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알아요. 테티스의 결혼식에서 불화의 여신이 사과를 던져서 시작된 이야기, 이렇게 알고 있는 우리들의
선입관을 깨뜨리고 일리아스는 분노를 노래하소서, 혹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하소서 무사여신이여
이런 식으로 시작하더군요. 순서가 바뀌어도 되는 것은 희랍어의 어순은 자유롭게 변형이 가능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물론 저는 희랍어를 전혀 읽을 수 없으니 그렇다는 설명에 의존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요.
일리아스 읽기를 마치고 토요일 아침 느긋하게 루벤스가 그린 신화내용을 찾아서 보고 있던 중 걸려온 전화
2주에 한 번씩 멀리 전주에서 서울까지 독일어 공부를 하러 오는 선배가 그 곳에서 라틴어 혹은 희랍어중 택해서
공부하려고 하는데 혹시 제가 하고 싶은 의사가 있다면 미리 만나서 시간을 내서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그것까지는 무리라고 미리 마음에 선을 그어 놓고 있었지만 다시 흔들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한동안 그리스 로마속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전화로 그림 보는 흐름이 끊어져서 루벤스의 다른 그림 파리스의 심판을 못 찾고 이 그림으로 대신합니다.
어제 밤 모임에서 파리스가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나는 헬레네가 그렇다고 아킬레우스는 어떤 사람인가
아가멤논은 리더로서 어떤 인물로 그려진 것 같은가, 헤라 여신이 제우스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좀 더 묘사가
나오길 기대했는데 모자라서 아쉬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아들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우려해서 다른 곳으로 보냈는데 그 곳에서 여장을
하고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이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의 참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리스 진영에서
오딧세우스를 보내서 아킬레우스를 찾아내는 장면입니다. 물론 일리아스에는 이런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우리가 아는 호메로스의 두 이야기이외에도 트로이아 서사, 테바이 서사를 둘러싼 수 없이 많은 판본이 존재했다고
하네요. 그렇게 전승된 이야기중에서 호메로스가 취사선택을 한 것이 바로 이 두 작품이지만 과연 호메로스가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인가, 사실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두 이야기의 진짜 저자인가 이런 문제를 놓고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아서 호메로스 문제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한가지 사실은 서사시로 두 작품인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들에게 책을 펼치기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호메로스가 그린 그리스 진영과 트로이에 대한 묘사에서 너무 친그리스 적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고
오히려 트로이의 사람들에게 더 인간적인 위엄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야기가 마음을
흔들어놓았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함께 모여 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식의 확장을 꾀한다기 보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은 이 책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를 바라보는 창 역할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지요.
구전으로 전승된 이야기에서는 헥토르가 그렇게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오히려 파리스를
더 크게 부각했던 반면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이렇게 두 인물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호메로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호메로스는 마술적인 세계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 요소를 작품에서 많이 제거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요?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다보니 그 전에 귀동냥으로 알고 있던 것들과 다른 이야기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전장에서의 수없이 많은 죽음에 대한 묘사, 이름없는 사람들의 죽음에서도 그 개인의 특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묘사한 것은 정말 압권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에 이어 해부학적 지식이 벌써 그 당시에도 있었나,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세부묘사가 가능했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디오메데스의 황금무장 교환의 의미는 무엇일까
서로 의견교환도 있었습니다 .
제 경우 헥토르가 마지막에 아테네의 개입으로 기운을 받아서 아킬레우스와 대적하다가 그것이 아테네의
개입이었다는 것을안 순간의 현기증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세에서 리처드
3세가 말을 다오 하고 외치던 순간과 오버랩되면서 묘하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한 장의 스틸 사진으로 남게
되는 느낌이더라고요.
신들의 계보가 너무 복잡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한 번에 이 작품을 이렇게 허술하게 다 끝내도
되는 것인가 이런 식의 책읽기가 의미가 있을까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작품을
다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습니다. 인생의 한 시기에 만난 한 작품을 다른 시기에 다시 만나고
그 때 선뜻 손 내밀수 있는 가느다란 끈을 마련했다는 의미로 충분하고, 그 다음 앞으로 나서다보면 아 그 때
이해되지 않았던 장면이 바로 이런 의미였나, 다시 되돌아보면서 손을 뻗어서 그 책과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요?
그리스 비극과의 첫 만남은 대학원 1학기 고대 그리스 비극 강좌에서였습니다. 그 때는 이렇게 어둡고
파괴적인 세계가 이해되지 않았지요. 더구나 아트레우스 가문의 비극이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지요.,
이런 연극을 보러 극장에서 사람들은 새벽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내리 3편의 비극에 막간극으로 다른 작품까지
보면서 디오니소스 축제를 즐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과연 그들은 이 극에서 무엇을 느끼는 것일까 의심하던
시절이 생각나면서 학교와 멀어진 이후 문학과 가능하면 거리를 두고 살았던 세월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다시 그 시절과 접점이 생기는 묘한 현상과 직면하고 있기도 합니다.
기원전 12세기 동부 지중해는 말로 할 수 없는 무서운 시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시대였다고 하더군요.
그런 시대의 경험이 그들의 뼈에 각인되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이런 세계관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제서야 그리스 신화의 계보가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인간 조건의
큰 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요. 그렇게 저는 다시 고대 그리스 세계속으로 넘나들면서 2013년 한 계절을 보내게
되겠지요.
나이가 들면 칙칙한 이야기가 싫다고 그러니 밝고 화려하고 기분좋은 것들과만 사귀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세계가 가능할까요?
동시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인생, 어느 것을 회피하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피해가는 것은 다만 상상에서만
가능한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끔찍하게 느끼지더라도 그 안의 구석까지 들어가보고 그리고 돌아나오기도
하면서 제대로 대면하는 것이 오히려 더 건강한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모임중에 흘러나온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미처 이야기로 발화되지 않은 각 사람들의 마음속에 고여 있었던 이야기들이
더 많겠지요? 시간이 흐르면 고여 있던 이야기들이 조금 더 수월하게 길을 찾아서 나와, 함께 공유하는 날을
상상해봅니다. 쉽지 않더라도 그렇게 길을 찾는 말들이 보석이지 않을까, 그런 날들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여물어서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툭 터져나오는 날, 상상만으로도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