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오랫만에 간 대여점에서 이산 정조대왕이란
소설을 빌린 적이 있습니다.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탄력있는 묘사는 부족했지만
그래도 오랫만에 다시 정조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를 느낄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마침 도서관에서 한 아이가 제게
노빈손 정조대왕의 암살을 막아라란 제목의 책을 보여주면서
선생님,이 책 읽어보셨나요? 참 재미있어요 하고
권하더라고요.
사실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노빈손 시리즈를 책표지만
보았지 한번도 읽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이상하게 이 책에는 손이 갔습니다.

우선 저자가 상당히 공부를 했다는 내공이 느껴지는
책이었습니다.
물론 황당한 상황설정이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사실들은
정확해서 한 두군데 어라,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의문이 생기는 곳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새록 새록
제가 알고 있던 사실들을 견주면서 읽을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내용으로 보면 이 시기를 재미있다고 하면 곤란한
마음이 북받치는 느낌의 사실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역사를 가슴에 박히도록 하면서도 읽는 재미를
이렇게 끌어낼 수 있는 저자가 좀 더 공부해서
한국역사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있다면 역사가 싫다는
아이들에게도 먹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도
보게 된 책이었지요.

이 책이 생각났습니다.그래서 다시 읽어볼까 찾았으나
어디로 갔는지 누구에게 빌려주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네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덕일의 새로운 책 정조와 철인정치
의 시대를 구해서 읽자는 것이었지요.
어제 서점에 가보니 그 책이외에도 1780 열하라는
제목의 소설이 두 권으로 출간되었더군요.
이 책에서도 두 축의 하나가 정조라고 소개되어서
일단 마음으로 찜해 놓고,소설가 한승원의 소설
다산도 그 다음으로 찜해놓고 일단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2권만 구해서 들어왔는데 어제부터 오늘까지
수업하는 시간이외에는 거의 정조와 그의 시대에
붙들려 살았다고 볼 수 있지요.

책 소개
학자군주이자 무인군주로서 군사(君師)가 되고,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힘으로써
만인의 모범이고자 했던 임금 정조의 일과와 곁에 있던 사람들, 미래에의 꿈과 갑자년 구상까지.
비극의 주인공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철인(哲人)이 된 한 군주의 삶과 사상,
역사 속 진실과 오늘날에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18가지 주제 아래 정조 시대를 서술해 나간 이 책은『정조실록』,『일성록』,『홍재전서』 등의 관찬사서뿐 아니라 채제공의『번암집』, 정약용의 문집, 이덕무의『청장관전서』, 박제가의『정유집』, 유득공의『고운당필기』 등 개인 문집을 망라하여 역사의 진실에 최대한 다가서려 노력하였다. 1차 사료에 충실하면서 뛰어난 이야기 구성으로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이 책을 통해 철인군주 정조가 오늘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료에 근거한 논리 전개와 흡입력 있는 문체, 박진감 있는 구성.
역사가 이덕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해석한 철인군주 정조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회한, 도전과 꿈의 역사
임금 자리에 오른 정조의 두 가지 모순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를 되새기라는 소론 측의 상소에 크게 화를 내며 상소를 올린 이들을 사형시킨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할아버지 영조의 ‘3불유훈’은 이처럼 절대 어길 수 없는 것이었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세력에 대한 토죄를 단행하면 영조의 유훈을 어기는 불효로 귀결되고, 이는 반대세력에게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명에 간 아버지를 모르는 체할 수는 없었다. 세손 시절, ‘나라의 중탁을 세손에게 한다’고 한 할아버지 영조의 말은 정조에게 뼈를 깎아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이었다. ‘나라의 중탁’을 맡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죽일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있었기에 모친도 남편을 버릴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자니 아버지의 원혼이 울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니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불효손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서 정조가 찾은 해법은 경에서 ‘권도(權’道)를 찾는 것, 즉 편법을 찾는 것이었다. 즉 사도세자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을 다른 명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할아버지의 유명도 거역하지 않는 권도를 택한 것이다.
자신의 모순을 뛰어넘으려는 정조의 고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갑자년 구상’은 그 최대의 결과물이다.
갑자년 구상―아들에게 양위하고 화성에서 사도세자의 아들로 살겠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밝힌 ‘갑자년 구상’의 내용이 나온다. 정조는 나이 쉰셋이 되는 갑자년(1804)에 부친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기 위해 세자(훗날의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 화성으로 가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세자가 국왕이 되어 할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이 정조가 영조의 유훈을 어기지 않고 부친에게 효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철인 군주의 하루―최고의 학자이자 뛰어난 무관으로 군사(君師)가 되다.
