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집' 아파트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서평] 회사 명퇴한 계약직 경비원이 쓴 <아파트 경비원>
09.03.07 16:39 ㅣ최종 업데이트 09.03.07 17:31 김학현 (kimh2)
젊은 여자가 남편 출근 뒤 외출을 하면서 아파트 수문장인 내게 부탁했습니다.
"아저씨예. 오늘 혹 우리 애 아빠 지 밖에 나간 일이 있느냐고 묻거든 없다고 캐주이소."
그런데 그날 저녁 여자의 남편은 귀가하면서 또 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늘 혹시, 우리 집사람 밖에 안 나가던가요?"
참으로 딱한 부탁에 딱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 경비원들은 어떤 대답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답변일까요?
가정을 가진 여자가 남편 모르게 집을 비운다면 그 내용이 어떠할까. 그리고 그 여자의 남편은 왜 아내의 외출을 감시할까?(5쪽)
불황 그리고 실직
<아파트 경비원>은 불황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한 회사 간부가 아파트 경비원으로 취직하여 겪은 경험을 적은 논픽션이다. KT통신 홍보실 실장으로 있다가 명예퇴직을 하고 실제로 아파트 경비원으로 2년여 동안 일해 온 신춘문예 수상자 출신 이응수 작가의 논픽션이다.
타의에 의해 나도 한때 교회에서 주유소로 일자리를 옮겨야만 했던 짠한 경험이 있는지라, 책 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뿐 아니라 글쓴이인 경비원 아저씨가 남 같지 않아 다른 책보다 더욱 실감나게 읽은 책이다. '주유소에서 봤던 꼴불견들이 고스란히 아파트라는 개미집에도 살고 있구나'하는 생각에 어찌나 실감이 나는지.
"목사님, 어떡하면 좋대요? 울 아들이 회사를 그만 뒀다고 하네요. 한창 돈 들어가는 손자들은 어떡허구요. 정말 걱정이에요. 그렇다고 내가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구. …."
말끝을 흐리며 눈에 글썽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한 권사님 할머니가 내게 말한다. 나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없기에 마음만 아프다. "기도하면서 기다려 봅시다" 이게 내가 한 옹색한 대답의 전부다. 요즘 불황이 여러 가정을 깨고 있는 모양이다. 노인요양시설의 할머니까지도 아들의 실직을 걱정해야 하는 걸 보면.
이름 대면 알 수 있는 악기회사에 다녔는데 아마 감원 바람이 분 모양이다. 소위 명퇴라는 걸 할머니의 아들이 당한 모양이다. 대부분 내가 있는 노인요양시설엔 무의탁 노인들이 생활하고 있지만 혹 가다 자녀들이 있는 분들이 있다. 아무도 없는 이들보다 딸이라도 둔 분들이 유세를 하는 게 요양원의 풍경인데, 요즘은 자녀를 둔 분들이 더 걱정이다. 불황의 늪은 요양원의 노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아파트 그리고 천태만상의 인간
경비원만큼 '아파티즌(아파트에서 사는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한 경비원이 망원경처럼 들여다 본 아파트 이야기!'라는 겉표지의 문구처럼 참으로 적나라한 이야기들이 여러 편 들어있다.
서두에 적었듯이, 아내를 의심하는 남편, 남편의 의심을 알고 거짓말을 부탁하는 아내. 이들이 한 식구라며 한 공간을 쓰는 곳, 그것이 바로 아파트란 곳이다. 아파트 경비원이 무슨 죄라고 그 무지막지한 죄얼을 아파트 경비원의 어깨에 지운단 말인가.
인터폰이 호들갑스럽게 울려 1902호로 달려간 경비원, "문 열렸어요. 그냥 들어오세요"라며 반기는 주인여자, 그녀는 혼자고 팬티만 입은 알몸에 투명한 가운 잠옷 하나만 걸친 채 주스 컵을 내밀며, "이거부터 한 잔 드시고 보세요"라며 친절을 베푼다.
여자의 입가에 드린 웃음은 묘하고, 여자의 몸짓은 눈이 부셔 대놓고 보기가 민망하다. 보일러가 고장 났다고 해 달려간 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보일러 작동은 정상이다. "아자씨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죠. 그럼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우리 집에 모처럼 오셨는데, 자 이거 받으세요" 교태어린 말에 잔에 든 주스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내뺐다는 이야기.
담배꽁초를 남의 화단에 던지는 버릇을 가진 사람, 담배꽁초 던진 사람을 찾는다고 "찾아와 정중히 사과하라. 안 하면 아파트에 사는 동안 철저히 저주할 것"이라는 전단지를 게시판에 내 건 사람. 장애인이 위층에서 걷다 넘어지는 소리에 "병신 육갑한다"며 좀처럼 봐주지 않고 조용히 시키라고 경비원만 닦달하는 성깔 사나운 노인.
