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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교육

내 아이를 더 밝고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정보교환과 질문의 장

늦되는 아이

| 조회수 : 2,832 | 추천수 : 147
작성일 : 2009-11-06 23:09:38
아이 넷 중에서 둘째가 유난히도 말이 늦게 트였다. 만 세돌이 지나서도 아빠 (이 아이는 독특하게도 아빠 소리를 먼저 했다), 엄마, 맘마, 이거, 저거 등의 기본적인 단어 외에는 도무지 할 줄 아는 말이 없어 보였다.

걱정이 된 나머지 언어 발달 전문의에게 데려 갔더니 아마도 언니가 있어서 자기가 길게 말을 하지 않아도 언니가 다 알아서 해주니까 특별히 말을 해야겠다는 절실함이 없어서일 거라며 흔한 증상이라고 했다. 그 날부터 큰 아이와 남편에게 둘째가 제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아무리 알아들어도 대꾸하지 말고 뭘 갖다주지도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아이의 말은 쉽사리 늘지를 않았다. 큰 아이가 유난히 말이 빨리 트여서 비교가 되어 더 걱정스럽기도 했다.

동생때문에 애태우는 엄마가 너무나 딱해 보였던지 어느날 큰 아이가 제 동화책 한권을 들고 나오더니 "엄마, 이것 좀 봐. 얘도 우리 은선이 같은가 봐," 하며 나를 위로하려고 했다. 여섯 살짜리 아이의 눈에 비친 엄마와 동생의 줄다리기가 제 동화책에 나오는 안달장이 사자 가족과 다를 바가 없었나 보다.

"Leo, the Late Bloomer(늦되는 아이 레오)" 라는 제목의 이 책은 우리 둘째처럼 다른 아이보다 뒤늦게 발달하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다. 밥도 지저분하게 흘리고 먹고 말도 잘 못 하고 글도 못 읽는 레오때문에 아빠는 걱정이 많지만 너무 관심이 집중되면 오히려 더 늦어진다는 엄마의 말에 내색을 안 하려고 애를 쓴다. 다른 아이보다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아도 못 본척하며 아무 일도 아닌 듯이 레오를 격려하는 사자 엄마 아빠의 모습이 어른인 내게도 눈물 겨울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레오는 말도 잘 하게 되고 글도 문제 없이 읽고 밥도 흘리지 않고 먹는 아이가 되었더라는 단순하고 결과가 뻔한 이야기이지만 뻔한 결과를 알면서도 조바심을 내는 어른들을 꼬집는 교훈이 있다. 언젠가는 다 잘 될 것이지만 그 언젠가를 믿고 기다리기 위한 인내심이 날마다 부족한 것이 그 당시 나의 모습이었다.

둘째에게 이 책을 읽어주면서 "너도 언젠가는 글도 읽고 말도 잘 하게 될거야"라고 얘기하면서도 도대체 그 언젠가가 언제 오나에 반신 반의를 했다. 9월이 되어 만 세돌 반이 지나면서 유아원에 입학해서도 아이는 말이 서툴렀고 나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있었다. 날마다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주고...남들도 다 하는 일과만으로 이 아이에게 획기적인 변화가 정말 생겨날까, 이게 무슨 큰 장애인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눈물을 지은 적도 많았다. 주변을 보면서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이 어른 뺨치게 말이 영글은 것을 볼 때마다 내 아이와 비교가 되어 불안하기만 했다.

네 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큰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고 있었는데 한쪽 구석에서 책 한 권을 들고 우물우물 읽는 시늉을 하는 둘째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뭘 하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자기 책을 본다고 했다. 그 긴 문장을 단번에 말로 한 것도 놀라울 지경인데 책을 읽는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설마 하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쉬지도 않고 줄줄 다 읽어낸다. 한번도 막히지 않고 읽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아마 하도 많이 봐서 외웠나 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른 책을 주고 또 다른 책을 주고..몇 권을 주었는데도 거침없이 다 읽는 것이었다. 큰 아이에게 도대체 얘가 언제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는지 아냐고 물어도 모르겠다고 하고, 내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말이 어설픈 아이라 알파벳 한번 제대로 가르친 일이 없었다.

