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2학기 들어서 조금씩 변화를 보이는 아들이
언젠가 제게 물어보더군요.
이모가 말한 향토 장학금 정말 줄까?
아마 이모는 한 번 말한 것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네가 이모의 동문이 되면 틀림없이 4년간 학비를 대줄꺼야
그런데 고려대학에 가면 학비를 대주지 않을려나
아들입에서 학교를 지명하여 그 학교에 가고 싶다거나
그 학교가 거리가 멀어서 과연 붙어도 잘 다닐 수 있을까
이런 식의 고민을 말한 것이 처음이라 기쁘고 놀랍고
그리고 신기하기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사실은 그 학교에
갈만큼 실력도 준비도 미비한 상태라서 그림의 떡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제겐 그런 변화자체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라서요)
지난 31일에 만난 자리에서 그 이야기가 다시 나오니
동생이 선뜻 대답을 하더군요.고려대라면 학비의 반을
주겠노라고.

신년 아침 다른 해보다는 훨씬 일찍 일어나서 떡국을 먹는
자리,누나와 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승태가 말을 합니다.
우리 학교 선생 (같은 학교라서 서로 아는 )이 그러는데
연고대와 서울대는 들어가는 것도 다르지만 나오면
대접이 천지차이라고 재수해서라도 서울대학에 가라고 하더라고
그러자 누나가 대답을 합니다.너는 내신이 나빠서 자격이
없다고,그런 말에 화를 내는 대신 동생이 그러면 재수하면
되지 그 때는 내신을 보지 않으니까 이렇게 대꾸하네요.
12월달의 아들과 1월이 막 시작된 시점의 아들이 같은 아이인가
적응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변해서 저는 어리둥절한 상황인데요
그래도 먼저 지나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조금은 물러서서
지켜볼 생각입니다.올 일년동안
기대와 실망,그리고 인내와 다시 샘솟는 기대와 다시 실망하고
그렇게 보내던 보람이의 고3시절이 생각나네요.

비행기표를 조정하여 하루 이틀 더 제주에 있으면서
성산일출봉에서의 해돋이도 보고 싶었지만
고3이 되는 아들과 첫 날 아침을 함께 하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 예정대로 온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여행가방을 풀고 있는 제게 그 아이가 말을
거네요.
엄마,입시끝나면 나도 여행에 함께 갈래

사춘기가 절정일 때는 여행을 함께 가자고 해도
여행함께 가지 않는 대신 경비를 나를 주면 어떤가
이런 식의 반응까지 보이던 것에 비하면 참 놀라운 변화에
갑자기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언젠가 그 아이가 크고 나면 지난 시절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날이 오겠지요?

오늘 독서실에서 점심을 먹으러 온 아이가 제게 말을 합니다.
엄마,학교에서 노트르담 드 빠리 봤는데 좋더라
그러면서 음악을 mp3에 넣는 겁니다.
너 중학교때 누나랑 셋이서 비싼 표사서 갔는데
너는 처음 조금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기억나니?

그 이후 음악회나 연주회에 함께 간 기억이 없습니다.
원하지 않는 일에 무리하게 데리고 다녀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본인도 완강하게 엄마 혼자 가거나
누나랑 가라고 고사했기 때문이지요.

오늘 2009년 첫 연주회에 가는 날입니다.
하우스 콘서트에서 김선욱의 피아노연주가 있어서요.
올 한해도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조금은 더 용감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제주도의 민박집에서 생일 전 날 밤 그 곳에 묵는 사람들이
열어준 생일파티에서 한 마디 하라고 들었을 때 제가 처음
한 이야기가 내년에는 좀 더 용감해지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예를 들면 매일매일 걷는 길이 달라서 머무는 숙소를
달리하면 더욱 효율적이란 것을 알면서도 매일 숙소를 바꾸는
번거로움이나 안정을 해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냥
한 곳에 묵는 일이나 혼자서 일 처리하는 것을 무서워해서
잘 아는 사람의 뒤에 숨어서 함께 묻어가려고 하는 것
새로운 일에 대해서 어떤 점은 상당히 용감하지만 다른 점은
겁을 잔뜩 먹고 앞으로 나갈 엄두를 못내는 것등
그런 것을 다 한데 뭉뚱거려서 용감해지고 싶다는 것이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고요,그 다음에는 몸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으로 하는 일에 적극성을 발휘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해를 다 마무리 하는 날,지난 해 겨울에 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서 내년에는 새로운 관심을 갖고
앞으로 한 발 더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한 해를 살아가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