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침묵 속에서 생활했다. 경호원들이 항상 곁에 붙어 서서 악수를 청하는 사람을 막았다. 그래서 백여 명이 있는 로비에서 누구와도 손을 대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다른 챔피언들은 실제보다 큰 존재감을 느끼게 한다. 카리스마를 풍긴다. 포먼은 침묵을 지켰다. 침묵 속에서 뭔가 진동하는 듯했다. 그런 사람은 삼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아니, 삼십 년도 더 되었던가? 어느 해인가 여름 한 철을 정신병원에서 일하며 보낸 이후로, 노먼은 이런 식으로 자신만의 침묵 속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신병원에서 일하던 시절 노먼은 밥 먹고 다음 끼니때가 된 때까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긴장증 환자들을 돌본 경험이 있다. 환자 중 한 명은 주먹을 말아 쥔 채 몇 달이고 같은 장소에 섰다가 갑자기 주먹을 뻗어 지나가던 간호사의 턱뼐르 부러뜨리기도 했다. 경비원들은 늘 새로 온 동료에게 긴장증 환자가 가장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물론 긴장증 환자들이 힘도 제일 셌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들을 필요도 없다. 사슴 한 마리가 숲에 선 그림이 “전 약하고, 대체할 수 없고, 멸종 직정인 동물이랍니다.”라고 읽힌다면, 긴장증 환자가 선 모습은 이런 느낌을 준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모든 힘은 내게로 올 것이다.”
(....) 사실 사람들이 알리에게 느끼는 (그리고 그가 갖춘 힘에 상대적으로 경외감이 적은) 한 가지 이유는 성격상 알리가 일반인을 해칠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알리는 쏟아지는 공격을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처리하고 다음 상대와 맞설 사람처럼 보였다. 알리와 비교해서 포먼은 너무 위협적이었다. 어떤 끔찍한 살육을 저지르게 되더라도 계속 전진해 나갈 듯했다.
(...) 그를 정신병자로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차라리 긴장증 환자들이 익힌 요령(침묵을 지키고 집중하면서 움직이지 않는)을 이용하는 육체적 천재라고 보는 편이 더 나았다. 알리는 전혀 다른 방식의 천재였기 때문에, 이번 시합은 다시 보기 매우 어려운 싸움이 될 터였다. 전혀 다른 영감을 주는 두 화신이 맞붙는 것이다.
- 노먼 메일러, <파이트(The Fight)> 중에서
전에 줄리언 반즈의 소설 <나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에서 ‘학자적 몸’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자 주인공 직업이 대학교수였는데 전직 배우 출신인 여자와 섹스를 하는 부분에서 등장했던 것 같아요. (아니, 아내와 러브러브하던 도중에 나왔던 표현이었나? 암튼 흐...) 자기 몸은 ‘학자적 몸’이어서 섹스에 그리 능하지 못하다는 거였죠. 저는 그 표현이 참 재밌어서 소설을 읽다가 킥킥댔었습니다. 학자적 몸이라니.^^
그 표현 보니까 문득 <섹스 앤 더 시티>의 한 장면도 오버랩이 되더군요. (잠시 ‘애덜은 가라’ 타임을 갖겠습니다) 캐리가 사귀었던 남자 중에 단편소설을 쓰는 소설가가 있었어요. 근데 이 남자가 러브를 할 때 ‘오래’ 하지 못합니다. 오래는커녕 ‘자, 판 한번 벌여볼까?’ 하는 찰나 끝내버립니다. 남자의 엄마도 무슨 작가인가 그랬고, 깨어 있는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어요.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섹스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캐리의 눈에 그 여자는 참 멋있게 보였고, 그래서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실상을 알고 보니 자유롭게 아들을 키운다는 명목 하에 아들의 사생활까지 시시콜콜 알려고 드는 ‘아들 집착증 엄마’일 뿐이었죠. 당근 그 엄마는 아들의 섹스라이프까지 훤히 꿰고 있었구요. 그래서 캐리가 고민하는 걸 알아차리고는 조용히 불러서 한 마디 조언(?)을 해줍니다.
