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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편지 -- 난 상고머리 세대

| 조회수 : 2,376 | 추천수 : 66
작성일 : 2007-05-22 00:09:29
2007년 3월 4일

올 겨울은 눈다운 눈 한번 제대로 내리지 않았다.
예년의 지금이라면 눈 속에 고립되어 4식구가 새까만 눈동자만 굴리며 화롯가에서 고구마를 구워먹었을텐데  눈은 고사하고 날이 더워 여름으로 직행할까 노심초사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 제정신 못차리고 모두 빨리, 빨리를 외치니 계절도 건너뛰기를 하려는 모양이다.
전세계가 이상기온 현상으로 몸살을 앓는다는 뉴스를 먼 데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앞날이 걱정이다.

겨울마다 눈이 많이 내려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제 계절이 그 구실을 다 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폐해를 생각하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지싶다.

********************************************

내가 상고머리 세대였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얼마 전에 '그림 읽어주는 여자'라는 책을 써서 나를 비롯하여 그림에 까막눈인 사람에게도 그림의 향기를 심어준 한 젬마님의 또 다른 책 표지를 보게 되었다.

"앗, 상고머리!! 그래, 상고머리가 있었지."

내가 상고머리 세대였다는 것을 기억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겠지만 추억으로 젖어듬으로써 지금의 나를 확인하고 삶의 자세를 다잡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기억하길 잘했다 싶다.

상고머리를 얘기하려면 그 옛날 내가 8살 때로 돌아가야 한다.
아버지, 엄마가 많은 자식들 한양에서 공부 많이 시켜 서울에 말뚝박게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울에 상경했을 때다.

아버지는 유독 바로 위 언니와 내 머리만큼은 꼭 손수 깎아주셨다.
그것은 부족할 것 없이 고향에서 살다가 달랑 몸뚱이만 올라온 궁핍한 서울 생활을 하는 딸들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이었는지도 몰랐다. 지금 생각하니...

하여간, 깎을 때마다 딸의 머리통을 이리 저리 둘러보시고, 어루만져 보는 것으로 치자면 비달사순이나 박준 정도의 멋진 헤어스타일을 만들어 놓아야 옳다.
그러나 결국 깎아 놓은 머리가 한결같이 상고머리다.
깎기 전의 신성할 정도의 심사숙고한 시간을 생각하면 새로운 유형의 머리 스타일이 나올 법도 한데 결국은 별 수 없는 상고머리였다.

머리카락이 발 아래로 사정없이 잘라져 떨어지고 나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을 때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꼭 딸들 손에 거울을 들려주셨다.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거울 앞에서 우는 것은 머리 깎을 때마다의 행사였다.
그토록 딸들이 그 놈의 상고머리를 싫어했건만 아버지는 잊지 않고 상고머리를 만들어 놓으셨다.

생각해 보라.
이마 밑으로 내려온 머리는 자로 잰듯이 일자로 자르고 옆 머리는 귀와 같은 길이로 자르는 것이다.
거기까지만 해도 자빠질 지경인데 뒤통수는 다시 쳐올려 파리하게 깎아 놓은 것이 상고머리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봐댔자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깎아 놓은 머리라지만 우린 진저리치도록 그 머리가 싫어 울고 또 울었다.
작가 박범신 님의 표현대로 '송편으로라도 목을 따고 싶은 어린 심정'이었다.

그러면 옆에서 가만히나 계시면 좋으련만 꼭 한마디 멘트를 날리셨다.

"보기에 예쁘기만 하구만 그러네. 얼마나 보기 좋아."

벌써 이 풍경에 익숙해진 사람은 우리 셋(아버지, 네째 언니와 나) 말고도 한 사람 더 있었다.
엄마....

엄마는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어린 딸들을 보며 우리 보다 더 서럽게 가슴으로 울고 또 우시는듯하셨다.

"애들이 그렇게 싫어하면 하던 일도 말련만 어찌하여 또 상고머리를 잘라 애들을 울리는지..."
영락없는 한국형 엄마는 행여 아버지가 들으실까 당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중얼거리며 우는 딸들을 끌어안고 눈시울을 붉히셨다.