정조는 가슴속의 증오와 분노, 갈등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손 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하나의 ‘나(懶:: 게으름)’ 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이는 정심(正心)의 추구였다.
『대학(大學)』의 정심은 마음에 노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가슴속의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부친의 원수들과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통을 정심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활을 쏘며 그는 “정심을 하지 못하면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과녁을 맞힐 때는 정심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학문과 정사와 활쏘기가 모두 하나였다. 그렇게 그는 철인 정치가가 되어 갔다.
조정에서 가장 업무량이 많은 사람은 정조 자신이었다. “제왕에게는 사(私)가 없다.” 정조가 자주 되뇌었던 이 말처럼 그는 사생활 없이 밤잠을 줄여 가며 일과 독서를 병행했다.독서의 군주이자 학문의 군주였던 정조에게 학문은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자 자기완성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밝힌 정조에게 중요한 것은 천하를 편하게 다스리는 평치이고 학문의 완성이었다. 경연도 바로 이를 위해서 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경연을 통해 주자학에 경도된 신하들의 좁은 시야를 넓게 틔워 주고 싶었다. 그러나 경연관들의 수준이 정조에 미치지 못했다. 구체적인 질문을 해도 구체적인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경연 자리는 학문에 밝은 신하가 군주의 학문을 인도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정조 때는 거꾸로 바뀌었다. 정조는 경연관들의 수준이 낮다고 경연을 폐하는 대신 그 자리를 자신이 신하들의 스승이 되는 계기로 활용했다. 임금이 모든 신하의 스승이라는 군사론(君師論)의 탄생이었다. 정조가 과거 시험 문제를 직접 출제하고, 초계문신들을 가르치고, 경연에서 스승 역할을 하는 모든 것들이 이 군사론에서 나왔다.
정조는 옥안(獄案)도 직접 꼼꼼히 심사하였다. 정조를 곁에서 지켜본 서용보는 “여러 도의 옥안이 책상과 대에 가득히 쌓이는데 임금이 직접 살펴보고 조사하는 데 밤을 새워 아침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정조가 만난 사람들
철인군주 정조가 자신의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걸었던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책은 정조가 만났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결코 미래로 갈 수 없다며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정조 이복동생들의 사형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증오의 정치구조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과 그를 추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홍국영처럼 미래를 가장해 과거를 걷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에는 또한 정조가 과거를 선택했다면 만날 수 없었을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들과 사회의 천시 속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쌓았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들, 그리고 사도세자의 이장(移葬)에 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이 그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정조는 미래를 향해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된 서얼 출신의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들이 단번에 조선의 지식계를 평정한 것처럼 조선은 새롭게 바뀌어 갔다. 그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서학(西學)을 받아들이고 북학(北學)을 주장했다.
채제공과 ‘금등지사’의 비밀―왕도 울고 신하들도 모두 울었다.
‘5월 22일의 하교’로 사도세자 문제가 더 이상 거론되는 일이 없게 된 가운데 영의정으로 임명된 채제공이 사직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사도세자에 대한 얘기를 언급해 노론 측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채제공을 처벌해야만 하는 입장이 된 정조는 대신들에게 선왕 영조의 ‘금등지사(金?之詞)’를 공개하며 채제공을 두둔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후 도승지로 있던 채제공에게 자신이 직접 쓴 글 한 통을 주면서 신위 아래에 간수하라고 명했는데, 그 ‘금등’의 글 가운데 있는 한 구절을 채제공이 사직상소에서 언급한 것이고 이는 선왕과 자신에 대한 충성과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66-67쪽)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천추에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라노라.
(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
영조가 손수 적은 ‘금등지사’ 가운데 정조가 공개한 이 두 구절에는 사도세자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영조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정조대왕행장』은 이 비가(悲歌)를 보고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체반정의 이유―사대부를 향한 정조의 역습
정조 9년(1785) 을사추조사건을 시작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단 논쟁에 불이 붙었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한 노론의 공격이 신자가 많은 남인들에 대한 정치적 공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조는 천주교 문제를 정치적이 아니라 사회적ㆍ철학적 차원으로 접근했다.
“정학(正學)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를 벗어난 이런 책(천주교 서적)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나라 초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급선무이다. … 사대부 중에 한 사람도 오염되는 이가 없으면 화복설에 흔들린 어리석은 백성들도 스스로 깨닫고서 깨어날 것이니, 조정에서 이 일에 많은 힘을 쓸 필요가 없다.”
