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려 주셨는 데 뜻깊은 역사기행기 같아 펌을 했습니다.
다음에는 저도 합류시켜 함께 가시자는 부탁도 잊지 않았지요~ㅎㅎ
첫 기행지가 제가 살고 있는 뒷산인 인왕산이어서
함께 하지 못해 서운했지만...다음엔 저도 꼭 합류하려 합니다.
4~5번 정도의 기행문으로 올려질 것 같던 데 그때도 펌을 드리겠습니다.
*****************************************************************
[12.13] 홀로 걷는 서울도성(都城) 탐사기행(1)
창의문 - 인왕산-행촌동 구간
* 먼저 이런류의 글을 올려도 되는지요? 부적합 하면 내리겠습니다.
** 허락 하신다면 4-5회 연재 하겠습니다.
지난해부터 하고 싶었던 서울 도성(都城)기행...
그때만 해도 허리가 시원칠 않아 좀 어려웠었는데...
지금은 혼자 천천히 걷는 것이라면 산행도 가능 하기에...
약 18km의 거리를 몇번으로 나누어 하면 적당하다고 생각되어
서울 도성을 따라 걸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어디서부터 출발을 할까...?
동대문-혜화동-숙정문 구간이 가장 생소하여 여기서부터 시작 하고 싶었으나 ...
그래도 인왕산(仁王山)부터 올라가 전체적인 지세를 훑어보는 게 순서일 것 같아
첫 출발점을 창의문(자하문)으로 정하고 인왕산-독립문-숭례문 방향으로
쉬엄쉬엄 능력껒 걷기로 하였습니다.
12:30분경 창의문에 도착하여 ....
곧바로 인왕산(仁王山) 정상 (338m)을 향하여 걸었습니다.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은 성벽과 함께 잘 정비된 상태였고...
마침 토요일에 날씨마저 좋아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올랐습니다.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천도할 것을 명하였지만...
후보지로 거론된 계룡대, 모악, 한양의 장단점으로 갑론을박 하다가
무학대사의 조언으로 한양천도를 결심한후....
이성계는 몸소 앞장서서 한양부 객사에 머무르며 천도를 진두지휘 했다지요.
먼저 무학대사와 정도전을 대동하고
한양천도의 구체적인 설계를 하고쟈 이곳 인왕산에 섰는바....

풍수의 대가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의 산세가 빼어나 주산으로 손색이 없고....
앞의 낙산이 야트막하고 온화하여 외부의 침략이 없을 것이며...
만약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을 경우
멀리 관악산의 기세가 자못 험하여 도성을 들여다보니
앞으로 반드시 외침이 있어 2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유학의 대가 정도전(鄭道傳)은 ...
군왕은 의당 남향하여 좌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북악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좌청룡 인왕산을 우백호로 하여
남산을 바라보며 궁궐을 앉혀야 한다는 이론 이었답니다.

여기에서 인왕산 측후방 약 100m 거리에 있는....
지금도 언제나 촛불이 꺼지지 않는 “선바위” 이야기를 덧 붙이겠습니다.

“선바위”는 그 모습이 마치 스님들이 장삼을 걸쳐입은것 처럼 보여.....
참선 한다는 뜻의 선자를 따서 “禪바위”라고 불렀답니다.
이 “禪바위” 조선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상이란 전설도 있고 ...
이성계 부부상이라는 전설도 있답니다.

“禪바위” 앞의 소개판에 씌여져 있는 재미있는 내용을 소개 합니다.
“옛문헌에는 한양천도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를 전하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도성을 쌓을 때 ...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안에 포함시키자고 하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자고 하였다.

이때 정도전이 말하기를 선바위를 도성 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
밖에 두면 유교가 성할 것이라 하니....
태조가 정도전의 의견을 따라 성 밖에 두도록 하였다.

이에 무학이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들고 다닐 것이다”
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씌여 있습니다.
이걸 보면 당시 도성의 건립은 불교와 유교의 통치이념 대립 이었던 것 같습니다.
태조의 “꿈 이야기”를 포함하여 여러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지만....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 주고 모든 천도를 정도전에게 맡겼답니다.
당시 유교사상이 불교를 이긴 것이 아닌가 생각 됩니다.
곧바로 궁궐과 종묘사직을 짓기 시작하여 1년 2개월만에 완성을 눈앞에 두고
도성(都城)을 쌓게 되는데....
성곽은 내사산(內四山)을 연결하여 북악산(342m)-인왕산(338m)-
남산(262m)-낙산(125m)을 잇는 총길이 18.2km 랍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로서 이 방대한 토목사업을 완성하기 위해 ....
태조 5년(1936) 2월 하순부터 농한기를 이용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49일 동안 성곽의 대부문을 쌓고,
가을 농한기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산지에는 石城으로,,평지에는 土城으로 완공하였으며,
동시에 4대문과 4소문도 이 때 완공 하였답니다.
4대문의 이름은 유교의 중심사상인 仁義禮智를 따서..
남쪽에는 숭례문(崇禮門)..동쪽에는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는 돈의문(敦義門),
북쪽에는 숙정문(肅靖門)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이중 유독 동대문을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하며 之(갈지)字를 넣은것은
좌청룡인 낙산이 너무 낮아 이를 보완하는 의미로
山 모양을 한 갈지자를 넣었다 하며....
숙정문은 肅靖이란 글자속에 智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합니다.
그후 이 도성은 세종 때(1422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모든성을 石城으로 고쳐 쌓았는바
이 때 동원된 인부가 32만명... 공사중 사망자수가 872명에 달했다고 하니....
당시 서울 인구 10만명 이었던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겠지요.
이후 숙종 때 부분적인 보수공사가 있었고.....
일제시대 전차길이 생기면서 도시계획의 명분으로 평지의 많은 부분이 흘려 나가고
오늘날 총18.2km중 산지 성곽10.2km만 남아 있답니다.
인왕산 정상에서 성곽을 따라 내려오는 이 길은 ...
도성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저 멀리 남산을 바라보며
누차에 걸친 보수 흔적을 보이며 사직공원까지 잘 이어 졌습니다.


행촌동 아스팔트길에 도착하여 본 마지막 부분입니다.
(길 아래로 약 10m 가량 더 있지만 ...)

그 다음 부터는 흔적이 없어 어디로 연결 되었는지도 모르고
무질서한 단독주택이 즐비한 골목길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 다니다가
“서울 역사관“까지 왔습니다.

날이 저물어 오늘은 여기까지 밖에 할수 없었습니다.
이후 서소문-돈의문-숭례문 -남산길은 다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