걔가 단편소설 작가라서 그런지 짧다고 하더라. 전에 여친들도 그거 땜에 많이 고민하던데, 너는 그걸 좀 이해해주면 안 될까?
아, 그때도 그 표현이 어찌나 재밌던지요. 단편소설 작가라서 빨리 끝낸다면 대하소설 작가는 어떻다는 건지.-_- 어쨌든 줄리언 반즈식으로 분석을 해보자면 그 남자는, 따라서 ‘문학장르적 몸’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요즘 무하마드 알리와 조지 포먼이 벌인 세기의 대결 (두 선수가 흑인인 데다가 대결 장소도 아프리카 콩고였기 때문에 일명 ‘럼블 인 더 정글(the rumble in the jungle)'이라 불린 대결이었죠. ‘정글에서의 으르렁거림’ 정도?)을 다룬 <파이트>를 읽고 있어요. 그냥 알리에 대한 책을 한 번 읽고 싶었던 차에 이 책이 눈에 띄어서 집어 들었죠. 아직 초반부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 초반부에 저렇게 ‘육체적 천재’라는 표현이 나오더군요.
긴장증 환자와 조지 포먼의 인상을 대비시키며 진행하는 서술도 일품이고 표현도 그럴싸합니다. 육체적 천재. 저는 스포츠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가끔 신문에서 스포츠 기사 읽는 건 즐깁니다. 표현들이 너무 재밌어서요. 2002년 월드컵 관련 기사 중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이 결승전에 대한 기사예요. 그때 독일과 브라질이 맞붙었는데, 브라질의 호나우두나 히바우두 못지않게 당시 유명세를 타고 있던 선수가 독일의 골키퍼 올리버 칸이었죠.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처럼 생긴 선수요...) 골을 기막히게 잘 막아내서 막 인기가 올랐었습니다. 근데 독일이 져버린 거죠. 그 소식을 전하는 신문기사를 읽고 있던 차 이런 구절이 확 눈에 들어오더군요. 브라질팀이 골을 넣고 승리를 확정지은 뒤 광란의 세리머니를 했다는 얘기 다음에 나온 구절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동안 운동장에 앉아있는 올리버 칸이 눈에 띄었다. 그때 그는 세상에서 제일 고독한 사나이였던 것이다.
아, 정확하진 않은데 대충 저거랑 비스무리한 문장이었습니다. 저거 읽고 ‘햐... 멋있네’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하여간 육체적 천재. 그렇다면 육체적 천재는 동물(그 중에서도 맹수)의 영혼이 인간의 몸에 깃든 사람이 아닐까 싶은데, 맹수 중에도 성격이 유들유들하면서 쾌활한 타입이 있고 묵직한 타입이 있다 이거죠. 그 두 천재가 벌일 세기의 대결이 지금 서서히 다가오고 있네요.^^ 그리고 그 대결의 정점은 제가 좋아하는 김정환이 그린 저런 장면과 같을까.... 하고 미리 생각해봅니다.
권투선수.
핏덩어리로 한데 뒤얽혀,
급기야 스스로 공포를 뛰어넘고 어떤 운명의 처참 같은 것을 이룩한다.
이 지상의 것이 아닌.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육체적 천재
프리댄서 조회수 : 947
작성일 : 2009-04-03 17:37:32
IP : 218.235.xxx.134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감사
'09.4.3 7:17 PM (118.219.xxx.9)멋진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2. 프리댄서
'09.4.3 10:12 PM (218.235.xxx.134)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멋지게 봐주셔서..^^3. 하늘을 날자
'09.4.6 10:51 AM (124.194.xxx.146)크. 그 긴장감이 저에게도 막 전해져 오는 느낌이네요. 몇 번 다시 읽어도 (조금) 소름이 돋을 정도. 크.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