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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한 사람

조회수 : 2,442
작성일 : 2009-02-06 22:05:41
저는 남편의 직업때문에 외국생활한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와 많이 달라서, 한국식료품 구하기도 어렵고, 책이나 잡지도 구하기 쉽지 않답니다.

저희 집에 두번 다녀간 친구가 있어요.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케이스입니다. 부부가 정말 맨손으로 맞벌이 생활로 시작했지요. 남편이 일중독으로 불릴만큼 회사일을 차분하면서도 성실하게 해냈고, 커리어 관리도 잘 했어요. 몇번 이직하면서 연봉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라서 지금은 억대연봉이 되었죠.
재테크를 굉장히 잘 해서, 주식/펀드/부동산 등으로 재산을 알차게 불렸고, 워낙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부부예요. 거부는 결코 아니지만, 주위사람들이 알차다고 부러워할만큼의 살림입니다.

남편도 그렇고 이 친구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성심성의껏 베풀지만, 스스로에게는 인색하기가 그지없어요. 아이들도 물질적으로 무척 소박하게 키웁니다. 시댁식구며 친정에는 비싼 선물도 척척하고, 저희 식구가 어쩌다 한국에 나가면 호텔에 데리고 가서 비싼 밥이며 선물을 안겨주는 친구지만, 정작 자신은 옷차림이며 살림살이며 수수하기가 그지없어요.
백화점에도 안 가고 구로나 문정동같은데서 이월상품만 골라서 그것도 살까말까 고민에 고민을 하면서 사입는 사람...

예전에 아이들만 데리고 저희 집에 와서도, 시댁식구들 친정식구들 줄 선물만 몇 가지 사고는, 자기걸로는 립스틱도 하나 안 사던게 기억이 나요.

이 친구가 결혼 13년만에 처음으로 <가족여행>이란걸 하게 되었습니다. 죽도록 일만 하던 남편이, 공부에 찌든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지켜보며 속이 타는 친구를 위해 생각한 선물이래요.
패키지 여행으로 열흘짜리 상품인데, 저희 집 근처를 지나는 일정이 있더군요. 그래서 저녁에 호텔에서 만나기로 하고 몇가지 선물을 챙겼습니다.

예전에 저희 집에 왔을때 독일제 압력밥솥을 사고 싶어했었는데, 가격표 보고는 고민만 하다가 가던 친구의 모습이 기억나서 좋은 압력밥솥을 하나 샀어요. 그 외에도 평소에 값이 꽤 나가서, 저는 사서 못 쓰지만, 이 친구가 기뻐할 것같은 물건을 몇 가지 골랐지요. 바리바리 쇼핑백을 들고 호텔에 가면서 기분이 좋았어요.

저는 항상 이 친구에게서 뭔가를 받기만 했었거든요. 외국에서 고생한다고, 저에게 맛있는거 하나라도 더 챙겨먹이려고 하고, 저희 아이들에게 좋은 운동화라도 사주고 싶어서 신경쓰고, 롯데월드니 공연장이니 초대해주던 친구에게 드디어 마음의 빚을 갚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가족들을 대동하고 둘이서 호텔 로비에서 만나서는 얼싸안고 눈물이 핑 돌고, 아이들은 또 아이들대로 반가워서 어쩔줄 모르고... 그렇게 방으로 올라가서 밀린 얘기 나누며 선물을 주고 받았는데요...

세상에... 여행가방 두 개를 저에게 줄 긱종 식료품으로 꽉꽉 채워왔어요. 한국물가 모르는 제 눈에도 이 친구가 꽤 거액을 썼겠다 싶을 정도로... 눈앞이 흐려졌습니다. 그 집 식구들이 이 짐때문에 고생이 많았겠다 싶고... 아 진짜, 이 친구, 저를 울리네요.

친구는 친구대로 제 선물을 받고는 말을 잊었습니다. 그노무 독일제 압력솥... 친정 엄마며 언니에게 다 선물로 안겨주고는, 정작 자신은 10년도 넘은 낡은 국산 압력솥만 써왔던 친구거든요. (저도 알아요, 국산 압력솥 좋은 거... 그런데 이 친구는 외제 주방용품을 써보지 않았기에, 비싼 물건에 대한 일종의 호기심이랄까 관심이 있긴 했답니다. 국산에 대한 폄하는 결코 아니니 오해마시길...)

이렇게 비싼 거 그냥 받을 수 없다며 서둘러 지갑을 꺼내는 친구를 간곡히 만류하며, 저도 친구도 텔레파시로 서로의 진심을 헤아리고 고마워하고 어루만졌습니다.

이 친구... 인색한 사람이에요.
스스로에게만 인색한 사람.
남들에겐 후하지요. 진심으로 배려하고 베풀어요.
그래서 더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잘해주고 싶어요.
그런데 아무리 잘해줘도, 제가 친구에게서 받은 걸 다 갚을수가 없네요. 이번에 선물 잔뜩 사면서 만회하리라 했는데, 또 졌어요. ㅠ.ㅠ
아아... 언제나 다 갚을런지...
IP : 77.57.xxx.76
1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서울.
    '09.2.6 10:09 PM (115.140.xxx.248)

    그런친구를 가진 니이 부럽네요

  • 2. ...
    '09.2.6 10:20 PM (58.226.xxx.115)

    아~~~~정말 부럽네요..부러워요..

