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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모전녀전

| 조회수 : 2,927 | 추천수 : 146
작성일 : 2010-07-28 12:05:00
11월에 있을 대학 입시를 위해 큰 아이는 큰 아이대로시간에 쫓기고 나는 나대로 쏟아지는 업무에 다음 달부터 시작되는 가을 학기 과목 준비에 서로가 공부짝이 되어 밤을 밝히는 시간이 지나고 있는 여름이다.
밤늦게 공부를 하다가 기지개를 펴면서 딸 아이 방을 보면 아직 불을 밝히고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창에 비추어 보인다.
아이는 아이대로 엄마 방에 아직 불이 켜있나를 살펴보고 먼저 자려면 눈치가 보인다는 말에 서로를 흘기면서 웃곤 한다.
며칠 전엔가 큰 아이와 잠깐 커피 브레이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살면서 가장 슬펐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얘기하게 되었다.
좀전까지만 해도 깔깔거리고 우스개소리를 하던 아이가 자기는 우리 집이 압류를 당해 자기가 좋아하던 피아노에 빨간 딱지가 붙고 결국 그걸 잃게 되었을 때가 가장 마음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빠의 사업 실패로 집안 살림 모두에 딱지가 붙고 집행관이 아이들의 피아노에까지 딱지를 붙일 때 큰 아이는 5학년이었다.
피아노 연습을 한번 시키려면 잔소리가 나와야 하고 잔뜩 부운 얼굴로 마지 못해 피아노 의자에 앉던 아이였는데, 그래도 제 속으로는 많이 속이 상했었나 보다.
이전에도 아이들의 마음을 풀어주느라 몇 번 그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 그 때에는 그다지 내색을 많이 하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보이면서 속을 털어놓으니 나도 가슴이 뭉클하고 마음이 아팠다.
"엄마 아빠가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똑같은 것으로 다시 마련해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고 이젠 엄마한테 야단 맞으면서 피아노 레슨을 다니는 어린 아이가 아니고 이렇게 자란 것도 엄마는 막 아쉽고 그래. 엄마 아빠가 진즉에 회복을 시켰어야 했는데 말이야"
그렇게 피아노를 잃고 나서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형편이 좋아지질 않아서 피아노를 사주지 못하고 있을 때 시어머니께서 아시는 양로원에서 쓰던 피아노를 싸게 구하셔서 그야말로 앤틱 수준의 피아노를 간신히 연습용으로 들여놓은 후 줄곧 나는 피아노 얘기를 꺼내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거실 한 편에 양로원의 노인들보다 더 기운없어 보이는 바랜 색으로 놓여있는 피아노를 볼 때마다 슬며시 피하게 되었고 나 스스로도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가 꽤 오래 되었다는 게 비로소 생각이 난다.
그동안 딸아이는 그 낡은 피아노를 마다 않고 마음이 울적할 때나 공부에 지칠 때면 제가 좋아하는 곡들을 치면서 잃어버린 피아노를 그리워했었나 보다.
겁많은 어미는 옛일을 들추기가 두려워 피아노를 멀리 하고 있는 동안 딸아이는 낯설고 낡은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상처를 어루만졌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많이 아프고 아이에게 미안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극성엄마를 자처하던 그 옛날에 큰 아이의 만 네 살 생일 선물로 들여왔던 야마하 피아노를 보내고 나도 남편도 아이들 보기가 안좋았지만, 다시 똑같은 걸 살 형편은 안되니 그저 잊고 살았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화장대 서랍 한 귀퉁이에서 옛날 피아노의 잠금 열쇠가 있는 걸 발견했다.
법원에서 사람들이 피아노를 가져갈 때 아마도 열쇠는 미처 못 챙겼었나 보다.
나역시도 무슨 경황에 열쇠까지 살뜰하게 챙겼으랴.
우리 아이들이 한참 어렸을 때에는 그 열쇠를 가지고 장난을 하다가 야단을 맞기도 하고 결국 내 화장대 깊숙히 숨겨놓았던 건데 아직도 그 속에 들어있는 걸 보니 딸 아이의 얘기도 있던 차에 만가지 생각이 들었고 내심 반갑기까지 했다.
큰 아이를 불러 눈을 감아 보라고 하고 손에 열쇠를 쥐어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이게 뭐냐고 한다.
"엄마 아빠가 다시 찾아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다시 꼭같은 것으로 사주기는 어려울지도 몰라. 엄마 아빠 마음은 그보다 더 한 것도 해주고 싶은데, 형편이 그렇질 못한 게 미안하고 그래. 그렇게 어려운 시간들을 함께 잘 헤치고 이쁘고 착하게 자라 준 우리 딸한테 고마워. 이 열쇠 잘 가지고 있다가 이 다음에 아빠가 새로 피아노를 사줄 때에 그 피아노에 이 열쇠가 맞을지 한번 보자. 그때까지는 raincheck처럼 잘 간직하면서 기다려 줘. 엄마 아빠의 약속의 증표라고 생각하고서."
큰 아이의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말을 잊질 못했다.
남편도 눈물을 보이기가 싫어서 다른 쪽을 보는 척하고 있었고 나는 아이의 눈물만 닦아 주고 있었다.
"엄마, 그래도 괜찮았어요. 잃어버린 것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그 덕에 건방지고 철딱서니 없는 애로 자라지 않았잖아요. 그때 고생을 해보지 않았다면 난 세상에 돈나무가 있어서 돈이 필요할 때마다 가서 따다 쓰면 되는 줄 알고 살았을 거에요. 그래도 지금 치는 피아노에는 할머니의 사랑이 들어있잖아요. 저 피아노 새로 안사주셔도 괜찮아요. 지금 있는 것도 시간이 없어서 미처 못치는데요, 뭐. 그때 그 피아노를 잃어서 맘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어요. "
엄마는 미처 해보지도 못한 생각을 큰 아이는 참 기특하게도 하고 있었나 보다.
아들 딸들이 드린 용돈을 모아 피아노가 없어 탁자에 손을 두드리는 손녀딸들을 위해 피아노를 사주신 할머니의 따뜻한 사랑에 큰 아이는 상처도 아물어가고 부쩍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을 나는 미처 모르고 있었나 보다.

