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5일에 걸쳐 안동영양 독립운동 답사를 다녀왔다.
아는 것이 힘이 될 뿐 아니라, 아는 것이 정의가 되기를
내 자신에게 약속해 본다.
벽산 김도현 선생은 원래 1852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1882년 임오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그 해,
과거를 보러 상경했다가 간신들의 날뛰는 것을 보고 개탄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과거장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위의 글씨 중 천추대의는 박정희의 친필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는 1894년 의병봉기를 준비하고, 198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본격적으로 의병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1896년 청량산에서 항일 의병 투쟁을 시작하였으며, 안동, 영양, 강릉, 삼척 일대에서 왜적 및 관군에 맞서 싸웠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여 상경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자결순국하려 하였으나 조병희의 만류로 귀향하였다.
이후 도산서원에서 의병 봉기 통문을 발송하여
영양에서 양성해 온 포수들을 주축으로동지들을 모아
제 2차 의병 투쟁을 시작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906년 고종은 벽산 김도현에게 비밀리에
밀지와 상인검을 하사하고
의병봉기를 촉구하였으나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이송,
모진 고문으로 괴질에 걸렸다.
1910년 나라가 패망하자 항의 순국하려 하였으나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므로 함부로 처신하지 못하였다.
스승 이만도가 단식으로 일제 강점에 항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안으로 달려가 하루 밤낮으로 모시며 조만간 스승의 뒤를 따를 것을 맹세하였다.
1914년 부친이 세상을 뜨자 장례 절차를 마친 후 동해 대진 산수암으로 가서
일제 강점에 항의하고,
죽어가는 선비들의 기개를 다시 일으키고,
또 죽어서는 일제의 백성이 되지 않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일제 침략을 막는 구국의 수호신이 되기 위하여
향년 63세를 일기로 동해 바다에 투신 순국하였다.
바로 사진 속의 장소가 김도현선생이 바다속에 들어가기 시작하여 투신 순국하신 곳이다.
도해란 바다를 밟다는 뜻이다.
선생이 10리 길의 바다를 걸어서 순국하였으며 보랏빛 무지개가 바다 한 가운데 뻗쳤다고 한다.
그 바위에 위와 같이 한자로 밟을 "도"자를 써서 도해단이란 명칭을 붙여 벽산의 친구인 김병식 선생이
도해비를 세웠으나 일제가 파괴하여 바다로 던져버렸다.
1954년 도해비를 복구하였으며
1962년 정부에서 김도현 선생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벽산선생은 아마 이 바위도 밟고 지나가지 않았을까?
횟집의 물고기는 언제나 먹음직? 스럽다.
이어서 도착한 신돌석 장군 생가이다.
일제가 불을 질러 파괴한 것을 최근에 다시 복원하였다.
신돌석의 집.. 마루에서 신돌석의 생애를 듣고 있다.
신돌석은 일본 놈이 무서워할만큼 신출귀몰한 전투능력을 가졌었다.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같다.
신돌석 집의 뜰에는 가을을 기다리는 밤송이들이 있었다.
어느 낯선 노인 분이 이광현 선생님의 신돌석 강의를 너무나 진지하게 경청하고 계셨다.
다 끝나고 나서 자료집을 직접 얻어가셨다.
마을 주민이었을까?
우리나라의 국화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주 보기 힘든 무궁화가
신돌석 생가앞에 피어있었다.
1904년 신돌석은 평해 월송정에 올라
위의 시를 남겼다.
그의 가문은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예로 입신출세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중인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항 후에는 평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는데,
위의 시로 보자면 예전의 지식층 집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어 도착한 것은 아나키스트 엄순봉의 생가터였다.
생가!!!
유명한 사람의 생가터였다면 이리 되었을까?
잊혀진 혁명가 엄순봉의 생가터는 잡초가 앞을 가려 렌즈의 촛점을 가져가버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그늘이 있어,
엄순봉의 생애와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에 대해 전문적 강의를 들었다.
중국주재 일본 공사를 처단하려 했던 육상정 의거,
흥사단 회원이었으나 변절하여 친일분자가 된 옥관빈은 일본관헌과 내통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프랑스 조계에서
엄순봉에 의해 암살된다.