이처럼 정조는 국법으로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렇다고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천주교를 허용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창안한 논리가 ‘정학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소멸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노론에 대한 역습이기도 했다. 성리학을 정학으로 신봉하는 노론 인사들이 바로 서면 사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문체반정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조는 서양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 청초의 문집부터 금지시켜 패관잡기가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하여 성균관 시험지 중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글이 있으면 비록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그 글을 쓴 사람은 다시는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내렸다. 또한 남공철, 심상규, 김조순 등에게 문체가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함추(緘推)의 처벌을 내리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명가의 후손들이었다. 정조는 노론 명가의 젊은 관료들이 경전이 아니라 패관소품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천주교 같은 사학이 유행한다는 논리를 성립시켜, 노론 측에서 유학을 빙자해 천주교를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었다. 박지원도 처벌 대상이 되었는데, 정조는 패관잡기가 유행하게 된 원인이 박지원의『열하일기』에 있다고 비판하면서 반성의 의미로 ‘순수하고 바른 글’을 지어 올리라 명한다. 박지원을 언급한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에게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주는 방법을 통해서 문체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었다.
오회연교와 죽음
다시 불붙은 천주교 논쟁으로 남인들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정조는 재위 24년(1800) 5월 30일 ‘오회연교’를 통해 중대한 결심을 시사한다.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모년의 의리’ 즉 사도세자와 관련한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정계에서 밀려났던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정조는 심상치 않은 병세를 보인다. 6월 16일 정조는 심회를 토로한다.
“대개 이 증세는 가슴의 해묵은 화병 때문에 생긴 것인데 요즘에는 더 심한데도 그것을 풀어 버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조정에서는 두려울 외(畏) 자가 있는지 알지 못하니 나의 가슴속 화기가 어찌 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 정조는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을 한다.
“오늘날처럼 살피고 엿보기를 잘하는 습속으로 혹시 나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안다면 또한 어찌 얼굴을 바꾸고 마음을 고치는 길이 없겠는가. 숨어 있는 음침한 장소와 악인들과 교제를 갖는 작태를 내가 어찌 모를 것인가. 내가 만일 입을 열면 상처를 받을 자가 몇이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우선 참고 있는데 지금까지 귀 기울이고 있어도 하나도 자수하는 자가 없으니 그들이 무엇을 믿고 이런단 말인가? …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 이런 하교를 듣고서도 어찌 그 이름을 지적해 달라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나는 그들이 종기처럼 스스로 터지기를 기다리고 싶으나 끝내 고칠 줄 모른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2권 237쪽)
앞서 남인 중용을 시사한 오회연교의 발언과 대숙청을 예고한 지금의 말은 서로 연관이 있었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6월 23일, 뒤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연훈방(烟熏方) 요법이 의관 심인의 소개로 등장한다. 6월 28일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숨을 거둔다. 정조의 병세 진행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논란 많았던 연훈방과 이시수가 여러 차례 권했던 경옥고와 정조의 임종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 정순왕후라는 점이었다. 연훈방을 소개한 심인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의 친척이었고, 연훈방을 정조에게 알린 이시수는 같은 당파 심환지와 상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심인의 친척이란 점에서 심환지는 남인들의 의심의 표적이 되었다.
선왕 정조의 복수를 외치며 관아를 침범한 사건은 왜 조용히 처리되었나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한 지 40여 일이 지난 1800년 8월 15일 추석날 밤. 경상도 인동부(현 구미시)에서는 초야의 선비로 묻혀 지내던 장시경, 장시욱, 장시호 형제와 장시경의 아들 장현경이 주축이 되어 ‘선왕의 원수를 갚자’며 군사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했다. 인동 관아 앞에서 관군에 막혀 하룻밤의 꿈으로 끝난 이 사건은 그러나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한 반란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른 역모사건과는 달리 조용히 처리되었다. 주모자의 서울 압송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가담자에 대한 처벌도 의외로 관대했다. 당연히 외부로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는데, 정순왕후와 노론이 장악한 조정은 무슨 의도로 이같이 처리했을까. 반란 주모자들은 “국가에서 어약을 과도하게 써서” 임금을 잃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정조 사망 당시의 어의(御醫)들에 대한 처벌 문제로 들썩였던 정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인터파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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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저자 | 이덕일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우리 역사의 온갖 미스터리를 객관적 사료를 토대로 선명하게 풀어낸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조선 왕 독살사건』 등의 문제작을 펴내면서 우리시대의 대표적 역사저술가로 자리매김했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덕일의 여인열전』 등 생존 당시 주목 받지 못했던 불운한 천재들이나 역사 속에 안타깝게 묻혀버린 인물을 복원하는 작업을 꾸준히 진행해왔다.