사랑 고백을 위해 가스배관을 타고 올라가 스스로 양상군자가 된 남자. 일도 안 하고 경비원에게 근로봉사 실천 확인증 찍어달라고 하는 아이. 일을 안 하면 안 찍어준다니까 부모가 찾아와 "아저씨가 하도 도장을 안 찍어준다고 해서 내가 왔습니다"라고 떳떳이 도장 찍기를 강요하는 사람.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경비원
이 대목을 읽을 때쯤에서는 나도 울화가 치밀었다. 경비원 이 씨는 선한 고집을 부렸던 모양이다. 아이가 와 근로봉사를 하기 전에는 안 찍어 준다고. 그러나 쫀쫀하다며 경고까지 하는 아파트 주민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나는 서랍을 열어 도장과 도장밥을 내놓았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경비원이니라. 일이 바로 되자면 나는 끝까지 내놓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게 무엇인가. 상처뿐인 영광은 승리가 아니다. 이야기는 될지 모르지만 최소한 내 손으로 찍는 수모만이라도 피해서 상대방에게 경각심을 주자는 선에서 자신과의 타협을 본 것이다."(52쪽)
이 대목을 읽을 때는 내가 주유소에서 일할 때가 생각나 가슴이 아렸다. 내가 일하던 주유소에는 세차기가 있다. 주유를 한 소님들에게 서비스 차원에서 세차를 해준다. 근데 완전 공짜가 아니라 한 대당 천 원씩을 받았다. 그런데 그 세차비를 안 주고 가는 손님들이 꽤 있다.
세차비를 먼저 받고 세차하기로 주유원들끼리 짜놓았다. 근데도 세차비를 달라면 세차가 끝나면 준다고 한다. 그리고 세차를 마치고 나면 일언반구도 없이 사라진다. 그럼 다음에 그 손님이 오면 세차를 안 해줘야 맞다. 그러나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주유원이니라. 허, 이렇게 같을 수가 없다.
요즘은 내가 있는 요양원에 학생들이 봉사를 온다. 그런데 그게 봉사는 안 하고 확인증만 떼 달라는 부모들이 있다. 어쩜 책 안의 풍경과 같은지 모른다. 이렇게 해서 키운 자녀가 이 사회를 어떻게 가꿔갈지 그게 걱정이다.
<아파트 경비원>은 여러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글이다. 아파트형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정말 무궁무진하다. 여기 다 옮길 수는 없다. 재미나는 촌극과 진풍경, 때론 대중 속의 고독한 군상,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는 즐거움이 사뭇 크다.
덧붙이는 글 | *<아파트 경비원> 이응수 지음/ 도서출판 마음의 숲 출판/ 2006년간/ 283쪽/ 값 9000원
*이기사는 갓피플, 당당뉴스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처 : '개미집' 아파트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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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집' 아파트에선 도대체 어떤 일이?
세상은 요지경 조회수 : 2,873
작성일 : 2009-03-08 12:07:37
IP : 119.196.xxx.17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음
'09.3.8 12:15 PM (210.91.xxx.157)본문 중에 '한 경비원이 망원경처럼 들여다 본'은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이 맞겟지요? ㅎㅎ
옮겨 두신 글 잘 읽었습니다.2. 참으로
'09.3.8 12:23 PM (121.140.xxx.90)아파트 여서가 아니고, 사람사는 세상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빌라나 다세대도 마찬가지죠.
제가 아파트 반장을 하는데, 별의별 이상한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야 한달에 한번정도 방문하는 정도지만
아저씨들은 매일같이 사람들 얼굴을 대면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까요?
세대조사가면 팬티바람에 나오는 아저씨, 겨울이면 내복바람에 나오고..ㅋ
편한건 좋은데, 가출건 가추고 맞이해야하는건 아닌지..3. ..
'09.3.8 12:29 PM (125.177.xxx.49)글쎄요 몇가지 얘기는 믿어지지 않아요
사람 사는데가 다 비슷하지만..
그리고 요즘은 경비 아저씨들이랑 개인적인 얘기 안하고 택배 전해주는 정도죠4. 그러게요
'09.3.8 12:59 PM (125.178.xxx.15)울 경비실에선 제 얼굴을 알기나 할지 모르겠네요
5. 윤리적소비
'09.3.8 11:07 PM (125.176.xxx.211)전 위내용이 공감이 가요.. 세상엔 정말 별별 사람 다 있거든요
전여옥, 진실, 여기 사이트에만 있어봐도 별별 사람 다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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