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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석달 전 헤어진 당신에게..'이혼을 생각하시는분들께

조아라 조회수 : 1,222
작성일 : 2007-10-09 08:11:06
  

글을 읽으면서 너무 슬퍼서 울었어요.지금 혹시 이혼을 생각하신다면 읽어보세요
..............................................................................................................................................................
긴 편지...석달 전 헤어진 당신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설사 그게 그 순간 진실이었더라도



당 신이 이 편지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의 편에 이 편지를 들려 당신에게 보낼 용기는 없고,
그렇다고 당신에게 전화를 해 편지를 보냈으니 찾아보라고 일러주는 낯 간지러운 짓도 못할 것 같으니, 아마도 당신은 내가 봄날 저녁 당신에게 보낸 편지 한 통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생을 지나칠 확률이 훨씬 높겠지요.

그래도 오늘 오랜만에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이건 아마도 당신과 헤어진 이후 오랫동안 웅크려 있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당신에게 말을 걸며 정작 들여다보는 건 나 자신이 될 것
같네요.
어쩌면 아주 길지도 모를 이 편지. 당신, 인내를 갖고 읽어 주실는지요?

나는 지금 선운사에 내려 와 있습니다.
얼마전 술을 한 잔 하고선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온 후배가 내게 그러더군요.

한 자락 놓고 살라고, 봄이니까 이제 그래도 되지 않겠느냐고.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힌 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선운사에 동백을 보러 가지
않겠냐는 그 이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다 그러마 했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떠난다는 것을
차마 엄두내지 못하고 있던 터라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워낙에 남의 맘
헤아려 어루만져 주는데 한 가닥 하는 친구인지라 그저 믿고 따라내려 왔지요.

선운사 아래 새로 문을 연 유스호스텔에 짐을 푼 게 어제밤. 오늘은 종일을 선운사
에서 보냈지요.
선운사 뒤란에 화들짝 놀란 얼굴로 핀 동백이며, 대웅전 앞마당에 지고 있는
수선화를 들여다보다가 참당암, 도솔암 지나 낙조대에 올랐습니다. 거기엔 한순간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이곤 바다로 몸을 던져 숨을 거두는 붉은 해가 있더군요.

금새 어두워진 산길을 걸어 다시 사람의 마을로 내려온 우린 바지락 파전을 안주
삼은 복분자주 한 잔에 얼굴이 불콰해져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어제밤처럼
오늘도 우린 각자가 배낭 속에 넣어온 책을 꺼내어 읽고 있었습니다. 그이는
최명희의 혼불 세권째 권, 나는 하루키의 단편집이로군요.

열린 창 너머로는 하현달이 산허리에 몸을 묻고 있습니다. 밤은 이미 한참
깊었구요.
책장과 책장 사이 잠깐씩은 지금도 한창일 선운사 뒤란의 동백꽃 몸 푸는 소리에
귀를 열어 놓고 있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가슴이 먹먹해져서 펜을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조금 풀어졌을 때, 그래 봄이니까, 당신에게 한 자락 놓아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어 스스로를 달래며 당신을 생각해 봅니다.

당신과 헤어진 지 이제 석 달이 되어 갑니다.
지난 석 달간 내가 힘들어서 혼자서 울기도 많이 했다는 걸 당신은 알는지요?
당신이 보기엔 내가 씩씩하게 견뎌내는 걸로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원해서, 당신을 설득해서 헤어진 건 나였는데,
상처입고 쓰러진 것도 나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또 그저 쓸쓸하게 웃기만
할건지요?

내 나이 스무 살, 당신 나이 스물 하나이던 때.
당신을 교정에서 만나, 함께 보낸 세월이 이제 꼭 십 년을 넘어 섰습니다.
그 사이 당신은 군대를 갔고, 나는 짧은 유학도 다녀왔고, 그리고 우린 가정을
꾸리기도 해서 1년 8개월 남짓 남은 생을 함께 갈 꿈을 꾸기도 했지요.

우리 둘이 시간과 공간을 나누어 쓴 그 세월에 관해, 당신에게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언제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나는, 살면서 중요한 것이라곤 나 자신밖에 없던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살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의 결론, 그건 흉폭하고 거친 나 자신과의 소름끼치는 대면이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당신을 우위에 놓고 지내보지 못한 그 시간들.
한 번도 당신을 위해 나를 희생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던 시간.
사소한 내 삶의 습관조차 바꾸어 내지 못했으면서 당신에게 무리한 변화를 요구
했던 시간.

언제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듯한 이물감이 느껴졌던 세월은 결코
당신의 부족함이거나 당신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저 내가 감당해내지 못했을 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 건 이렇게 같은 모양의 집에서, 비슷한 꿈을 꾸면서,
아이를 낳고, 아파트 평수를 늘려가며, 가족들과 티격태격하며 소진하다가
세상을 뜨는 것이라는 걸...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발을 내민 이상, 그 모든 서걱거림과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자기만의 외로움을 다지고,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만이 내게 남겨진
일이라는 걸 인정하기가 두려웠던 거지요.