이덕일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미스터리와 의문에 대한 문제제기로 새로운 형태의 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 내는 논쟁적인 주제로 새로운 역사해석의 선두에 서있다.
그는 최근 정치사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통해 제대로 주목 받지 못한 그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입체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풍부하고 정확한 사료에 근거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문체로 대중역사서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한 그는 방송과 신문, 잡지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면서 더 많은 독자들을 미지의 역사로 이끌고 있다. 이덕일은 기존의 정사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야사와 어울려 흥미로운 우리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밝혀내어 역사 연구의 성과를 대중에게 알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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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권〉
1장 설치(雪恥)
2장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 세손은 세 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3장 홍인한의 우익들
홍봉한 공격 받다 | 진퇴양난 | 홍인한의 반격
4장 외척 전쟁
김귀주의 홍봉한 공격 | 공홍파와 부홍파의 대결 | 재공격에 나선 김귀주
5장 3대역모사건
지붕 위의 자객 | 저주하는 무녀|은전군 연루되다
6장 흑두봉조하 홍국영
홍국영과 정조의 첫 만남 | 정조와 소론 | 송시열을 높이고 윤증을 내치다
외척을 몰아내고 외척이 된 홍국영 | 흑두봉조하 홍국영 실각하다 | 정조의 반격
7장 규장각 사검서 시대를 주름잡다
백탑파의 문인들 | 북학파 | 서류소통절목과 사검서의 탄생
나이 순서대로 앉으라 | 온갖 차별에 도전하다 | 개혁에의 꿈
8장 송시열 후손 추대 사건
대로의 후손 송덕상 | 철인군주와의 대화 | 송덕상의 행보
공격받는 대로의 후손| 대선생 송덕상 추대 사건
9장 정순왕후의 반격
격문 같은 한글 전교 | 노론으로 불똥이 튀다
이율ㆍ홍복영 역모 사건| 법망에 걸린 구선복
10장 남인과 천주교
최초의 천주교 사태- 을사추조사건 | 남인 분열되다
천주교와 제사 문제| 드러나는 진상 | 확대된 전선
〈2권〉
11장 문체반정
명말 청초 문집을 성토하다 | 문체반정의 시작| 박지원과 순정지문(純正之文)
12장 채제공과 금등지사의 비밀
도산서원에서 치른 별시 | 목이 메어 식사를 폐한 것은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 | 영남만인소
정조의 고민 | 채제공의 사직상소 | 어제 금등지사의 등장
13장 화성의 꿈
숙원 사업의 시작 | 천장(遷葬)
설계도 구비와 장용외영의 설치 | 순조로운 준비
14장 미래로 나아가다
역사적인 해의 시작 | 화성 건설의 원칙 | 만석거와 대유둔
금난전권의 폐지 | 화성에 상가를 조성하라 | 미래 지향의 도시, 화성
15장 임금의 가족들
기구한 운명의 형제 | 정조의 타협안 | 은언군을 다시 만나다
할머니 정순왕후와 어머니 혜경궁 | 부인 효의왕후
16장 철인군주의 하루
독서 군주 | 검소함은 왕가의 전통 | 경연, 『대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민(新民)인가, 친민(親民)인가? | 군사(君師) | 과거 출제관
답안지를 둘러싼 소동 | 사형수를 심리하다
17장 오회연교와 의문의 죽음
주문모 잠입하다 | 오회연교 | 운명의 연훈방
18장 반동
어의의 처벌을 둘러싼 논란 | 시신이 식기도 전에 | 장현경의 딸들
[반디북 제공]
이제까지 제가 읽은 정조시대는 주로 그 시대의
인물에 관한 글에서 거꾸로 정조가 조연으로 나오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정리된 책을 읽었는데요
정말 마음속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많은 생각이 오간
책읽기가 되었습니다.
늘 의문이었던 왜 정조는 문체반정을 반포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수확중의 하나이고요
인간 정조에 대해서,그의 삶에 대해서,그리고
그가 그리던 세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쉬는 날,화성에 가보고 싶어지네요.
제대로 화성을 그리고 수원을 느껴보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