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제 홈에 써뒀던 글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슬금슬금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대학시절에, 전문 산악부는 아니고 등산을 주로 하는 모임에 들었었는데, 장기 산행의 경우 내 담당은 취사였다. 식단을 짜고, 식재료를 구입하고, 요리하는 것까지. 아 참, 그러고 보니 식재료의 운반까지 맡았었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 길에는 배낭 무게가 30Kg 정도여서 힘이 들었지만 오히려 나는 그것을 즐겼다. 물론 하산길에는 배낭이 텅 비었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통조림 음식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열 몇끼를 메뉴의 중복 없이 다양하게 바꿔가며 먹였는데(예를 들면 지리산에서 잡채밥이나 수재비, 그리고 포도주로 만든 빵을 먹었으니까), 뭐랄까, 일부러 유난을 좀 떨었다고나 할까 ... 아무튼 나는 장기 산행 때마다 조편성 선택 1순위였다. 나는 요리만 했고 설거지는 식품공학과 녀석들에게 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부터 요리에 관심이 있었다고 보기는 좀 그렇고...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외아들처럼 자라면서 어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내 호기심에서였을까. 나물을 무치는 어머니를 보면서 "엄마 마늘 넣지 마 맵잖아?" 하면 어머니는 마늘을 넣지 않은 나물과 마늘 간 것을 넣고 주물럭거린 나물을 번갈아 맛보여 주면서 그 차이를 알게 하셨다. 어머니는 눈썰미가 있으셨던지, 어디 잔치에 가서 무슨 음식을 보면 그것을 그대로 만들어 주셨다. 그리고 일년에 한두번은 두부며 순대 등을 만들어 먹기도 했으니까.
아, 맞다, 그래, 어머니는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셨어. 우리집은 만두를 만들 때도 속이 한 다라였고, 세 식구 살림이 한달에 쌀 여덟말에 겨울 김장이 150포기였으니까. 아마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함께 만들어 먹는 것을 좋아하셨던 어머니의 성향이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첫번째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가 시장에 맛들인 것이 중학교 이삼학년 때다. 아마도 시장 가운데 있는 기계우동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기억하는데, 이십원인가 삼십원하던 그 우동이 무척 맛이 있었고, 양을 무지막지하게 많이 줬기 때문에 자주 갔었다. 시장을 오가면서 이것 저것 구경하는 재미를 일찌감치 느낀 나는, 후에 커서도, 여행을 가면 근처의 재래시장이나 오일장을 찾아다녔다. 아무튼, 여자들이 속상할때 장바구니 들고 시장가는 마음을 일찌감치 동감할 수 있었던 것이 나중에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는 손재간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듣는데, 요리에 맛을 들여갈 즈음에 내가 한가지 느낀 것은, 요리는 손재간만으로 안된다는 것이다. 호박죽에 마늘을 넣어서 풀어지게 만들고, 장어에 고추장을 발라서 구워 먹고서는, 나중에야 그것이 고추장이 아니고 마늘과 생강, 고추가루 등이 어우러진 양념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것은 어머니와 시장의 아주머니들에게 물어가면서 이렇게 끓여도 보고 저렇게 구워도 보면서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 느낀 점은, 요리는 참 신비하다는 것이다. 재료들의 독특한 맛들이 어우러져 새로운 맛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예술이 아닐 수 없었다. 신비함은 강한 호기심과 끝없는 도전을 동반한다. 나는 지금도 어디 가서 맛있는 요리를 맛보면, 먼저 재료와 조리법을 그려보고, 풀리지 않는 것은 요리를 만든 사람에게 물어본다. 요리 자체가 갖고 있는 무궁무진한 신비함, 그리고 그것에 잘 끌려들어가는 내 호기심. 아마도 내 요리 취미의 배경에는 그런 요소가 작용해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요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른다섯을 넘어서였다. 나는 하드보일드 타입의 추리 소설(특히 첩보물)을 좋아하는 편인데, 어느날 헌책방에서 "백색 국적의 스파이"라는 소설을 구하게 됐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지독한(?) 평화주의자인데, 공교롭게도 여러나라의 스파이 조직에 얽히게 된다. 그 주인공은 요리하기를 좋아하는(소설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초 프로 수준) 유머와 기지의 인간이었는데,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요리솜씨를 빌어 곤경을 빠져나갔다.