반복되는 일상에 숨이 막혀 오고, 산 채로 박제가 되어가는 듯한 기분.
내가 받아들여야만 하는, 한국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덕목들의
부담스러움.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는 한줌 남은 내 꿈과 욕망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걸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게 무서웠습니다.
더 늦기 전에 당신에게 당신이 꿈꾸던 가정을 다시 찾을 기회를 돌려주고 싶었고,
나 역시 내가 원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겉도는 우리의 관계를, 더 이상의 긴장과 떨림이 없는 건조한 일상을 포기하지
못하고 묵묵히 견뎌내는 당신을 보는 게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애써 당신을 밀어내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당신과 헤어진다는 얘기를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속물적인 관심, 그 누구도 나의 삶을 책임져 주지 않을 거면서 무책임한
비수를 내게 겨눌 사람들이 두려웠으니까요.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내게 그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킬 만한 한 가지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다면 그렇지 않았겠지요.
남편이 때리니? 바람을 피웠니? 시댁식구들이 못 살게 구니?
사람들이 이혼이라는 걸 대면할 때 들이미는 이런 '상식적'인 이유들이 내게는
하나도 없었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가부장적 권위와 행동이라곤 조금도 없었던, 그야말로 대한민국
남자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당신의 신념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살아온 보기 드문
남자라는 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들을 설득할 수
있었겠어요?

'이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요.'
'난 그저 자유로운 영혼으로 이 세상에 머물다 가고 싶어요'
'난 결혼생활을 감당할 만한 품성의 소유자가 아니예요'
이런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는데 그걸로 누가 나를 이해할 수 있었을
까요?
나를 가장 잘 아는 당신조차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는데...

당신과 헤어진 이후 나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당신 아시나요?
당신만 밀어내고 나면 그토록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주부와
며느리와 아내라는 내가 결코 해 내지 못할 것 같은 역할만 벗어난다면,
자유롭고 안정된 상태에서 내가 꿈꾸었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극도의 무력감과 스스로에 대한 불신에 휩싸여 기계처럼 회사와 집만을
반복적으로 왕복했을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혼자서 숨죽여 울고 있었더랬습니다.

늦은 밤에 깨어 혼자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는 일 따위를 그렇게도 좋아하던
내가 세수조차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다음날 출근시간까지 열다섯시간을
내리 잠에 빠져 있는 일이 한 주에 한 두 번은 일어나곤 했습니다. 아니면
잠들지 못하고 좁은 집안을 서성거리며 새벽을 맞아야 했지요. 보리차조차
끓이지 못해 생수를 사다먹는 날들이 이어졌고, 그렇게도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내가 주말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한 발자국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일들이 종종 있곤 했지요.

내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아는 이유로 부담스러웠고, 모르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이유로 불편했지요. 그래도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서, 혹은 사회생활 하는
이로서의 최소한의 도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러 나갈 땐, 늘 예상되는
질문과 답변들을 연습하곤 했습니다.

"결혼 하셨어요?"라고 묻는다면 "현재는... 미혼인데요." 이렇게 대답해야지.
이쯤이면 눈치 빠른 이들은 더 이상 "남편은 뭘 하는 분이세요?"나 "아이는
있으세요?"같은 지극히 사적인 질문들을 그 무게를 생각하지도 않은 채 물어
오지는 않겠지...
"형은 잘 지내요?"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묻는다면 담담하게 "우리 헤어진 거
아직
몰랐어?"라고 대답해야지...

하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는 지난 2년간 해 오던 답변들을 반복했을 뿐이었습니다.
"예. 결혼했어요."
당신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는 "잘 지내요."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곤
했지요.
그게 얼마나 거북스러운 과정들이었는지, 솔직하지 못한 내 자신이 얼마나
싫었는지...

언젠가 버스를 타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데 버스 안에서 이승환의 노래가
나오더군요.
'...너의 안부를 묻는 사람들. 나를 어렵게 만드는 얘기들...'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참느라 입술을 깨문 채 서둘러 버스를 내린 저는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울었지요.

유행가 가사에도 눈물이 솟구쳐 오르고, 누군가의 스치는 말 한 마디도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러오길 몇 차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는 상처를 계속해서 드러내야 하는 일의 막막함.
혹, 당신도 견뎌내고 있는 일상인가요?

세상이 이젠 나를 설명하는 다른 모든 특징들을 잊은 채, '이혼녀'라는 이름
하나로만 나를 구분할 것 같았고, 당신과의 관계에서 실패한 것이 세상 모든
관계에서 실패한 것처럼 여겨져 자꾸 움츠러들곤 했지요.

