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글도 좋았지만 저는 새롭게 임옥상이란 화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된 것도 좋았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도서관 홈페이지에 쓴 글인데요
함께 읽어볼래요?
어제 디브이디를 반납하러 갔다가
혹시나 하고 책을 꽂아 놓은 서가쪽으로 가보았습니다.
새로 들어온 신간이 있나 해서요.
늘 보던 책 사이에 숨어 있는 두 권을 만났습니다.
하나는 읽고 싶었던 제목이라 금방 눈에 들어왔는데
이윤기님의 시간의 눈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책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뽑아 든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입니다.
도서관에 와서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을 먼저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속의 사연들이 눈물을 자극하는 것들이
많아서 반쯤 읽다가 책을 바꾸었지요.
시간의 눈금을 읽던 중 이윤기님이 터키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화가 임옥상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길게 했더군요.
그러면서 소개한 그의 작품 두 점이 제 마음을 상당히
강렬하게 움직여서
어제 밤 집에 와서 그림을 보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도 처음 하게 되는 일이 민중미술가라는 타이틀을 지고
살던 임옥상과는 달라진 느낌의 후기 그림들을 먼저 보아서인지
어떤 변화를 겪었나 궁금해서 그에 관한 글들을 찾아서
읽어보게 되었지요.
그 중 하나가 한겨레21의 인터뷰 기사인데
다른 사람들도 한 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복사해서 올려봅니다.
거리에서 온몸으로 느끼는 예술과 인생의 의미… 제도권 대신 가난한 자유가 좋다
(사진/아트 피디 임옥상)
그는 사연 많은 과부마냥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둡시다” 했다. “날 자꾸 옛날 전력을 걸어서 얘기하지 말고 지금 내가 뭘 생각하는지, 어떤 비전을 가지고 걸어가고 있는지, 그걸 좀 봐주세요” 부탁했다. 얼추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 나이건만 정색하곤 “지금 내가 움직여가는 것, 그게 바로 나다”라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흔히 그 이름 석자 앞에 붙었던 화가 대신에 아트 피디라 불러달라는 속내를 털어놓으며 “난 지금 삶과 예술의 중심을 옮기고 있어요. 거기서 미술이 뭐냐, 인생이 뭐냐는 답을 구할 작정이요”라고 했다.
이제는 아트 피디가 된 화가 임옥상(49)씨는 80년대 화단에서 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민중미술 1세대였다. 또래 그룹이었던 ‘현실과 발언’ 동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잘 나갔던 그는 전시를 열었다 하면 늘 화제였고, 상업화랑과도 호흡을 맞출 줄 아는 현실파였으며, 일찌감치 대학에 교수로 자리도 잡았던, 행운을 몰고 다니던 사나이였다. 50m에 달하는 ‘아프리카 현대사’를 발표해 전시장이 장사진을 이루거나, 호암갤러리가 사십 갓 넘은 그를 초대해 전시회를 열어주는 사건의 연속 속에서 그는 늘 숨가빠 보였고 앞으로 내달릴 채비만 차리는 속도경주 선수 같았다. 그러던 그가 그건 다 옛일로 하자고,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봐달라고 말하는 것이다.
갯벌과 지뢰, 그리고 예술가의 숙명
“‘현실과 발언’ 활동을 하며 우리 미술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찾아냈는데 그때는 독재 권력에 맞붙어 싸우느라 이것저것 돌아볼 여유가 없었어요. 말로만 떠들고 관념으로만 짚은 척, 실천을 못한 거지. 90년대 들어서면서는 엉거주춤 감을 못 잡겠드라고.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 없어 전주대학 교수 자리를 내놓고 밀도있는 전업작가가 되려고 뉴욕 갈 준비를 했어요. 세계 화단으로 뛰자는 생각이었죠. 우리가 언제까지 서구 미술 수입국만 할 건가, 한번 수출국으로 만들어보자. 그게 얼마나 부질없는 생각이었는지.”
세계 화단이란델 나가보니 작품 질과 별개로 유통 시스템이 움직이고 있었고 유색인종은 원천적으로 그 시장에 발을 붙일 수가 없게 돼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란 그물망 속에 철저하게 편입돼 있는 세계 미술시장 실상을 보고 진저리를 쳤고, 그 먹이사슬엔 제 몫이 없음을 알아챘다. 사방이 어두웠고 그는 흔들렸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근데 이제는 두루 다 잘 보이는 거예요. 오십줄로 접어드는데, 제일 농익은 시절이라는데, 난 지금 뭘 하구 있나. 화실에 들어앉아 있는 건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는 것 아닐까, 미술 역시도 소외시키는 거고. 결국 전시장이란 게 감옥이고 액자는 족쇄 아닌가. 그걸 팔아 밥을 먹는다는 것, 제도권이 죄다 여기에 매달려 있는데 나도 이 지점에서 이렇게 한통속으로 뭉개져야 하는가. 캔버스에 붓으로 그리는 것만 그림일까… 꼬리를 무는 질문을 좇아 집도 절도 없이 떠돌고 있어요.”
