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실에 함께 다니던 수산나님이 개인 사정으로
한동안 화실에 못 온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갈등을 했습니다.
공연한 일을 벌인 것이 아닌가
사실 더 급한 일도 많은데 하고요.
그런데 오늘 월요일이지만 멤버들의 사정으로
수업이 결강이 되는 바람에 조금 한가한 오전을 보내다가
몸이 무거운 느낌이라서 마두도서관에 반납할 책과
카메라를 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마침 휴일이라서 그냥 반납기에 책을 넣기만 하고
정발산에 오를까,아니면 버스를 타고 (시간이 모자라는 관계로) 호수공원에 갈까 망서리다가
이왕이면 호수공원의 가을을 담아보고 싶어서
버스를 탔지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지만 이상하게 처음 택한 코스에서
제 고민을 날려버리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뒷모습으로도 상당한 연세일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옆에서 같은 연배의 분이 뭐라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네요.

일단 뒤에서 한 장 찍은 다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가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그러구려
아주 선선하게 대답을 하시길래


이렇게 담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냥 돌아서기 아쉬워서 말을 걸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림을 그리셨나요?
그렇게 운을 떼자 한 사람의 인생이 줄줄이
실타래처럼 흘러나오네요.
그림이 그리고 싶었지만 네 아이를 키우느라
시간이 없었던 그녀는
60살이 넘어서 시작을 했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혼자서 드로잉를 했었는데
그렇게 계속 쌓이는 종이를 보더니
며느리와 딸들이 수업을 받아보시라고 권하더래요.
그래서 아이들이 주로 가는 화실에 가서 부탁을 했더니
난색을 표하길래 이리 저리 수소문해서 한 일년정도
수업을 받았다고요.
그리곤 사정이 생겨서 다시 혼자서 십년정도 그림을 그린 다음
칠순잔치 대신 자식들이 개인전 전시를 열어주었고
그 소식을 들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루는 바람에
한동안 여기 저기 인터뷰하느라 바빴노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표정이 수줍어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빛이
역력합니다.
지금은 혼자 사시는데 아파트의 두 방을 그림 그리는 방과
그림 보관하는 방으로 쓰고 있으며
복지관에 등록하여 다른 사람들은 수채화를 하지만
에전부터 유화를 해 온 덕분에 혼자서 유화를 계속하고
있다고 하네요.
토요화가들의 모임에도 나가서 함께 습작을 하고 있는데
그림을 그리는 일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다고요
그러니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진짜 화가가 될 수 있었으려만 하는 아쉬움도 있다고 하시네요.
옆에 계시던 분은 친구분인가 하고 물었더니
복지관에서 만난 사이라고 합니다.
제가 마침 화실을 계속 다녀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하니
대뜸 수채화를 하신다는 그 분이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막막하던 것
그러다가 차츰 보는 눈도 생기고
어느 날 스케치가 잘 되면 얼마나 살 맛 나는지 모른다고요.
옆 사람의 가족들은 늙어서 그림그리는 일을 잘 이해하고
북돋아주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 늙어서
왜 편하게 살지 잘 그리지도 못하는 그림그린다고 하는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가족들도 물론 있다고
지금 젊은 나이니까 마음 단단히 먹고 계속 해보라고
충고해주시더라고요.
갑자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인연인가
사실 두 시에 한의원 예약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들러본
호수공원
한의원 예약은 날라가버렸지만
제겐 참 소중한 만남이 있었지요.
그래서 전화번호랑 할머니의 성함을 적어달라고
부탁을 하고 언젠가 사시는 곳에 가서
그림을 보아도 되는가고 물었더니 환영한다고 하시네요.
그렇게 물어보게 된 것도 제겐 대단한 발전인 셈인가요?

인사를 하고 돌아나서는 길
마음속이 갑자기 환해지는 기분입니다.
그런데 조금 걸어가는 중에 음악소리가 나네요.
누가 이런 곳에서 연주를 하나 하고 들여다보니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보면대에 악보를 놓고
아주 열심히 연습을 하고 계시네요.
저 말고도 소리에 이끌려 구경하러 오신 분들이 여럿 있었는데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일부러 비켜주시고
나도 저런 악기를 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소리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오늘의 호수공원
바람도 좋았고 경치도 새롭게 만난 꽃들도 아름다웠지만
역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감탄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