아니 모르고 있었다기 보다는 어쩌면 아이의 상처보다 내 상처가 더 커서 주체를 못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시어머니께서 처음 그 피아노를 얘기하셨을 때에도, 또 막상 우리집에 들여왔을 때에도 나는 큰 관심을 안가지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였을 것이다.
한쪽 다리에 달린 바퀴가 망가져서 가져오자 마자 남편이 몇 시간을 붙들고 수리를 해야 했고, 수리를 하고 나서도 자세히 보면 아직도 한 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었다.
이 곳 저 곳에 긁힌 자국들이 있는 걸 본 아이들이 가구 전용 스프레이를 가져다가 뿌리면서 닦았지만 세월이 그대로 담겨있는 모습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싶어 우선 급한 대로 연습용으로 쓰자고 마음을 고쳐 먹고나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새로 좋은 걸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슬그머니 남편이 미워지기도 했던 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깔끔한 내 성격대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짝이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공을 들일 법도 한데 왜 그런지 그러기가 싫었다.

어느 날엔가 아이들이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부르고 있는데 내 마음 속에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생각났다.
그 옛날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가 사주셨던 작은 올갠이었다.
지금 우리 막내보다도 더 어린 내가 한껏 기쁜 얼굴로 노래도 하고 좋아라 그 올갠을 치는 모습이 슬라이드처럼 되살아났다.
엄마와 헤어지신 후 그 어느 해인가 아빠가 나의 생일선물로 사주셨던 그 올갠을 그 후에 엄마의 사업실패로 나도 우리 아이들처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도 희미하게 생각이 났다.
큰 아이가 피아노를 잃게 되었을 때 내 마음이 아프고 쓰리던 그 배면에는 바로 나자신의 어린시절의 아픈 상실의 기억이 함께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상처가 미처 치유되기도 전에 내 아이가 꼭같은 상처를 받는 걸 보자니 내 마음에서는 아예 셔터를 내리고 그걸 보려고도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 보호장치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큰 아이가 억지로 마지 못해 연습했듯이 나에게도 피아노 렛슨은 언제나 도망치고 싶은 일과였다. 조금만 틀려도 자로 손등을 치면서 혼을 내시던 선생님도 싫었고 친구들은 모두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그 황금같은 시간에 나혼자서만 붙들려있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올갠은 피아노 연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마지막 남은 아빠의 사랑의 실체였을 것이다.
어린 나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어느 날부터인지 함께 살지 않게 된 아빠가 나를 생각해서 사주신 올갠이 아마도 만질 수 없고 안길 수 없는 아빠의 모습의 대체물은 아니었을까.
올갠을 잃어버린 것이 나에게는 아빠를 또다시 잃은 것이었을 것이고, 올갠을 잃어버렸을 무렵에는 나는 아마도 이제는 정말로 다시는 아빠를 만날 수 없을 거란 것도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의 상처를 안고 어른이 된 내가 내 아이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나서 그걸 꼭같은 이유로 잃고 나자 잊고 있었던 내 상처가 다시 헤집어진 것이었다.
아이는 지혜롭게 나름대로 상처를 싸매면서 지나오는데 나는 아직도 삼십 년 세월에 묶여있는가 보다.

