, 우리들이 (경찰에) 달려(잡혀)드가는 대신 여러분들이 (행사장으로)드가면 우리 할 도리 다 한 거 같응께,우리 대신 잘 싸워주씨시요."

그러더군요. 눈물인지 뭔지.. 전율스런 감동이...

결국 그들 네 명은 조립식 쇠파이프 들고 수백명의 전경 무리속으로 짱돌을 던지며 돌진, 그 참에 나머지 범대회 참가자들은 무사히 학내로 진입했습니다.


오월대 두건
네번째 이야기

전대협 출범식 때 전국의 놀이패도 거의 다 집결합니다. 엄청난 규모죠. 북만 한 500개 넘게 모여서 치는데 장관입니다. 놀이패들도 가투에 나가는데, 대개는 전투가 벌어지면 뒤로 빠지죠. 고대에서 벌어진 행사 이후 회기역 쪽에서였던 것 같은데 지랄탄이 터져서 정말이지 한치 앞도 분간 못하는 상황입니다.

최루가스가 좀 걷히고 난 다음에도 저 앞쪽에 한 무리의 놀이패가 자리를 고수하고 소리를 냅니다. 바로 남총련 풍물패연합(?)이었습니다. 그쪽 방어는 서총련이 맡았던 쪽 같은데요, 의혈중앙이랑 민족고대 뻘건 깃발도 지랄탄과 SY-44탄을 피해서 뒤로 물러나 있는데 저 앞쪽에, 그러니까 시위대와 전경들 사이 한가운데서 숨도 쉬기 힘든 곳에서 방독면도 없이 눈물 흘리면서도 한 치의 흔들림없이 북치는 거 보니, 저거는 한이 맺히지 않고서는 저럴 수 없다 싶었습니다.


오월대에 제압당한 전경
다섯번째 이야기

운암대첩이라고 하는데, 91년 강경대 열사의 시신이 광주로 운구되오는 시점에서 전경들이 이를 막아버립니다. 광주 운암동 근처입니다. 507, 506 전경대대들도 강하기로 소문난 부대였으나 남총련 학우들은 결국 이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강경대 열사의 시신을 안전히 망월동에 모셔옵니다. 이들이 싸움을 잘해서 운구차를 탈취하려던 전경을 무장해제 시킬 수 있었던 건 아닐 것입니다. 광주의 아들 강경대를 편히 쉬게 하고자, 그 분노와 가슴절절한 안타까움에 이틀밤낮을 싸워가며 운구차를 되찾은 거지요.

이거 말고도 몇가지 일화가 더 있습니. 전남대인가 조선대 축제에 광주 뭐시기파라는 조폭들이 야구방망이랑 회칼 들고 들어와서 학우들이 차린 천막에서 시비걸고 천막 뒤엎었는데 이 때 사수대가 출동 완전개박살 나고 무장해제 당했다는 얘기도 있고요...

뭐~ 암튼 대단했습니다. 가장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메이저 언론의 색깔공세에 가장 저평가되었던 남총련 산하 오월대 녹두대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걸 보니 한편 기쁘면서도..이 스산한 정국이 눈물나도록 싫습니다.


녹두대에 제압당한 전경
그렇다면 녹두대가 행동조직으로 최선봉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며칠 전 만난 녹두대 출신 후배는 술자리에서 우스개 소리로 군대보다 더 했다고 표현합니다. 나중에 군대에 들어갔더니 녹두대/오월대 보다 못했답니다. 그래서 편했다나요. 남들도 알만한 힘든 곳에서 군생활했는데도 말입니다.

아무튼 녹두대/오월대가 입만 살은 조직이 아닌 실천과 행동의 조직으로 떠오르는데는 한 가지 핵심이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평가하자면 그건 규율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철규(이철규 열사)형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병원 찬 콘크리트 바닥에서 신문을 덮고 자면서도 원칙을 지켰습니다.

