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년 10월 30일(금요일) 17시 30분 넘어서..

양귀자 / 모순
해질녘에는 절대 낯선 길에서 헤매면 안 돼.
그러다 하늘 저편부터 푸른색으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프거든....
(제가 지독하게 좋아하는 귀절입니다..)

박태선(초아) / 迷路
누가 부르는 듯
불현듯
길을 나서고 싶을 때가 있다.
목적지도 없이 그냥
가다가 문득 내리고 싶은 곳
처음 간 그 길이
눈에 익을 때가 있다.
그리움과
추억이 묻어 있을 것 같은
가물거리는 기억의 파편 따라
뿌연 안개 속에서 헤맨다.
골목을 돌아서면
있을 것 같은
낯익은 풍경
언제일까?
내 기억의 끝은
여기서 끝나고
난 끝도 없는 그 길을 자꾸만 간다..

함민복 / 선천성 그리움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은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청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박남준 / 저녁 무렵에 오는 첼로
그렇게 저녁이 온다
이상한 푸른빛들이 밀려오는 그 무렵
나무들의 푸른빛은 극에 이르기 시작한다
바로 어둠이 오기 전
너무나도 아득해서 가까운
혹은 먼 겹겹의 산 능선
그 산빛과도 같은 우울한 블루
이제 푸른빛은 더 이상 위안이 아니다
그 저녁 무렵이면 나무들의 숲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가지 들로 부터 울려 나오는 노래가 있다
귀 기울이면 오랜 나무들의 고요한 것들 속에는
텅 비어 울리는 소리가 있다
그때마다 엄습하며 내 무릎을 꺾는 흑백의 시간
이것이 회한이 라는 것인지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흔들리는 것인가
이 완강한 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길들여졌으므로 그의 상처가 나의 무덤이 되었다
검은 나무에 다가갔다
첼로의 가장 낮고 무거운 현이 가슴을 베었다
텅 비어 있었다 이 상처가 깊다
잠들지 못하는 검은 나무의 숲에
저녁 무렵 같은 새벽이 다시 또 밀려오는데..
雲谷 강장원 /
밤새워 별이 지는 박명의 아침까지
흘러간 회한의 날 헤매어 지친 걸음
보고픔 염치없이 가슴에 불붙느니
임 향해 타는 불길로
미리내를 밝히리
저물어 하루 접는 반딧불 날리는 밤
역마살 내려놓고 팔 베고 누웠으니
댓잎을
스치는 바람
잠들 수가 없어라
가슴에 꽃이 되어 피어난 그리움은
깊고 푸른 밤하늘에 임 그린 별이 되어
고운 임 잠든 창가에
밤새도록 비추리
고단한 삶에 지친 당신이 잠든 자리
밤새워 별이 지는 박명의 아침까지
내 가슴
타는 불길로
따뜻하게 데우리
임영란 / 밤이 오면
밤이 오고
침묵의 첫 잔이 내밀어 지면
너를 빠트려야겠지
무엇에 무엇을 위하여?
우리가 그토록 탐내던 순결한 말
그 홍수 속에,
너는 정신 차릴 수 없게 될꺼야
어둠 속에
말들이 덩어리져 구르는 동안
정신 차릴 수 없으니
나는 너를 쉽게 굴복 시킬 테지
이렇게 간단한 말을
그렇게나 오래 고민하다니
밤이 오고
침묵의 첫 잔이 내밀어 지면
말의 홍수에 휩쓸린 너를
구원해 주어야겠지
무엇에 무엇을 위하여?
아주 부드럽게
아주 은밀하게
네 비명 소리를 덮어 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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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란(아멜리에)씨는 조선블로거로 5년 넘게 友情을 지속..
찍사와 글재주가 비상합니다.. 초아님처럼 詩人이시기도 하고..
한 강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 버리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나는 밥을 먹었다
허수경 / 혼자 가는 먼 집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요즘 이상하게 허수경 시인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전개가 거칠은 듯 하면서 다 읽고 나면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신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