부모의 마음은 대체로 비슷해서 내가 한 고생을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게 마련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겪은 물질적 어려움을 나도 내 아이들에게만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우리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몰아쳤을 때 느낀 미안함과 측은함은 견디기가 힘들었다.
내 아이는 세상이 장미빛이라는 것만 보여주고 싶고, 내 아이는 세상의 이쁜 것만 보고 살았으면 좋겠고, 내 아이는 삶의 어두운 면을 알게 해주고 싶지 않았었다.
그런데 불가항력으로 내 아이들이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 하나 삶의 굴곡을 같이 걸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이들의 마음에 남게 될 상처들이 두려워서 가슴을 졸였었다.
나역시도 가난을 겪었고, 그 상처가 어른이 되어서도 짙게 남겨진 부분들이 있고, 그로 인해 나의 삶에 그다지 좋은 영향이 있었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나와 비슷한 길을 지나갈 때 나는 많이도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해서든 부정적 영향을 줄여보려고 안간힘을 쓰긴 했지만 늘 자신이 없었다.
내가 지닌 상처들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나를 지배하고 나의 삶을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몰고 갔는지를 아는지라 지레 겁을 먹는 건지도 모른다.

부모가 되어봐야 어른이 된다고 했던가.
큰 아이를 바라보면서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었을까.
우리 집에서 올갠을 내갈 때 엄마도 나와 꼭같은 대사로 이담에 더 좋은 걸로 사주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그 이후로는 다시는 올갠과 만나지 못했고, 큰 아이에게 피아노를 사주면서 엄마가 지키지 못했던 그 약속을 다시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또 세월이 지나 나는 또 우리 엄마처럼 기약처럼 잘 알 수 없는 약속을 하고 있다.
나와 우리 큰 아이의 차이라면 무턱대고 그 약속을 굳세게 믿었던 나와 달리 딸아이는 그다지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현명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엄마의 차이는...이제야 돌아보면 아무 것도 없는 것같다.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엄마로서의 미진함이라는 공통점만 있을 뿐.

"선영아, 엄마 아빠가 부지런히 돈 벌어서 너 시집갈 때까지 꼭 옛날 그 피아노보다 더 좋은 걸로 사줄께. 너 시집갈 때 가져갈 수 있도록 말이야. 다른 애들은 피아노 잘 안치니까 네가 가져가게 해줄께."
뒷계산없는 엄마는 허황된 공수표를 날리면서 아이를 위로해보려고 한다.
"엄마, 나 피아노는 됐고요. 그거 말고 다른 살림살이 좋은 거 많이 해주세요. 음..최신형들로요."
혀를 내보이면서 엄마를 놀리는 딸아이의 미소가 싱그럽게 보이는 여름날의 오후이다.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꽃띠
    '10.7.28 12:52 PM - 삭제된댓글

    짝짝짝!!!

  • 2. 호리
    '10.7.30 3:45 PM

    아웅.. ㅠㅠ
    아이에게 상실된 것, 상처가 있더라도 엄마가 그 마음을 알아주고 어루만져주면 아이는 회복된다네요.
    따님들은 동경미님 같은 엄마가 있어서 행복할거에요.

  • 3. 동경미
    '10.8.1 2:35 PM

    꽃띠님, 박수까지 쳐주시니 감사합니다^^

    호리님, 아이를 기른다는 게 아이만 자라는 게 아니라 엄마도 함께 성장하고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가 봅니다. 아이들이 회복되면서 저도 회복되고 함께 어우러져가는 거지요.

  • 4. kansasgirl
    '10.9.13 2:20 PM

    임상심리학자가 되도 아주 잘 하실것같네요:) 내면성찰이 뛰어난 글 잘 읽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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