자신이 근무조일 때는 병원 순찰을 철저하게 하고 휴식조일 때만 잠을 잤습니다. 그런 생활을 몇 달동안 했습니다. 가투에 투입되는 것도 오더를 받는 조만 움직였습니다. 가투에서 싸울 때도 자기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타격조 일 때와 대열 보호조 일 때 일이 달랐습니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었습니다. 강철 같은 규율을 강조한 조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직력은 때로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습니다. 여의도 시위, 현대 골리앗 투쟁에도 녹두대/오월대가 투입됐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다른 조직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무장한 행동조직이지만 대중들 앞에서 보여 준 절제와 규율은 대단했습니다. 전투조직으로서 강건함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혼연일체와도 같은 조직력 그 자체였습니다. 몇 백 대오가 되도 투쟁에서는 하나처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전경들도, 백골단도 그런 녹두대/오월대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전대협 집회나 서대협 집회에서 보여 준 녹두대/오월대의 활약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직격탄이 날아와도 달아나지 않고 대열도 깨지지 않고 오히려 조직적으로 공격하는 무장조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복경찰이나 백골단도 이들의 행동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런 녹두대/오월대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던 사람들은 놀라움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의아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녹두대/오월대의 그 저력 뒤에는 철저한 규율과 실천으로 무장한 힘이 있었습니다.

녹두대/오월대가 창설됐을 때 건준위(민주총학생회건설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백영권은 강제징집 영장이 나온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영권이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헌병대와 경찰은 그를 잡으려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태연하게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바로 녹두대/오월대가 그를 보좌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처럼 다니지만 단봉(쇠파이프)을 팔에 끼고 다니는 녹두대/오월대 대원만 해도 무려 50여명이었습니다. 영권이가 커피숍에 들어가면 그들이 입구와 곳곳에서 그를 보좌했습니다. 날고 긴다는 사복조 경찰 200여명이 있어도 녹두대/오월대 50명을 잡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떡 버티고 있으니 누구도 그를 검거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87년 대선을 앞둔 터라 그런 모습은 시민들의 눈에도 자주 띄었습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을 막아내는 것을 지켜 본 시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녹두대/오월대가 있는 곳에선 시민들의 환호도 뒤따랐습니다. 음식과 음료수를 내오고 때로는 담배값이라며 돈을 건네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녹두대/오월대는 가는 곳마다 화제를 낳았고 찬사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특히 서울쪽 대학가에서는 극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녹두대/오월대의 추억과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합니다. 하지만 젊은 날에 우리가 주장하고 내세웠던 것은 무엇일까요? 음모적이고 권력지향적인 것과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살면서 그 때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살았던 그 때의 삶으로부터 지금의 삶을 영향받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교훈은 같습니다. 규율이 없는 조직은 조직력이나 단결된 힘이 없습니다. 원칙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선택 앞에 늘 놓여 있습니다.

가치롭고 당당하게 살 것이냐 아니면 권력이나 자본이면 모든 걸 저버리고 노예처럼 살 것이냐를 말입니다.

※ 사진이 모두 깨져서 나오네요.. 남의 회사 웹서버를 몰래 사용하다보니 이런 불상사가 생겼네요.. ^^;; 사진이 보고 싶으신 분은 http://dh8972.blogspot.com/ 에 접속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餘心 (dh8972)

조선일보의 내공빨로 여기까지 날려 온 공돌이 입니다요. ^^

1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조용한세상
    '08.6.29 2:03 AM

    예전에 남총련은 언론에 의해서 빨갱이 라고 매도 되었지요....그 암울했던 독재정권과 언론들에 의해서 지금은 그 시대에 무장을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을 재조명해서 바르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현상황에서 비폭력을 수십일을 했지만...전,의경들에게 짓밟히고, 방패로 찍히고,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고 있는데도 비폭력만을 외치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어요....
    비폭력으로 백날천날 해봐야 별볼일 없습니다.
    이것을 아직도 국민들은 모릅니다. 이명박정권은 시간이 지나면 다 끝난다라는 생각을 할것입니다....또한, 그리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냐, 귀막고 권력을 휘두르고 있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두렵고 무서울게 없지요. 전,의경을 앞세워 두둘켜패고 피터지게하고 구속하고 반복하면 언젠가 지치고 하여 사람이 줄어들면 완전이 제압하여 다시는 집회못하게 만들면 끝나지요.....
    검,경을 이용 얼마든지 폭도로 만들어 제압하면 되니까요.
    이미 패배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밤을 세우고 비폭력으로 무엇을 이룰수는 없습니다.
    비폭력으로 인도 간디를 말합니다. 이는 말도 안됩니다. 영국의 지배에 전국민이 비폭력으로 싸워서 전세계가 영국을 압박해서 이룬것이지요..
    대한민국은 인도의 상황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또한, 이승만을 말합니다.....이승만 비폭력으로 했으면 물러날 이유가 없었지요...국민이 폭력으로 대항하고 청와대앞에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해서 이승만을 쫓아낸것이지요....
    내가 이명박이라고 해도 비폭력 백날천날해도 눈하나 깜짝 안할겁니다...맨날 하는 일상적인 것으로 보게 되니까요...그럼 국민만 지치고 나가 떨어지지요...1000만명 1억명이 떠들어도 비폭력하면 걱정할 일이 없지요.....
    비폭력이니, 전의경 때리지 말라느니 물주고 , 하하하..그런다고 국민을 봐줄것 같은가요...절대 그런일 안일어 납니다.
    밤이 늦였네요....오월대, 녹두대, 생각하면서 잠들어야지...