상해 조선인 거류민단은 대표적인 친일조직으로 부회장인 이용로를 처단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집행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한만세, 무정부주의 만세삼창을 외쳤다고 한다.
가슴 아리는 그의 일생을 들으면서 다시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어디가 그의 생가인지 알아보기 힘든
평범한 농촌마을의 엄순봉을 다시한번 카메라에 담았다.
그 생가앞의 잘생긴 가로수들
여자의 몸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 남자현

어렸을 때 부터 너무 총명하여 아버지께서 글을 가르쳐주기도 했던 남자현
결혼 후 남편은 1986년 의병투쟁 중에 전사하였으며, 유복자 김성삼을 임신하고 있었다.
이후 아이 양육과 시어머니 봉양을 하였고, 효부상까지 받았다.
3.1운동 직전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1920년대부터 만주의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길림대 검거사건 때 옥바라지,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국내침투를 하였다가 미수에 그쳤고
김동삼을 구출하기 위해 구출작전을 세웠으나 날짜가 변경되어 실패하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이 만주국에 도착하자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자르고 혈서로 한국독립운동원이라 쓰고 손가락을 함께 써서 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만주국 주재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밀정의 밀고로 하얼빈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5달 동안 혹형에 시달리다가
8월부터 단식투쟁하여 9일만에 인사불성이 되자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이후 아들과 동지들의 간호를 받다가 1933년 만 60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이때 국내 신문에는 "부토모살범"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한옥은 뒤뜰에도 자연이 보인다.
하룻밤 자고 다음날 아침 간 곳은 의성김씨 종택이다.
우리나라 가문 중에 최다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의성김씨 가문의 종택이다.
낭만적인 툇마루
한옥과 잔디와 뜰이 너무 잘 어우러진다.
가장 멋진 설명장소였다.
장
이 꽃들이 향한 곳은 태양이었을 것이다.
뱀사(巳)의 마지막 삐침부분?
안의 네모 공간 부분
꽃은 다 듣고 있었을까?
고운 하늘 빛
안동 독립 기념관의 입구
고문체험실

10분만 움직이지 말라고 해도 얼마나 고통스러운데...
살려주세요~ ㅜㅜ
감옥 체험하는 곳.
포기했을까?
독립기념관 뜰의 꽃
8.15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담하지만 알찬 기념관
천정도 멋스럽다.
안동을 다시보게 되었다.
안동의 의병들의 활동상은 대단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안동은 그 지역의 지주, 지식인들이 먼저 앞장서서 의병과 독립운동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1927~31년 사이 신간회의 열풍은 안동에도 불었다.
신간회 안동지부의 정기대회 기념 사진이다.
그 때는 이미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된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기이지만
독립과 사회변혁에 대한 열망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안동출신의 유명한독립운동가들. 김동삼, 이상룡, 이육사, 김재봉 ......
그들은 안동지역의 유지이자 대부호였으나
그 많은 토지를 일제몰래 파느라 헐값으로 처분하지만
워낙 토지가 방대하여 거금을 마련하여 서간도로 건너갔던 것이다.
구식화승총의 실제 모습
의병이 일본군에게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화승총은 심지에 불을 붙이고 몇 분이 지나야 발사가 가능했지만
일제는 최신 슈나이더 권총으로 날래게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정의부의 핵심은 안동인이었다.
이만도의 자결. 단식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집안의 어른이 식사를 전혀하지 않고 죽음으로 맞서는 모습에
안동지역 주민들은 어느 지역사람들보다 일찌기 독립운동을 체험하고 있었다.
이후 실제로 이만도의 며느리도 3.1운동 등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으며
안동지역의 명망가들이 문중의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되는 불씨를 제공하게 된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경학사, 부민단 등의 활동은
안동지역 부호들이 전재산을 처분하여 자금을 대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구한말에는 의병운동가,
일제시대에는 서간도의 독립운동가로 변신한 안동의 양반들이야 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모범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내사진........
그날 나는 사림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의리와 정의는 통하는 것일까?
조선건국을 반대하고 고려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키고자 한 사림파들이
구한말에도 비굴하게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파가 되기 보다는
독립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존경스럽고 순간순간 울컥하기까지 했다.
고집스러운 성리학 신봉때문에
못마땅하게 생각해온 사림파, 유교, 그리고 양반에 대한
기존의 나의 생각을 다시 제고할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