내가 모르는 요리의 조리법이 나오는 스파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감탄에 감탄을 했고, 소설을 서너번 반복해서 읽은 후에야, "요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가정적인 사람, 평화주의자" 라는 서양인들의 취미관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에 대한 동경으로 인해, 그 이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말하게 됐다. 내 취미는 요리라고.
사실 내 또래 남자들 머릿속에는, 남자가 "요리가 취미"라고 말한다는 것이 쑥스럽다 못해 조금은 창피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그 창피함의 어떤 부분은 남성우월주의의 잔재이기도 할 것이고, 어느 부분에서는 요리, 가정적, 부드러움 이런 개념은 민주, 자유, 권리, 투쟁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외면해야 했던 70년대의 암울함에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내가 요리를 취미라고 말하는 데는 상당한 기간이 걸렸고 작은 용기마저 필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 세대가 젖어 있던 사고방식이었다.
요리에 대해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갈 무렵, 나는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라는 곳과 인연하게 됐다. 낮은 임금의 연수생이란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쳐 나온 동남아시아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있는 그곳. 막연히 찾아갔던 나는 할 일을 못찾고 어정거리다가, 두어달 후 드디어 할 일을 찾았다.
그 후로는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만은 식사를 대충 때우는 일이 없어졌다. 네팔 사람에게서는 네팔 요리를 배웠고, 식사 후에는 우리나라 강원도의 민요와 흡사한 네팔의 민요를 답으로 들었다. 우리와 앙숙이었던 출입국 관리소 경찰이 사 준 탕수육이 생각난다는 명숙이의 농담에, 본떼를 보여주겠다며 돼지고기 네근으로, 너무 많아서 (접시에 못 놓고) 아예 상 위에 탕수육 산을 쌓아 원을 풀어준 기억은 지금 생각해봐도 통쾌하다. 명동성당으로 농성을 나갈 때에는 컵라면으로 급조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조금 기다리게 해서 달걀과 떡을 얹어 먹여 보냈다.
아름다운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는 기쁨, 그것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 ... 이것은 요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없는 즐거움이다.
며칠 전, 캐나다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다니고 있는 친구(국민학교 동창 여자친구인데 계와 남편은 둘 다 과 후배이고 생각이 통하는 사람들이다)의 애가 들어왔다. 부유하지 않은 살림에, 운 좋게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큰 부담없이 다니고 있지만, 용돈이 풍족하지 못해 한국음식을 사먹을 수가 없으니 그 고생이 오죽했을까.
삐쩍 말라서 김치찌게를 게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궁리를 했다. 김치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줘봤자 냄새 때문에 그 집에 두고 먹을 수도 없을테고, 그렇다면 고추장이다. 나는 어렸을 적 먹어만 봤지 한번도 해보지 않은 (소고기)고추장볶음을 떠올렸고,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만드는 법을 물었다. 예상대로 소고기를 다져서 볶고, 이것을 고추장에 넣어 다시 볶는데 눌지 말라고 잘 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기가 많으면 변질되기 때문에 수분을 줄이기 위해서 볶아주는 것이다.
그녀석이 9월5일에 나간다니까, 8월 말쯤에는 중부시장에 가서 뱅어포를 고추장에 조미한 것이 있나 알아보고, 적당한 것이 없으면 직접 만들 예정이다. 내 말을 들은 그녀석, 얼마나 좋아하던지... 그리고 음식에는 재주가 무지렁이인 내 친구도 마음을 놓으면서 씩 웃고 ...
날이 갈수록 나는 하늘이 내려준 재주에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재주를 늘여갈 궁리를 하고 있다. 우선은 친구네 애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과자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볼까 한다. 지금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끝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면, 중단했던 가야금 산조 과정과 함께 제과제빵학원을 다니려고 하는데 ... 에구 그 때면 애들이 다 자랄텐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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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로 향한 관심 요인에 대한 근원적 고찰
무우꽃 조회수 : 915
작성일 : 2004-01-02 14:32:45
IP : 61.111.xxx.218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우렁각시
'04.1.3 3:22 AM (65.93.xxx.79)독일에서 귀화한 이 한우씨 아시는지...
그 분도 어릴때 요리 잘 하는 스파이가 나오는 책을 읽고
요리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던데....묘한 우연이네요.
혹 같은 책 아닐까요?2. 무우꽃
'04.1.3 4:56 PM (61.111.xxx.218)그래요? 허 거 참. 제가 아는 바로는 그런 책은 그 거 한권입니다. 혹시 이한우씨 메일이라도 알게 되면 하이파이브 한번 하자고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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