  • 2. 딸기향기
    '08.6.29 2:07 AM

    전대협 진군가 가사가 자꾸 떠오릅니다. 대단한 대통령입니다. 그 오래전 노래 가사를 다시금 기억나게 해 주시다니...시절을 과거로 돌려놓아도 정도가 있는거지..ㅜ.ㅜ...자꾸 밟으면 더더욱 굳건히 일어나리라 믿습니다. 우리모두 "시퍼렇게 날이 설때까지..." 밟아주시려나 봅니다.

  • 3. 해바라기
    '08.6.29 3:54 AM

    저 학교다닐때는 교문밖으로 학생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교문안으로 최루탄과 지랄탄들을 쏘아댔어죠..
    92년이었나...그랬어요..대구..
    교문앞 잔디밭으로 그것들이 날아들어서
    새들이 놀라 소스라쳐 날아오르는데 어떤개 새고,,어떤게 지랄탄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날아다니는게 많았어요..
    최루탄은 정말 저기에 맞아서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
    컸었죠..
    비폭력 비폭력으로 아무리 주장해도 경찰은 점점 더 강하게 폭력을 행사하는데,
    언제까지 비폭력으로 나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비폭력이든 무력한거든 얼른 저놈의 쥐새끼좀 끌어내렸으면 좋겠어요..
    저놈 계약기간 채우면 국민 반도 안 남아있겠어요..

  • 4. 춤추는구름
    '08.6.29 10:25 AM

    연대에서의 범민족대회...
    광주 전대에서의 전대협 발족식...
    등등 이제와서 보니 많은 일이 있엇네요.
    전남대에서의 전대협 발족식 참가는 그야 말로 전쟁이엇는데... 서울역에서부터 원천 봉쇄를 해서 가기도 전에 많이 잡혀갓습니다.
    서울역에서부터 잡혀가기 시작해서, 그리고 각 역마다 대전 천안 등등 전경들이 다 있엇고요.
    그리고 저희 학교에서 갔던 우리 일행은 몇명이엿는데, 그때 송정리에서 내렷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도 몇명 잡히고, 하여간 그렇게 해서 대기 하고 있다가, 전남대 입구에서 다른 학우들이 싸우고 있을때 무시히 들어갔고요.
    그리고 나름 무사히 전대협 발족식을 치럿던 기억이 나네요.
    그당시 의장은 송갑석의장이였던걸로 기억합니다.
    각설하고... 민주화의 성지...... 광주...
    이 말이 각인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계기는 아마도 여기 참석하고부터인듯하네요.
    전대협 발족식이 5.18 즈음에 있어서 5월 18일 되엇을때, 우리는 다 광주 시내로 갔어요.
    일종의 가투인데. 위에서 말햇듯이 오월, 녹두대의 기상은 설명했으니 그만 해도 될듯하고,
    전경들도 독합니다. 이것도 위에서 말했으니 그만 해도 될듯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광주가 그냥 광주가 아니엿다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겟네요.
    하여간, 그때는 그랫습니다.
    가투을 하는데... 너와 내가 없고 광주 시민과 학생의 구분이 없는 말 그대로 그냥 해방구엿다고...
    제가 본것중 기억에 남는 몇가지...
    최류탄 자욱한 앞쪽에 서있는데 어떤 할머니가 자꾸 대치하고있는 전방쪽으로 가는거에요
    그래서 걱정 되서 할마니한테 말했어요
    "할머니 그쪽은 지금 위험해요 돌아가세요 앞에서 싸우고 있어서 위험합니다"
    할머니 왈 " 나도 지금 싸우러 가는겨"
    싸우다가 부상자가 생기면 주위 약국 약사분들이 나와서 붕대며 소독약을 들고와서 바로 치료를 해줍니다.
    주위 식당이나 가계에서는 배고픈게 먹고 하라고 먹걸이, 빵이며 음료수등등 주는건 예사고요.
    지나가던 분들이 목좀 축이면서 하라고 돈을 집어주고 갑니다.
    하여간 그당시 광주는 제가 느끼기엔 해방구였엇네요.
    서울에서만 하다가 광주에서의 모습은 말그대로 충격이엇어요.
    이런동네도 있구나 하는... ㅎ
    그리고 느꼇던건 5.18 이 이분들한텐 참으로 크게 가슴속에 남아 있구나 하는것도 느꼇고요.
    5.18민주화의 상흔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서 짓누루고 있엇나봅니다.
    그렇게라도 풀어 내지 않음 안될 가슴속 응어리였나 봅니다.