  • 3.
    '09.2.6 10:24 PM (58.120.xxx.96)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원글님도, 그 친구분도 모두 훌륭하세요.
    두 분의 우정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 4. 이규원
    '09.2.6 10:28 PM (211.201.xxx.19)

    남에게 인색하지 말고 나에게 인색하게 살고 싶습니다.
    두 분의 우정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 5. 저도..
    '09.2.6 10:29 PM (211.210.xxx.110)

    친구분 같은 삶을 살고 싶은데..
    잘 안되요.
    이글을 보면서
    더 많이 노력 해야겟습니다
    나에게 인색한 사람..

  • 6.
    '09.2.6 10:32 PM (115.161.xxx.221)

    자기에겐 관대하고 타인에겐 인색한 이중잣대의 사람들.. 너무 많죠.
    어쩌면 남들눈엔 제가 그렇게 보일수도 있지 싶어서 자기검열?도 때때로 하게 되구요.
    나에겐 인색하고 타인에게 베푸는것까진 못하더라도
    나와 남에게 같은 잣대로 대하기만 하더라도 정말 훌륭하다 싶습니다.

  • 7. 살면서
    '09.2.6 10:33 PM (119.199.xxx.89)

    그런친구가 그립습니다
    서로의 사정으로 연락이 없네요
    제가 좀 더 풍족해져서.. 많이 나눌 수 있는 삶
    원글님과 친구분 우정..영원하세요

  • 8. 저도
    '09.2.6 10:39 PM (219.249.xxx.44)

    그런 친구 한 명 있어요 ~~ 린 님 글 읽으니 제 친구가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우정 이어나가시길 바래요 ^^

  • 9. ^^
    '09.2.6 10:51 PM (210.222.xxx.41)

    두분은 복을 가진 양반들~
    복을 받을 양반들~~
    나중에 제 딸아이도 진심을 나눌수 있는 친구가 생겼음 싶습니다.

  • 10. 정말
    '09.2.6 11:03 PM (91.125.xxx.205)

    너무나 보기좋은 우정이네요.^^
    정말 부럽습니다. 인색한 사람해서 뒤에 혹시 반전이 있나?하면서 읽었는 데
    자신에게 인색하면서 남에게 베풀수 있는 사람이라..
    정말 멋진 친구를 두셨어요. 물론 이글을 쓰신 린님도 아마 같은 과가 아닐까?하고
    생각해봅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잘 읽었습니다.~

  • 11. 역시 옛말틀린거없네
    '09.2.6 11:21 PM (121.181.xxx.123)

    유유상종이라 하고 끼리끼리논다라고 하죠..
    요즘은 안좋은 친구들끼리 몰려다닐때 이런 표현 많이 사용해서
    살짝 안좋은 어감도 있지만 ..

    린님
    저런 친구를 두시것 보니 린님도 친구못지않게 좋은분이란게 느껴지네요..
    좋은 사람옆엔 좋은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요~~
    두분 보기 좋고 부럽습니다

  • 12. ㅠㅠ
    '09.2.7 12:57 AM (58.229.xxx.130)

    원글님 친구분 제 친구와 너무 닮았어요.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겐 친형제 이상으로 베풀면서도
    정작 자신에겐 너무나 인색한 친구.. 친구지만 늘 존경심이 든답니다.
    이 늦은밤 원글님 글 읽으니까 멀리 있는 친구가 너무 보고싶어 눈물이 납니다.
    두분 우정 영원토록 이어나가시길 바래요.

  • 13. ....
    '09.2.7 1:16 AM (124.61.xxx.29)

    두 분 다 서로 챙기시는 모습 보니까 맘이 다 짠하네요^^
    오래도록 좋은 우정 유지하면서 지내시길 바랍니다.

  • 14. 칸나
    '09.2.7 4:03 AM (121.174.xxx.197)

    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무척 초라해집니다

  • 15. 좋은 사람
    '09.2.7 12:40 PM (218.39.xxx.53)

    친구로 두셔서 부럽습니다.^^

  • 16. 감동
    '09.2.7 4:23 PM (119.67.xxx.139)

    서로가 챙겨 주시는 모습에 감동하고 갑니다..
    눈시울까지 흐려지네요..

  • 17. 오 헨리의
    '09.2.7 4:25 PM (61.38.xxx.69)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아름다운 얘기네요.
    오랜만에 생각난 얘깁니다.
    두 분 건강하게 오래 우정 나누세요.

  • 18. 버블
    '09.2.7 8:51 PM (119.71.xxx.17)

    아유!! 정말 부롭습니다.. 친구분도 원글님두... 어쩜 천사같은 마음씨를 가지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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