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었던 날은 눈물과 탄식과 한숨으로 점철된 날들이었다.
기울어 가던 부농의 9남 1녀 가운데 7남으로 태어난 나는
평생 농사일이라는 것을 해본적이 없으신 무뚝뚝하고 권위만 가득하셨던 아버지와
끼니를 잇기에도 바쁘셨던 어머니에게서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랐다.
형들은 일찌기 공부한다고 모두 서울로 가고
깊은 산골마을에서 어린 동생들과 남아 농사일과 집안 일을 거들어야 했던 내게
누구 한 사람 도움말이나 인생을 깨우쳐준 사람이 없었다.
자고 나면 농사일과 집안일에 치여 참으로 가난하고 외로웠던 시절이었지만 특별한 꿈도 욕심도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늦은 사춘기를 맞으면서 삶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공무원시험 준비를 시작해 어렵지 않게 합격하면서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전봇대 만드는 공장, 연탄공장에서 막노동도 해보고 거리에서 노점도 해봤다.
소위 고시라는 공부를 하는 동안 영장이 나와 35개월 동안 군대생활을 했다.
제대하고 바로 서울시 동사무소와 은평우체국에 발령이 나서 동사무소에 근무를 시작했지만
태어나고 처음 시작한 도시에서의 사회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몇 년 안 되어서 그만두고 오랜 방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잘 곳이 없어 허름한 아파트 계단에서도 자고 공원 벤치에서 자고 공중화장실에서도 자는 날들이 이어졌다.
물 한 그릇, 빵 한 개 주는 사람이 없던 시절
오라는 사람도 갈 곳도 없이 방황으로 보내던 그 시절에
누군가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리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게 그런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절망스럽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도 태어났다.
그리고 도시생활을 접고 지금 살고 있는 해남으로 이주해
수 년의 수고와 노력 끝에
남 부럽지 않은 기반과 안정을 갖추어 갈 무렵
건국후 최대 국난이라던 I.M.F 사태의 직격탄을 맞아 파산 직전까지 이르렀다.
어렵게 사태를 진정시켜 방송을 타고 백화점에 고정 납품을 해가면서
생애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던 시절인 1999년과 2001년
거푸 태풍이 정통으로 쓸고 가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파산
은행 계좌가 정지되고 토지가 업류되어 경매로 넘어가면서
빚더미에 앉아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 후로 삶은 사는 것이 아니었다.
그 긴 어둠의 끝자락에서
내게 회생의 빛을 비추어준 곳이 82쿡이라는 주부들 요리사이트였다.
2008년 가을
농약을 하지 않아
매일 아침 저녁으로 벌레를 잡아가면서 재배했던 겨울배추를
처분하지 못해 고민하던 2009년 1~2월에
절임배추를 해서 팔게 해준 곳이 82쿡이었다.
절임배추를 처음 해보는 것이어서 많이 서툴고 어설펐지만
그럼에도 많은 회원분들의 도움으로 회생의 기반을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그 후로도 고생을 전혀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오늘까지 지내왔다.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가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를 휩쓸면서
그동안 여느 나라들보다 우리나라가 심각한 어려움을 거쳐왔고
어려움에 고통하는 시민들이 많다는 사실들이
연일 신문과 방송을 장식하고는 한다.
오늘 아침도 잠에서 깨어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가
요즘 내가 너무 안이하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소 돈이란
내가 아닌 여러 사람의 유익을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내가
잠시 자신을 잊고 미몽에 빠져
내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을 잊고
해외입양 동포 마스크후원을 위한 모금을 하겠다고 나섰던 자만심이
많이부끄럽고 미안했다.
그래서 그동안 무심하게 잊고 지냈던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통화를 하는 동안 말없이 흐느낌을 들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게 지냈으면 그렇까 하는 안타까움에
가슴이 울컥하고 짠해지면서 내 무심했슴이 너무 미안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도 살피지 못하면서 해외동포들이라니
주제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넘어도 한참 넘었다.
2009년 2월 말
절임배추 작업이 끝나갈 무렵
이왕 시작했으니
여기서 그치지 말고 카페를 개설해
다른농산물도 함께 판매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아이템을 제시해준 회원이 있었다.
그리고 행여 용기를 잃지 않도록 꾸준히 격려를 해주었던
고마운 회원이 있었다.
그 때 약속하기를
내가 무엇을 심고 가꾸든
첫 물을 맛보게 해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을 하기 전까지 잘 지켜왔었는데
수술을 하고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었다.
먼데 있는 사람을 생각하기전에
먼제 가까운 사람을 생각하고
도움을 받았던 고마운 사람을 챙기기로.
내가 장터에서 판매를 하는 동안
도움을 받았던 분들 가운데
혹 지금 사정이 어려워 절망적인 분이 있어 연락주시면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제 능력 안에서 작은 것이라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지독하게 추웠던 한 겨울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황토밭에서 배추를 따서 리어카에 싣고
발등까지 빠지는 진흙을 혼자서 리어카를 끌면서
한 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악물고
구르지 않는 리어카를 죽을 힘을 다해 간신히 끌어서
밤을 새워 배추를 절여서 보내기도 했었다.
사람이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이고 어려울 때는
누군가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주거나 조금만 부축을 해주어도
그 어려운 처지를 이기고 바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를
서로 손을 잡아 주고 부축을 해주면서 함께 갈 수 있다면
보다 나은 길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