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일학년때의 일입니다.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한 정통 종합영어,단어도,문장도
문법도 ,그리고 영작까지 다 어려워서 한 과를 끝내는 데
한 주일도 더 걸리던 끙끙대던 시간중에도 제게 감동을 주는
글들이 있어서 그 책을 공부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지요.
장문독해라고 명명된 파트가 특히 좋았는데요
그 때 i have a dream이란 말로 시작하는 마틴 루터 킹의
글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하다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그런 경험 이후 종합영어는 단순한 수험공부용 책이 아니라
단문독해,종합영어안에 숨어 있는 주옥같은 글들과 만나는
상당히 소중한 시간이 되었지요.
조금 더 긴 글을 ,아니면 전문을 다 보여주는 일이 어려운가
하는 그런 갈증도 있었지요.
4월4일에 everymonth에 올라온 그에 관한 이야기와
그에 관련된 노래를 들으면서 그 시절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버락 오마마의 연설문과 연설문을 들을 수 있는
싸이트가 올라와 있네요.
음악을 들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클릭한 everymonth에서
클레어님덕분에 상당히 긴 호흡의 연설문을 읽고
연설문을 듣고 나서 마틴 루터 킹에서 버락 오바바까지의
시간,미국이 얼마나 변하고 변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네요.
더불어 다른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방식과 속도가 얼마나 바뀌었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요.

연설을 한 번 다 듣고 제대로 못들은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틀어놓고 그림을 함께 보고 있는 중인데요
고른 화가는 에밀 놀데입니다.

the mocking of christ라는 제목의 그림인데요
같은 소재로 그린다고 해도 현대로 올수록 성서를 소재로
하는 그림들이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같은 것이 더 이상하겠지요?
variation.음악에서는 변주라고 하는 이 말을 저는 참
좋아합니다.텍스트가 하나라도 텍스트를 읽는 사람마다
혹은 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어서 아니 달라서
더 좋은 것이 아닌가 하고요.

pentecost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성서를 읽다가 마음에 새겨진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과 사람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의미의 구절이었는데요,그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사람의 만남이 갖는 신비를 지적하는 구절이 아닌가 싶어서요.

the dance around the golden calf입니다.
개신교나 천주교,이런 종교의 세례를 받지는 않았어도
한동안 성서를 읽어서 그런지 제겐 기독교의 경전이 낯설지는
않지요.가끔은 길거리를 자전거 타고 가다가 신이 나면
찬송가를 흥얼거리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 재미있어 하기도
놀라기도 하곤 하지요.그리고 아침마다 피아노를 치다보면
어메이징 그레이스나 바하의 곡에서 아름다움과 평화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황금송아지앞에서 춤을 추는 이 그림앞에서 내가 섬기고 있는
황금송아지는 무엇일까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군요.

오바마는 연설에서 여러가지를 언급하고 있군요.
그 중에서도 static과 change를 대조해서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목사에 대해서 그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그가 자신의 일부를 이룬다는
것을 시인하고 안고 나가는 부분이 돋보였습니다.
우리안에 무수하게 그어진 금들이 있지요.
이것은 이래서,저것은 저래서,그렇게 금을 긋고
다시 만나서 그 안에서 또 금을 긋기도 합니다.
가끔 생각을 합니다.왜 그렇게 글을 읽고 사는가에 대해서요
아마 살아가면서 자꾸 쌓이는 제 안의 금을 읽는 순간이라도
지워가고 싶기 때문일까요?


우리 앞에 산적한 문제들앞에서 어쩔수가 없다고 주저앉을
것이 아니라 변화는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이 곳은 우리세대만 살고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곳이란 자각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그러러면 나는 무엇에 힘을 보태야 하는가
갑자기 마음이 분주한 토요일 오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