    가투 할때, 항상 느꼇던 것은...대오를 지키는것은 결국 신념과 강철 같은 조직력이라고 생각하네요.
    백골단... 전경중에 사복 체포조를 그렇게 불럿는데... 하이버가 햇빚에 반사되는 것을 보면 햐얗게 비추기에 그렇게 불럿는데...
    지랄탄 최류탄 난사후에 백골단이 뛰어 오면, 전방에 서서 막고 있음 두렵고 떨립니다.
    지랄탄에 숨이 막히는 것도 있지만, 더 두려운건 거침없이 달려오는 이들이 더 두렵습니다.
    여기서 절대적으로 중요한건... 흩어지면 안된단 겁니다.
    참아야지요. 그냥 뿔뿔이 흩어지면 하나둘씩 다 잡혀갑니다.
    서로 자리만 지키고 있음 못들어옵니다.
    전경도 사람이기에, 앞에서 막아서는데, 마구잡이로 들어 올순없습니다.
    그래서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나왓는지도 모르겟네요.
    하여간 막아낼수 있냐 없냐의 핵심은 흩어지지 않고 지키는 것입니다.
    이건 서로의 신뢰할수 있을때 만이 가능한것이고요.
    옆에 학우를 못믿으면, 그냥 도망갈수 밖에 없네요.
    그런면에서, 오월대 녹두대가 독보적이엿다고 생각하고 싶네요.
    대오를 짜면 누구도 물러서지 않는다는 각오... 이런 각오면 쉽사리 깨지지 않을거 같아요.

    지금 촛불 집회는 한계도 있고 나름 문제도 있고 하지만, 저 갠적으론 지금의 방식에 찬성 한표를 던지고 싶네요.
    예전 80년대 군부 시대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사정도 많이 달라젓고,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나이 어린 학생들 중딩 고딩, 요즘은 이렇게 불러서 그냥 편하게 써요
    그리고 유모차를 앞세우고 나오시는 아줌마들...
    이런분들을 보면서, 저는 희망을 보는데, 만약에 촛불 집회에서 서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다시 그때로 돌아갈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다른분은 어떤지요.
    제가 느끼는건 소수는 항상 실패한다는 거엿는데... 그건 조중동에서 원하는 거일것입니다.
    항상 폭력 운운하면서 일반 시민과의 괴리를 만들고 선전을 통해서 폭력 집단이라고,
    호도 하고 나중엔 소수만 남았을때, 일망타진 하는 방식.
    이거에 매번 당하고 그렇게 해왓거든요.
    일본에서의 전공투도 그렇고 유럽에서의 68항쟁도 그렇고, 결국은 함께 하지 못하고 운동이 소수로 전락하게 되면 그다음은 소멸만이 기다리고 있는듯합니다.
    조중동의 흑색 선전은 무서워요.
    위에서도 말햇듯이 흩어지면, 조중동의 흑색선전에 휘말려 버릴듯합니다.
    요즘 한참 인기 있는 말중에 집단 지성이란 말들이 설왕 설래 하는데...
    집단 지성의 가장큰 핵심은 말 그대로 집단이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집단이 되엇을때만이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합리적 지성만이 힘을 가지고, 선도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생각 나서 몇자 적어보앗네요.
    옛일도 생각나고 어제일도 생각나고...