평창동 언덕배기 임옥상미술연구소에서 만난 그는 “좀더 가난한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 돈 되는 일을 버리고 속 편하게 제자들과 찬없는 밥을 해먹으며 살고 있었다. “건강에 자신없으면 이런 일 못하지”란 자신만만한 몸 하나로 버티는 요즈음 그에겐 세상 모든 거리가 다 캔버스요, 천하 만물이 다 그림 도구다. 하다못해 질척질척 갯벌도 그가 걸어들어가 보듬어야 할 작품이다. 화가 시절부터 땅을 많이 그렸던 그가 땅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고향을 찾아가는 일과도 같다.
“갯벌살리기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고 새만금 갯벌 살리기 답사를 가거나 간척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는 게 내겐 그림을 그리는 일과 똑같아요. 내가 흙을 그리듯이 갯벌을 찾아가 땅이 건강하라고 몸짓으로 힘을 보태주는 거지요. 난 지뢰문제에도 관심이 많은데 지뢰만 생각하면 꼭 내 몸에 폭탄이 박혀 있는 것처럼 온몸이 아파요. 내년쯤 가질 전시회 주제는 자연스레 갯벌과 지뢰로 벌써 결정났어요.”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나 환경운동연합 같은 데 열심인 까닭을 그는 예술가 숙명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가 변했다면 누구보다 먼저 그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 양상을 형상화해야 하는 게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난 6월20일부터 두어번 쉰 외엔 일요일마다 인사동 거리에서 꼬박꼬박 이어온 ‘임옥상의 당신도 예술가’는 이렇게 변해가는 한국사회에 “벽없는 미술관”을 일구려는 그 나름의 실천이다. 일요일이면 차없는 거리가 되는 인사동 길바닥에 큼지막한 판을 벌이고 오가는 이 모두에게 스스로 화가가 되어보는 기회를 주는 이 그림잔치는 열번을 넘기면서 단골 손님이 생길 만큼 지역 명물이 되었다.
“처음엔 시건방지게 내가 그들에게 뭔가 주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너무 큰 걸 받아 은혜받은 느낌입니다. 숨쉬는 거리라는 매체가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캔버스인지…. 상상도 못했던 재료를 수도 없이 발견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은 만나며 삶이 지닌 다양한 결과 폭을 만지는 기쁨은 내게 미술이란 뭔가를 다시 돌아보게 해줬습니다.”
"너 뭐하냐? 완전히 미쳤군!"
첫날 거리에 나섰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아는 선배가 지나다가 “너 뭐하냐. 얘가 완전히 미쳤군” 한마디 해준 게 유일한 참견이라면 참견이었다. ‘그래도 내가 임옥상인데…’ 했지만 아무도 알아봐주는 이가 없었고, 화랑에 가져다놓으면 ‘작품’이 되고 ‘거금’이 되는 사인된 스케치를 앞에 놓고 5천원이 팔고 있자니 귀걸이, 코걸이를 파는 여느 좌판쟁이 신세와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스타 좋아하네, 까불지마라’ 말없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쓰린 속을 가다듬으며 “미술이 바로 요 위치에 있구나” 깨달았다.
“판만 만들어주고 여러분도 그리세요, 했더니 쭈뼛쭈뼛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한번 달려들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거예요.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만지는 것 같은 문화 행위에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가를 확실하게 알았어요. 차없는 거리가 늘어나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내가 휘두를 캔버스가 사방팔방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셈이죠. 꿈이 있다면 그런 거리미술이 서로 이동해 섞이고, 거리미술가들이 앞다퉈 거리를 작품으로 메워주는 거예요. 사람들 누구나가 모두 시간 날 때 거리로 나서 그림을 그린다면, 난 화가보다 아트 피디로 더 행복할 것 같아요. 개똥철학 같아요?”
사진 박승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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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소개하는 싸이트에서 찾은 그림들입니다.
우선 13회까지의 개인전에서 저는 거꾸로 보았는데요
13회 전시에 나온 제주도의 오름을 그린 것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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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의 흔적을 찾아갔다가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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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의 제목은 american dream이네요.
기법에는 종이부조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그림을 볼 때 이 작업을 어떻게 한 것일까를
유심히 보게 되네요.
13회 전시의 나머지 작품들은 매향리 폭탄 잔해물로 만들거나
고철,혹은 스픈이나 포크로 만든 작품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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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의 사이에 놓인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그런 작업들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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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스푼,포크,나이프로만 만든 것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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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도 동일한 소재를 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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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눈금에서 소개된 작업은 바로 이것인데요
이상하게 눈길을 끌어서 자꾸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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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이 양이 상당히 많아서
상당히 여러 날 걸려서 꼼꼼하게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제 오늘 임옥상의 그림과 더불어
함께 들은 음반은 임의진 목사님의 여행자의 노래인데요
그가 좋아하는 곡들을 선곡하여 만든 음반이라고 합니다.
여러 번 돌려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마음에 스미어 오는 곡들이 귀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음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