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쿡의 게시판운영에 대해 언급한 제 글로 약간의 논란이 있었는데
신입회원으로서 기존회원과 마찰을 일으키는 등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길 원하지 않고
82쿡에 가입한 이유가 82쿡에 대해 이렇쿵저렇쿵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교육이나 삶의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주목적이므로 더이상 확대하지 않겠습니다.
신입회원 이쁘게 봐주세용....^^
전에 제가 썼던 글인데 한번 생각볼 만할 겁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을 것이라 생각이 드는데
이런 자녀교육방식도 있으니 참고적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어제 무릎팍도사에 나온 이외수 소설가의 자녀교육방식도 참 재밌었는데 아래글의 방식과
공통점이 있는 듯 합니다.
제가 귀농을 위해 시골체험을 하고자 5개월동안 강원도 삼척의 한 오지에 살 때 있었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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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로부터 배우기(어른이 아이로부터 배우기)"
시내라는 아이가 있습니다. 시내는 삼무곡이란 강원도 삼척의 오지에 사시는 김종률 목사님의 10살된 딸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나이이지만 작년 1학기까지만 학교를 다녔다가 학교에 가고싶지 않다는 시내의 의견을 부모님이 존중해 2학기부터는 학교를 다니지 않습니다. 학교를 가지 않으면 보통 홈스쿨링을 하는데 제가 있을 당시에는 특별한 교육프로그램이 없는 걸로 기억합니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민 자녀를 방치한 것이고 긍정적으로 말하자만 네맘껏 놀라는 자유를 준 것입니다.
김종률 목사님이 매일 등산 겸 산책을 시내와 하기로 약속한 것 같은데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내는 주로 집에서 놀며 TV를 많이 보는 편입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이에게 마냥껏 놀라는 자유를 주면 방콕하며 TV와 컴퓨터하고만 놀게 된다는 것 말입니다. 인터넷접속이 쉽지 않는 컴퓨터밖에 없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시내는 다른 아이들처럼 게임에 빠지는 일은 없습니다.
시내를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홈스쿨링이라도 열심히 해야되는 것이 부모의 의무가 아니냐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지 모릅니다. 그러면 김종률 목사님의 자녀교육 방법을 한번 보시죠. 그 방법을 이해하려면 혁명적인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목사님은 아이를 어른보다 영적으로 진화된 존재로 봅니다. 그러면 어른들이 하는 교육이란 것들이 아이들의 영적 진화를 방해하거나 오히려 퇴화시킨다고 봐야 할까요?
(참고: 목사님은 일반적인 기독교적 영성과는 차이가 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 삼무곡자연예술학교라는 대안학교를 운영하고 계십니다.)
목사님은 가능하면 시내에게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시내의 어떤 선택이든지 인정하려 합니다. 시내의 선택을 부정하거나 통제한다는 것은 그 선택이 목사님 자신에게 미칠 영향을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방지하는 차원에서 시내에게 두려움을 심어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알다시피 어른이야 두려워할 것이 많지만 사회적학습을 받지 않은 아이에게는 두려워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영적으로 진화된 존재에게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어른보다 아이를 진화된 존재로 보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진화된 깨달은 자에게는 옭고 그름의 판단 자체가 없겠지요.
시내는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두려워하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고 깜깜한 곳에 홀로 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에 근거한 교육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시내를 데리고 가게에 가서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면, 가지고 싶은 것들을 욕심껏 집어 한아름 껴안고 나오는 보통의 아이들과 달리 시내는 원하는 것 하나만 가지고 나온다고 합니다. 마음대로 하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늘 통제하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알려주는 예입니다.
목사님은 시내가 하루종일 TV를 보는 것에 대해서 제지하지 않습니다. 맘대로 TV를 보게 하면 시내가 TV에 푹 빠져 있을 때도 있지만 지겨우면 알아서 다른 놀이로 넘어가 그것에 푹 빠집니다. 목사님에게는 시내가 하나에만 빠지지 않고 다양한 선택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율적 선택권을 가진 자는 한곳에 집착하지 않는 법입니다.
쭉 얘기를 들으시고 일면 이해를 해도 마구마구 의문이 떠오르고 안티를 하고 싶죠? 여러분들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쓰는 글이 아니라 이런 길도 있다는 것을 귀뜸해주고 싶어 쓰는 글입니다.
시내의 교육방식에 대해 친구들한테 얘기를 하니 누군가 이런 반응을 하더군요. 동네아이들이 거의 없는 시골에서 학교를 안 보내면 친구들이 거의 없을 것이고 보통 아이들과 달리 사회경험을 많이 하지 못할 텐데 나중에 시내가 커서 이걸 문제삼으며 항변하면 어떻게 할거냐는 걱정이 담긴 의견을 말했습니다. 혹시라도 그럴 일이 발생하면 목사님은 이런 답을 하지 않을까요?