  • 5. scarlettez
    '08.6.29 3:07 PM

    공상과학 소설같네요..
    남대협이 시위를 잘하긴 잘하죠.
    글쓴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편의 무림영화를 쓰셨네요..
    임종석씨가 전대협의장으로 도주생활기간 호위대가 따라다닌건 사실이고
    그들의 과격한 시위가 결국 몰락의 길을 걸어쬬.
    기억이 가물합니다만..
    결국 이사건으로 전대협산하 80%가까운대학이 비운동권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결과를 준거죠
    학내문제에 무관심하고 정치데모만 하는 총학을 일반학우들이 버리게 되죠..
    전대협이 우리 정치사의 민주화에 한획을 그엇다고 부정하기 힘들지만.
    남대협처럼 쇠파이프로 무자비하게 폭력시위를 하는건 용서 받지 못할 행동이엇죠

    이런 폭력성으로 인해서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이어지면서
    학우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한거라고 봅니다..

    임종석 포스터를 학우들이 찢어 가서 간직했다는 얘기엔 실소가 나온느군요,ㅎㅎ
    뭐 운동권 학우들이야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당시 제가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전대협은 임종석 의장즈음 거의 몰락의 길을 치달앗죠..
    그 폭력성때문이죠

    소수의 운동권과 침묵하는 다수였다고 할만합니다..
    얘기가 너무 무협지를 너무 본듯하여 올립니다..ㅎㅎ

    결론은 전대협이 일반학우의 절대적인 지지를 전혀 받지않은
    고집불통 정치데모와 폭력시위의 결과들이 마치 전체학우들이었냥 승화시키는게
    눈에 쫌 거슬려서 적어봅니다

    폭력시위는 어느누구에게도 지지 받지 못합니다

  • 6. 춤추는구름
    '08.6.29 6:36 PM

    님이 말하는거 또한 한편에 있던 사람으로서의 해당되는 말일듯한데요.
    님말은 어떻게 해든 결국은 참여 안하고 그냥 방관자로 있을듯한 글을 보면서 한편 씁쓸하네요
    그리고 임종석에 관한건 당시 티비에도 나온 얘기입니다.
    취업 준비하냐고 잘 안보고 해서 몰랏을지 모르지만, 당시 여고생들 인터뷰도 많이 나왓고요
    님이 안햇다고 그런식으로 오도하는건 좀 그러하네요.

    한가지만 반문해보면, 왜 유독 학생들의 폭력에 대해서만, 이리 심하게 말씀하시는지요?
    본인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제가 보기엔 거의 그런 느낌으로 다가와서 그럽니다.
    그리고 그게 폭력때문에 운동권이 몰락했다는데 어떤 근거를 가지고 말씀하시나요?
    물론, 정치투쟁이나 이런거에 비중을 둔게 사실이고, 그렇다고 그당시 시대상황을 제대로 보고 평가 해야지, 이런식으로 말하는것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이런식의 글이라면 좀 보기 그렇습니다.

  • 7. 餘心
    '08.6.29 6:38 PM

    그 학생운동권의(나중에 전대협으로 대표되는) 고집불통 정치데모와 피 흘림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던 학우들도 그 투쟁의 열매를 고스란히 공유하여 지금은 그나마 대통령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경찰도 최루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고요.

    물론 지금 또다시 공권력의 야만성이 고스란히 되 살아 나고 있습니다. 80년대 후반에는 그래도 경찰의 살인적인 폭력에서 학우들을 지키려고 하는 사수대의 역할로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습니니다. 하지만 지금은 버스 뒤에서 시민들을 향해 다쓴 소화기나 아령을 던지는 경찰로 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이 없습니다.

    정말 전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가 폭력이고 어디서 부터가 자위인지.. 남미의 보프신부님이나 로메로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상황윤리에 입각한 물리력의 사용을 이 땅에 다시 적용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된 것인지..