언니가 공부할 때 어깨 너머로 글을 읽히고 말 할 필요가 없어서 말을 안 하고 지냈던 둘째가 지금은 제발 5 분만 말하지 말고 조용히 해달라는 엄마의 애원을 들으며 자라고 있다. 독서량은 얼마나 많은지 영문학을 전공한 엄마도 따라갈 수가 없을 만큼 글자가 있는 것은 다 읽어내는 책벌레이고, 연극에 몰두해서 극본과 연기에도 관심이 있다. 그렇게도 말을 못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던 일이 언제였던지 아득한 기억이 되었다. 엄마를 따라해보라고 날마다 아이를 괴롭혔던 일들을 생각하면 기다리는 일에 미숙한 엄마의 불찰이 미안하기만 하다.

누구나 자기만의 속도가 있다. 더불어 자신만의 특별한 영역이 있다. 미국의 많은 학교들은 'Gifted Education(영재교육)'의 의마를 우리와 다르게 해석한다. 어린 아이들에게 조기 교육을 시켜서 아이의 숨겨진 재능을 계발시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다 영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즉 아이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분야에 재능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느 분야인지를 잘 찾아내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학업에 열중하여 공부만 잘 하는 아이만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체능은 물론이고 지도력, 사려깊음, 사회봉사능력, 정리 정돈을 잘 하는 능력,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능력, 논리 정연한 발표력, 손재주 등 무엇이든 남보다 뛰어나게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계발시켜주어야 한다. 각 학교 졸업식에서도 학과 성적 우수상보다는 지역사회봉사상의 상장과 상품이 훨씬 값지고 상의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대학 입시에서도 학업성적 만으로는 명문 대학에 입학하기가 어렵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부모나 내 자식이 '일류'의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학교를 나와 최고의 직장에 취직하고 최고의 배우자를 만나 최고의 삶을 누리는 것이 모든 부모들의 평생 소원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바램인가는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세대의 부모들도 우리 전 세대의 부모들의 비현실적인 바램의 희생자인지도 모른다.

시대가 변해도 부모들의 일류병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도 그게 쉽지 않기에 씁쓸한 마음이 든다. 내 자신이 최고의 일류 인생을 살지 못하듯이 '어쩌면' 나의 아이들도 2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결코 자포자기도 아니고 열등감도 아닌 건강한 현실감각이다. 또한 2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절대로 세상이 끝날 일이 아니라 나의 능력과 한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감사하는 자족의 바탕이 된다.

내가 만들어내고 싶은 아이와 실제의 내 아이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지금 내 곁에 앉아 엄마의 모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따르는 이 아이들의 부족한 면을 거부의 몸짓 없이 끌어 안고, 잘 하는 부분을 찾아내어 한없는 자랑스러움으로 칭찬해 주는 일이야 말로 부모라는 이름의 우리 모두가 같이 이루어야 할 임무일 것이다.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수로성맘
    '09.11.7 7:09 AM

    전 이번학년에 아이의 학교에서 영어동화 읽어주는 봉사를 하였어요.
    그때 접했던 책이 바로 Leo, late bloomer란 책이었죠.
    읽어주기 전에 제가 먼저 읽어봐야 하니 한번 훑어보자란 생각으로 책을 들었다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무...아무...특별한 감동스토리가 아닌데도 말이죠.
    요즘 저의 아이를 보면 그 책을 잘 접했단 생각이 들어요.
    오늘 말씀해주신 것도 가슴에 새길게요. 항상 좋은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

  • 2. 동경미
    '09.11.7 2:39 PM

    수로성맘님,
    감사합니다.
    이 책 참 좋았지요. 저도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몰라요.
    아기 레오에게 눈치를 안주려고 서로 말리면서 기다려주던 엄마 아빠를 보면서 자책이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내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것이 참 쉽지 않아요.

  • 3. sinavro
    '09.11.8 3:42 AM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제가 자식 키워보니 책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 체력을 강건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 칭찬 많이 해 주시고 아이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세요. 그리고 절대 비교하지 마세요. 저는 아이 둘 인데 서로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달란트를 달리 타고 나는데 같을 수는 없는 것이죠.

    저의 아이가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아주 똑똑한 스위스 학생이 공부만 잘하는 한국학생을 인형이라고 언급했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도 없고 책도 안 읽는 것은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인형일 뿐이다라고요.

    스위스 학생은 박학다식하고 여러모로 뛰어나서 학교에서 선생님들 사이에서 유명하지만 학점은 3.7정도이거든요. 성적에만 연연해 하는 부모님과 학생들 둘 다 안된 것 같습니다.

    세계를 이끌어나갈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시스템 혁신이 필요한데 걱정입니다.

  • 4. 동경미
    '09.11.9 2:07 PM

    sinavro님,
    맞는 말슴이세요.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키워주는 것 이상의 재산이 없지요.
    전인교육이 참 중요한데 쉽지 않은 세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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