시내야, 내가 너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게 아니란다. 네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아빠와 엄마에게 얘기를 했고 우리는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 네 의견을 존중해 결정한 것이란다. 그 이후에도 네 결정을 네가 번복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으나 너는 그러지 않았어. 그러므로 그 결정에 대한 책임은 네가 져야 해. 그리고 친구들이 없다고 너무 아쉬워할 것 없어. 학교친구들만 친구가 아니란다. 그간 시내와 어울리며 놀았던 친구들이 얼마나 많아? 꼬리를 살살 치는 바다와 막둥이(강아지들)도 친구였고, 단감을 따먹는 까마귀도 친구였고, 호호 불면 환상적으로 날아가는 민들레도 친구였고, 그림물감으로 예쁘게 색칠했던 바닷가 돌멩이도 친구였잖아? 시내는 그 친구들을 정말 예뻐했잖아?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다양한 경험을 지금이라도 하고 싶다면 아빠와 엄마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줄 수 있어. 그렇다고해서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아이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 보습학원, 조기유학까지 보내며 아이를 숨돌릴 새 없이 구속하는 다른 아빠엄마들과 같이 되고 싶지 않았어. 그걸 너도 이해할 수 있겠지? 아이때는 아이답게 자연에서 맘대로 노는 게 최고야. 지금은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서 네 자신이 많은 면이 부족해 보이는 듯하지만 곧 너는 많은 걸 누리며 살았고 앞으로 살아갈 것이란 걸 깨닫게 될 거야.
삼무곡에서 제가 시내와 노는 방식은 단계별로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내와 놀아주기 -> 시내와 재밌게 놀기 -> 시내로부터 배우기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시내가 다가와서 자꾸 놀아달라고 졸라대면 잠깐만 놀아주면 더이상 귀찮게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으로 놀아주곤 했습니다. 물론 그런 놀이는 재미가 없기도 하고 하루이틀 시내를 만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놀이에 대한 제 관점을 바꾸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시내수준에서 놀기도 하고 오히려 놀이방법을 창안하여 시내를 놀이에 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영적으로 진화된 존재인 시내로부터 배운다는 목사님의 얘기를 듣고 저도 시내로부터 배우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제 교만때문에 많은 배움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저와 많은 나이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는 저에게 반말을 할 뿐만 아니라 야, 너라고 부릅니다. 목사님댁에서 사는 개들중에 시내는 진돗개 바다를 가장 이뻐했습니다. 목사님댁에서 제가 바다를 데리고 갈 때 시내가 많이 아쉬워했습니다. 바다를 제 집에 데려다 놓고 목사님댁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시내는 줄곧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듯이 야 너하며 바다를 잘 키워야 되, 때리면 가만히 안놔둔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속에서 울컥했습니다. 조그만 놈이 윗사람에게 함부로 말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잘 키우겠다는 말로 답했습니다. 그 당시에 바다를 한낱 동물로 여기지 말고 정말 사랑으로 키우라는 신의 메세지를 시내가 대신 전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시내가 야, 너라고 불러도 아무런 제지없이 그냥 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부르면 안되냐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내를 보면서 당연히 받아들였던 사람간의 높낮이를 다시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내는 또래의 도시 아이들과 같은 영악한 면이 없습니다. 어떨 때 보면 정말 순진합니다. 그래서 골려주기도 쉽습니다.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힘든 세상을 살아갈까요? 네 잘 살아갈 것 같습니다. 영악한 것 보다는 순진한 게 백번 좋습니다. 그리고 시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예의같은 것은 별로 없지만 쉽게 친해지고 쉽게 이별합니다. 만남에서 쿨한 것이지요. 도시에서 놀러온 이모들과 며칠 함께 놀면 정이 많이 들어 헤어지기 쉽지 않을텐데 가볍게 안녕 인사하고 자기 놀 것 찾으로 갑니다. 오히려 아쉬운 건 이모쪽이지요. 사람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 또한 억압적이지 않는 교육방식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가 어른보다 영적으로 진화된 존재라는 사실을 저는 전적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종률 목사님 가족들을 보면서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라는 생각은 듭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로부터 배운다는 자녀교육관 정말 가능할까요? 정말 괜찮을까요?
행복은 나에게 덧입혀진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궁극적으로 나와 내것이 분리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합니다. 또한 원래부터 우리는 깨달은 존재였으나 세상 살면서 수많은 관념들로 덧입혀져 그걸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것 그리고 이제 어른이 아이로부터 배워야 된다는 의미를 이 말들에서 찾아보면 어떨까요?
이런글 저런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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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녀교육 어떤가요? : 어른이 아이로부터 배우기
오래된미래 |
조회수 : 904 |
추천수 : 10
작성일 : 2008-06-19 19:12:20

- [이런글 저런질문] 이런 자녀교육 어떤가요.. 20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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