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전철 창 밖을 계속 내다본다.
이제 곧 전철이 지하로 내려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일부러 스포일러를 찾아서 읽고 시작한다. 결말을 알고 나면,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의 매 순간을 아끼며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운을 앞두고 묘사되는 주인공의 일상 행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배우 얼굴에 퍼지는 웃음, 펼쳐진 잔잔한 풍경 그리고 흐르는 음악까지. 최대치로 집약된 그 노곤한 행복을 그 느낌 그대로 봐주고 싶다. 기왕에 닥칠 불행 앞에서 벗어나길 포기한 인간의 허탈한 애틋함으로 구석구석 세밀하게 말이다.
힘들게 만나서 해내고 말았던 결혼이 이리될 줄 알았더라면, 나 역시 전남편과 매 순간을 즐기며 달달하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아니다..하며 저절로 머리가 내 저어졌다.
일하는 곳은 워싱턴 디씨의 오래된 구역에 있었다. 모든 것은 낡았으나, 전철역이 근처에 있었고, 잘 관리되고 정돈된 곳이다. 그런 만큼 렌트비가 비싸서, 사무실로 들어오는 수입의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 변호사가 이 사무실을 유지하는 데에는, 장기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고 싶은 그에게 여러모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곳을 기반으로 모든 일들을 조금씩 했고, 그 조금씩 한 모든 것은 그의 이력에 한 줄이 되어 스펙으로 채워졌다. 나는 그가 조금씩 한 그 모든 일의 나머지 부분, 즉 여집합을 담당하는 변호사로 그를 보조한다. 자질구레 일이 많으나, 상대적으로 쉽고, 티가 안나는 것들은 모두 내 몫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생각과 달리 무한하지 않았다. 격한 고비들을 하나 둘 넘다 보면, 닥쳤으니 일단 해결해 내고 본다. 그러나, 기계처럼 반응하며, 해낼수록 향상되는 처리능력에 비해서, 마음은 절대 나날이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나는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감정들을 써 버린 거 같았다. 설렘도, 마음 졸임도, 기쁨도 그리고 무엇보다 슬픔도.
평생 동안 사람이 사용해야 할 희로애락의 양도 주어진 시간처럼 유한한 걸, 겁없이 많이도 써 버리고나서야 알았다. 새로 적립된 여유자금 하나 없이, 마이너스에, 감정의 신용불량의 나락으로 던져 진 사람은, 그 방전된 상태로 나머지 생을 꾸역꾸역 건조하게 메꾸어 가야만 한다..
그래서, 꿈 많고 부지런한 이민 1.5세인 정 변호사와의 동업은 내게도 속 편한 일이었다. 나는 감정을 그리 많이 소모하지 않고, 그의 공사다망한 일상 뒤편에 앉아 조용히 일만 하면 되니까. 일을 하다가, 창 밖의 나무나 가끔씩 쳐다보면 되니까.
사무실 문을 열려 손을 뻗자, 정 변호사가 반대편에서 문을 먼저 활짝 열며 나를 반긴다. 기다렸다며, 눈을 반짝이는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 변호사, 우리 정변이 역변이 되는 순간이다.
이럴 때마다 불길했었다.
#인스타그램에 쓰는 소설
#아직 제목도 없음
#피드백 환영
#뜬금없어도 심심하면 읽어보기 요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