바보같이 이러지 말아야지. 왜 이러는 거야? 너 이 정도도 각오하지 못했던
거야?
이렇게 약한 게 네 모습이니. 강한 척 큰소리 칠 때는 언제고. 네가 선택해서
결정한 일 누굴 원망하는 거야. 정신차려. 세상이 끝난 거 아니잖아. 너 혼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마.
왜 솔직하게 세상과 대면하지 못하는 거야?.

스스로를 달래고, 화를 내고, 설득하려 해봐도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 내 옹졸하고 이기적인 행동들로 가까운 이들과 멀어지기도 했고,
나 혼자 울다가 쓰러져 잠드는 날들이 계속됐지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혹은 이혼했다면,
그건 인간성 전체가 의심당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될 수 있음을, 그래서 결혼이
라는 건 여성에게 기득권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생생한 경험으로 깨닫는 시간이
었습니다.

삶은 더 이상 내게 안전지대가 아니었지요. 평화도 존재하지 않았구요.
혼자 식은 밥에 국을 말아먹을 때의 그 목이 메여오는 서러움이라니...

당신, 내가 못 견뎌했던 것 중의 하나가 당신이 뉴스며 스포츠경기 따위를
보느라 잠깐씩 틀곤 했던 TV의 소리였던 거 기억나지요. 우리 둘 다 유난히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좋아해 집엔 늘 사람들이 북적대곤 했는데 난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소리는 잘 견뎌냈으면서도, 어쩌다 그들이 TV라도
틀어놓을 때면 그 소리가 너무 괴로워 얼른 돌아가 주기를 기다리곤 했을
정도였지요.

이제 나는 가끔씩 보지도 않는 TV를 틀어놓고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개곤
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독감이 밀려들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아 두려워질 때면, 우습게도 TV의 그 시끄러운 소음이
내게 위안이 되기도 하더군요.

채 맺지 못한 이 편지를 쓰는 사이에 서른 밤의 시간이 또 흘렀습니다.
어느새 화려하던 봄꽃들은 지고 거리엔 온통 싱싱하게 빛나는 초록입니다.
저 여린 초록의 잎들이 빠르게 탁해져가고 하루 해가 길어지고 그러다 보면
곧 여름이 오겠지요.

아직도 가끔씩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당신이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다가 '왔어' 하며 몸을 일으킬 것만 같아요.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내 책상 앞엔 아주 오랫동안 지구의 주인이
었다가 육천오백만년 전 갑자기 사라져버린 공룡의 척추뼈가 놓여져 있습니다.
내가 지질학과 선생님께 그걸 선물받고 당신에게 자랑하던 일이 생각나나요?

가끔씩 그 척추뼈를 오랫동안 들여다보곤 합니다.
가만히 그걸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몇 억년의 세월을 건너 정지해버린 시간을
깨우며 잠들어있던 공룡이 깨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럴 땐 스스로에게 중얼거리기도 하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 이건 아주 긴 꿈일지도 몰라. 자고 나면 꿈이 깰 거고,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야. 잠시 동안만 웅크리고 있는 것일 뿐, 넌 곧 깨어나 저벅
저벅 발소리를 내며 다시 지구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을 거야... 라고.

얼마전, 이사한 이후 그냥 방치해 두었던 짐을 정리하다가 대학시절 받았던 편지와
쪽지들을 발견했습니다. 수 백통의 편지와 카드, 농활이며 모꼬지를 갈 때면 늘
한 줄씩 돌려쓰던 쪽지, 그리고 일기장들... 그 속에 물론 당신의 편지와 사진들도
있더군요.

그 날 밤 내내 그 편지들을 읽으며 얼마나 웃고 울었던지요?
나에게도 이렇게 뜨겁게 누군가를 사랑하던 순수한 마음이 머물렀던 시간이
있었다니...
그 때 나는 얼마나 희망에 들떠 있었으며, 하루하루를 치열히 살아내려고 기를
썼으며, 가까이 머무는 이들에게 잘하자 순간 순간 다짐하며, 계획하며 살아가던
날들이었는지...
그 때 또 당신은 얼마나 큰 내 삶의 의미이자 길이었는지...

지난 번 부모님께 다녀왔던 일이 생각납니다.
당신과 헤어진 이후 엄마와 난 행여 서로의 상처를 건드릴까 언제나 씩씩하고
쾌활한 모습만을 서로에게 보여줘 왔지요. 그 날 밤 동생들과 비디오를 보다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데 안방 문 너머로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던 엄마는 울면서 그러시더군요.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라고.