어린 나이에도 엄마의 그 슬픔을 삼키는 모습이 맘에 걸려 우린 울음을 그치는 것으로 그 날 행사의 막을 내리곤 했다.

시골에서는 너나 없이 상고머리를 했지만 서울에 오니 상고머리를 한 애들이 없었다.
안그래도 시골에서 전학와서 기도 못피는데 머리까지 빌어먹을 상고머리였으니 난 기가 있는대로 죽어서 학교를 다녔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저학년때까지의 학교생활에 대한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 상고머리의 '위력(?)'이 기억이라는 세포를 다 잡아먹은 것같다.

그리고 작년의 일이다.
아들 선우가 초등학교때부터 그토록 머리를 기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선우의 머리털은 수세미처럼 빳빳하고 머리통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길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자식이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기르게 둘 수가 없었다.

그 이유로 중학교 1학년때까지 짧게 아주 짧게 깎아 주었다.이마가 발랑 까지도록...
그렇게 어거지로 깎아주고 나서 나도 내 아버지처럼 중얼거리던 얘기를 그대로 했던 것이다.

"얼마나 보기 좋으냐. 예쁘기만 하잖아?"

그 아버지에 그 딸인지 내 어린시절 상고머리를 해놓으시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이 하도 뼈저려 무의식중에  내 머리에 박혀 있다 튀어나온 것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렇게 선우가 싫어했지만 내 눈에 보기 좋다는 이유로 나 또한 유전적으로 그 짓을 했었다.

그러다 한 젬마 님의 책표지를 보고 내 어린시절 상고머리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 어린시절 기억이 마흔이 훨씬 넘어 기억났지만 진저리쳐짐은 달라지지 않았음에 또 한번 놀랐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다시는 아이들이 싫어하는 머리형은 내 고집대로 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
엄마의 상고머리의 아픔을...

그리고 앞으로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머리를 하되 정도가 지나쳐 보여 엄마가 테클을 걸면 그 정도는 들어달라고...

선우가 말한다.
짧은 머리가 정말 싫었다고...
엄마에게 말해봤자 먹히지도 않아 어쩔 수 없었지만 정말 싫었다고...

모르면 몰라도 선우 역시 내 상고머리의 아픔 정도는 되었던 모양이다.
어찌나 얼굴이 뜨겁던지...
저도 그만큼 어려서 당했으면 지 아이에게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거늘...

선우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도 경험했지만 정말 싫었을텐데 미안하다고...

내가 상고머리 세대였다는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에 선우에게 죽 계속 되었을 그 머리의 서러움(?)을 중단할 수 있었다.
추억이란 거울과 같은 역할도 하지만 채찍과 같은 역할도 하는 것을...

추억으로 인해 마음 짠한 날은 추억으로 풀어야 한다.

그 옛날, 7살까지 시골살 때, 할머니는 때만 되면 다식판을 닦으시고 송화다식도 만들어 주시고, 솥뚜껑을 두집어 놓고 예쁜 화전도 부쳐주셨다.
또 다양한 무늬의 절편도 찍어주셨다.
색색의 다식은 우리의 주전부리였다.

그뿐인가.
겨울이면 조청을 고아 하얀 가래떡에 묻혀 주셨다.
엿도 만들어 주신 덕에 우린 엿치기를 자주 하여 내기를 했던 기억이 삼삼하다.

모든 것이 풍족하여 어려움이 없었던 나의 7살까지의 어린시절...
이젠 모든 것이 추억의 주머니에 차곡히 들어앉아 한 줌씩 꺼내볼 때마다 미소짓게 한다.

모든 것이 어제의 일인듯 내 눈앞을 알짱거린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안나돌리
    '07.5.24 6:32 PM

    소피아님..오랫만이시네요~
    잘 지내시죠?

    저도 상고머리입니다.
    지난 겨울에 머리좀 기르고
    우아하게(?) 퍼머좀 했더만
    남정네들이(?) 여간 보기 싫어해서
    또 다시 상고머리 커트로 바꾸었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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