  • 8. edpp
    '08.6.30 9:54 AM

    scarlettez 님//

    공상과학소설은 원글님 글이 아니라
    지금 조중동이 더 공상과학소설이 같습니다.


    저도 통일선봉대로 96년 연세대에 함께 있었는데요,
    오월대, 녹두대 깃발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최루탄에 지랄탄에 눈도 뜨기 힘들어 켁켁 거리는데
    오월대, 녹두대는 한방향으로 달려나가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덕분에 많은 학생들이 안전하게 피할수 있었고,
    오월대, 녹두대는 전경에게 끌려가면서
    본대가 피하는 지 보고 있는데
    그중 한명과 눈이 마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폭력적이라구요?
    그렇죠.
    하지만 쇠파이프 이전에
    전경은 최루탄, 지랄탄, 칙칙이까지 사정없이 분사했습니다.

    일단 연행되면, 닭장차 타기 전부터 버스안에서 몽둥이로 엄청 맞고
    경찰서에서 뺨따귀 맞고, 각목으로 맞고,
    그러고 난 뒤에 조서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폭력은 싫지만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녹두대 오월대 생각이 났습니다.


    녹두대, 오월대와 함께 쉬는시간에 장기자랑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정말 뒤집어지게 재미있고, 재치만발입니다.
    90년대 학교를 다닌 대학생들이었습다.

  • 9. 리모콘
    '08.6.30 10:05 AM

    임종석 포스터 없어진 건 정말 사실이에요..
    학교 곳곳에 포스터 다 붙이고 돌아왔더니 다 없어졌다고
    애들이 너무 멋있다고 다 뜯어갔다고 해서
    황당했던 기억이 나요...그리고 그때 전대협은 절정기였지 몰락을 맞고 있다는 것도
    틀린 얘기구요..
    저도 폭력은 무지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위에 아이디 어려운 님처럼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옳지않다고 봅니다...왜곡이죠...총학생회가 비운동권으로 간 것도 한참 후 일이고요..
    아이디 복잡한님은 별로 관심도 없었던 분 같은데 뭘 가물가물하는 기억력을 더듬어
    왜곡하시는지 모르겠네요...

  • 10. 열쩡
    '08.6.30 4:21 PM

    전대협이후 한총련이 결성되요
    아마 그게 93년 정도일겁니다.
    임종석이 의장이었던건 89년이구요.
    9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힘을 잃어서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을 주도하던 시기가 끝나버리죠.
    한총련은 아직도 있습니다만
    우리나라가 미국의 식민지, 분단되어 있어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는 기본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이대로 지리멸렬하게 사라질거라 생각됩니다.
    90년대의 투쟁을 아련한 향수로 기억한다는게
    저로서는 거북하네요.
    상처가 많았나봐요.

  • 11. 이윤경
    '08.6.30 7:51 PM

    기억나요..학교축제때 앞면엔 임수경사진, 뒷면엔 임종석 사진... 엄청 인기좋았는데

    저도 그때 샀었구요.. 우리 과 여학생들도 임종석 무지 좋아했는데...

    티비에서도 임종석 그때 홍길동이니 뭐니 엄청 나왔었어요...

  • 12. 브루클린
    '08.7.5 4:08 AM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94학번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시대의 후배입니다.
    무엇보다도 한총련이 힘을 잃게 된 것은...

    전대협이후 NL계열이 다수파를 차지하면서 학생현행문제를 외면하고
    정치투쟁일변도로만 가다가 96년 연대사태때 이후로 급격히 지지세가
    꺽이기 시작했지요~

    어찌보면 올해의 민주노동당안에서 NL계열과 PD계열의 다툼으로
    진보신당이 출범하게 된 것처럼 한총련 내부에서도 통일과 계급,
    학내정치냐? 와 학외정치냐? 가 학교마다 대립되는 양상으로 가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한총련 집행부에서 통일위주의 정치색 일변도로
    그것도 투쟁중심으로 지나치게 가다보니 학내학우들은 등을 돌리게
    된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폭력 지금은 싫습니다, 세상이 바뀌었듯이 시위문화도 바뀌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평화시위가 가능한 것은 선대 선배들인 전대협,

    한총련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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