가슴이 미어터진다는 말...
당신은 온 몸으로 느껴본 적 있나요?
설혹 이혼으로 인해 실패했을지라도 그건 내 인생일 뿐인데, 왜 엄마가 당신의
인생이 실패한 거라고 받아들이며 한 밤중 숨죽이며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 건지...
이제 나는 아무리 잘 살아간다 해도 부모님 가슴에 도저히 뺄 수 없는 못 하나를
박고 사는 거구나 싶어 정말로 내 인생이 완전히 실패한 듯 느껴지더군요.

이렇게까지 주변의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상처 입히면서 내가 이루려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또 무엇이고요?
내게 남아 있는 꿈이 있기나 한 걸까요?
당신, 냉정하게 말 해 주세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당신이 알다시피 언제나 객관적 환경보다 주관적 의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
왔던 전, 삶은 뜻하는 대로 가는 거라고,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기
마련이라고 믿고 살아왔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언가를 얻지 못하는 건
그만큼의 노력이
부족하거나 간절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개인의 의지부족을 탓하곤
했지요.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삶이 언제나 뜻하는 대로 풀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인생의 길엔 예기치 않은 복병이 숨어 있다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걸.
하나를 얻기 위해선 다른 소중한 것 하나를 내어 줄 수도 있어야 함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하되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요.

서른 해를 살아오면서 섣불리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이해한다고 말해왔던 것.
용서를 구합니다. 설사 그것이 그 순간의 진실이었다 할지라도...

이제 어떤 상처와 아픔은 도저히 나누어지지 않을 수도 있음을,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가까이 머물러 주는 것뿐임을, 때로는 그 일이 최고의
위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슬픔에 압도당해, 나의 상처만이 가장 깊다고 생각해, 그 누구에게도
문 열지 않았던 지난 시간이었는데 그래도 내 곁에 남아 준 사람들이 있더군요.
나 이렇게 살면서 진 빚. 살아가다 보면 갚으며 살 날도 오겠지요.

당신에겐 지금 위안이 되는 이 있나요?
외롭고 지친 당신 곁에 누가 머무르며 상처를 더듬어주고 있나요?

당신과 함께 한 그 세월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겠습니다.
10년 동안 내 곁에 있었던 당신이란 존재.
내 삶에 주어졌던 최고의 축복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것 가슴에 담지 못할 정도로 크고 가득하다고.
우리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당신은 나를 부끄럽게 한 내 삶의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거.
당신의 생에 대한 낙관적 태도와 사람에 대한 그 깊은 이해의 폭을 질투했지만
사실은 존경했다는 거.

당신이 내게 해 준 그 모든 것들과 격려의 말, 나를 위로해 주던, 혹은 따스하게
비판해주던 모든 기억들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젠 너무 늦었지요?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우린 이미 멀리 나와 버렸으니까요.

가끔씩 잠 못들고 뒤척이는 밤에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해요.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신이 있다면 내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이런 삶을 선택할 자유의지를 주신 걸까.
이 길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끝까지 간 후엔 무엇을 가지게 될까.
이제 나에게 남겨진 건 그저 계속해서 걸어가는 일 밖엔 없는 걸까.

그렇지만 내가 감당하지 못할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그건 또 다른 비겁한, 끝이 명확한
타협이니까요.
그저 우리가 헤어지며 서로에게 약속했듯이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따스한
눈으로 지켜보며 서로에게 힘과 용기가 되는 그런 친구로 남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한 때 당신 가장 가까이 머물렀던 사람으로서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아직 나를 믿고 내 곁에 머물러주는 가까운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머뭇거리지 않으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니 이 편지는 그 길고도 숨막혔던 시간 속에서 빠져나와 세상 속으로
나가고자
하는 내 첫 발디딤인 셈이지요.
나, 이제 그만 울겠다고.
용감하고 정직하게 세상과 화해하고 대면하겠다는...

당신, 지켜봐 주시겠지요?
당신의 안녕을 빕니다.



IP : 222.106.xxx.66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잘 읽었어요
    '07.10.9 10:25 AM (211.224.xxx.130)

    내가 쓴 글 같다는 착각이...
    철 없던 시절 사랑하는 남편과는 별개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자유롭던 한 영혼을 얼마나
    속박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괴로운적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아이들을 낳고
    기르면서 가슴속을 들끓게 하던 자유에 대한 갈망 들은 잠잠해지고 ...
    가끔씩 이런 글을 읽을 때 마다 맞아 나도 그런시절이 있었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2. 그래요
    '07.10.9 10:58 AM (211.106.xxx.237)

    전 지금 며느리라는 역활만 벗어나면 정말 신나게(?) 아내역활과 애들 엄마의 역활을 할수 있을꺼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그렇지만 금새 현실이 떠올라 실소가 올라옵니다.
    나이가 몇인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말도 안되는 상상이나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
    지금 7년차 살면서 전 가끔 이혼은 해결책이 아니라 하나의 도피처이자 피난처 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되세기며 삽니다. 자기 최면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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