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 다니면서 살림하며 살다보니, 무언가 꾸밈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도무지 힘이 들어서요...
가끔은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순수한 가래떡이 맛있고, 건빵의 목막힐 듯 풍부한 탄수화물의 맛이 좋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오늘 제가 쓰는 글이 그런 건빵이나 가래떡 같은 맛으로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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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들은 아시다시피, 저는 한국 음식점은 커녕, 식재료 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은 머나먼 명왕성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한인타운이 가까운 곳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에는 "쌀국에는 동네마다 한인타운이 있어서 한국에서 아무것도 안보내주셔도 돼요." 하며 친정 엄마를 안심시켜드리곤 했었는데요...
고 백하고 용서를 구하자면, 엄마의 친구분들 중에서 미국에 유학가 있는 자녀에게 밑반찬을 만들어 부치신다는 분들을, "그 아줌만 극성이셔... 미국에도 한인마트에 가면 없는 게 없이 다 있는데 말이야" 하며 제가 흉을 보기까지 했었답니다.
자신이 경험한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았던 우물안 개구리였던거죠.
크 나큰 한인타운이 한 시간 거리에 있었던 훌륭한 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잡아서 옮겨온 이 곳은 북쪽으로 네 시간 아니면 남쪽으로 세 시간 (그러나 천애 낭떠러지를 끼고 운전해야 하는 만만찮은 도로) 운전해서 가지 않으면 한인마트가 없는 곳입니다.
이 마을에도 제법 큰 대학이 있고 한국인 유학생과 연구원과 교수가 많은데도 이상하게 한국 음식점이나 식재료를 파는 마트는 무척이나 부실해요.
그러다보니 몇 년 전에 테뉴어 심사를 받는 과정 중에는 '만약에 테뉴어를 못받으면 이 동네에 한국반찬 가게나 김밥집을 하나 차려서 먹고 살아볼까?' 하는 상상을 하며 스트레스를 다스리기도 했었지요 :-)
암튼, 이런 척박한 곳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다보니, 미국에서는 귀한 김치냉장고도 마련하고 해마다 김장도 직접 하며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추수감사절 방학이 되면 (제가 다니는 학교는 일주일간 방학을 해요) 편도 네 시간 거리를 올라가서 배추와 무와 젓갈과 소금 등을 사가지고 다시 네 시간을 달려 돌아오는 여행을 시작으로 저만의 김장축제가 시작됩니다.
싱싱한 배추가 가득찬 상자를 차에 실으면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해지죠.
오랜만의 한인타운 나들이에 온가족이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식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사먹는 즐거움도 크구요.
차 안에서 지루해 하는 아이들과 게임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그러다 안되면 빽 소리를 지르기도 하지만 (여기서 반전은 제 전공이 유아교육 이라는 거... ㅋㅋㅋ), 그래도 왕복 여덟시간 동안에 우리 가족 네 사람이 작은 공간에서 지지고 볶으며 꼼짝없이 함께하는 시간은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는 큰 추억거리가 되겠지요.
장을 봐오면 꼬박 하루가 다 지나가고, 다음날은 드디어 배추를 절입니다.
한 박스에 열 포기씩 두 박스이니 스무포기, 넷으로 가르니 여든쪽의 배추를 소금물을 풀어 절이고나면 또 하루가 가네요.
그 다음 날은 양념을 만들어놓고 배추를 건져서 헹구고 꽉 짭니다.
배추를 깨끗하게 헹구면서 허리가 아프고 힘들어도, 이 과정이야말로 내 손으로 김치를 만드는 진정한 이유이니, 불만은 없습니다.
참, 양념에 넣을 부추를 다듬고 씻는 과정도 참 지루하고 힘든 일이지요.
내 사랑하는 가족에게 먹일 음식이라도 이렇게 힘들고 귀찮은데, 돈 벌려고 만들어 파는 음식은 오죽 귀찮을까?
그래서 무척 소홀히 하기 쉬운 일을 내가 지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김치를 담는 일이 더욱 소중한 노동이라고 여겨집니다.
만들어둔 양념이 잘 숙성이 되었습니다.
무 에서 나온 물이 고춧가루를 잘 불려서 부드러운 죽처럼 빨간 양념이 되듯, 까나리 액젓과 마늘 생강의 각기 다른 맛이 서로 잘 어우러지듯, 뻣뻣하던 부추가 보드랍게 숨이 죽어 배춧잎 사이에 잘 파묻히게 되듯, 모든 일에는 약간의 숙성 기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양념이 조금 더 숙성되라고 기다리는 동안에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삶습니다.
김치 양념에 쓸 육수를 만들고 남은 건더기에 물을 더 붓고, 통양파 한 개, 통후추 몇 알, 된장 한숟갈을 넣고 고기를 삶으면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을 채웁니다.
아마도 제 김장축제의 절정이 이 순간이 아닌가 싶어요.
삶은 고기를 식히고 밥을 앉혀놓고, 김치를 버무립니다.
김 치냉장고 전용 통을 모두 열어서 나래비를 세워두고 버무린 김치가 통 한 개를 채우면 바로 뚜껑을 덮어서 냉장고에 넣으니 줄어드는 통만큼 넓어지는 마룻바닥, 점점 채워지는 김치냉장고... 시각적으로 내 노동의 결실이 느껴지니 참 기쁩니다.
김치냉장고를 가득 채우고도 큰 다라이에 여남은쪽이 남았습니다.
돼지고기 보쌈 파티에 초대받은 후배 교수에게 서너쪽 싸주었습니다.
내년 여름이면 첫 아기 엄마가 될 사람이라, 이왕이면 가장 예뻐보이는 김치타래로 골라주었죠.
다음날부터 한 이틀간은 제 전화를 받고 와서 제 김치를 얻어가는 사람들로 제법 붐빕니다.
그냥 빈손으로 와도 충분히 반가운데, 어떤이는 애플파이를, 어떤이는 펌킨파이를 구워오고...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니, 제가 정성껏 만든 김치를 나누어 주어도 조금도 아깝지가 않아요.
이왕에 온 김에 김치해서 밥먹고 가라는 제 손길에 모두들 못이긴척 주저앉아 함께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풀고...
다들 추수감사절 방학중이라 모처럼 여유로운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어요.
땅속숙성 버튼을 눌러놓으니 앞으로 6일간 땅속에 묻은 김치맛을 만들어준다고 하는군요.
그 다음에는 장기보관 기능으로 자동으로 넘어가서 내년 이맘때까지 우리집 밥상에 맛있는 김치를 제공해주는 김치냉장고가 참 기특합니다.
앞으로 이 김치를 가지고 볶음밥도 해먹고 만두도 빚고 찌개도 끓이고 부침개도 부치고...
내년 추수감사절 방학이 되면 조금 더 자란 아이들과 조금 더 흰 머리가 늘어난 우리 부부는 조금 더 낡은 자동차를 타고 또 김장 쇼핑을 하러 올라가겠지요.
그렇게 해마다 조금씩...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들은 늙어가고 (하지만 동시에 현명함을 익혀가고),
제 김치맛은 조금씩 더 깊은 맛을 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제 김치를 고맙게 받아가주는 좋은 사람들이 제 주위에 함께 있기를 빌어봅니다...
사진은 하나도 없고 지루하게 길기만 한 글을 읽어주시는 너그러운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추수감사절, 영어로는 땡스기빙, 즉 얻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기간...
김장 김치와 함께 해본 단상이었습니다.
사진이 정말로 하나도 없으면 섭섭하니, 김치 사진 한 개만 올려볼께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