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딱 10년이 된 제 살림살이들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결혼할 때 엄마가 해주신 빨강파랑 띠 두른 "깨지지 않는 지겨움"의 그릇들도 여전하고
이런저런 사정들 때문에 변변하게 하나 바뀐 것 없는 부엌 살림살이들.
(그래서 더 애착이 가기도 하고, 무덤덤하기도 하고,
이곳에 올라오는 이쁜 그릇들, 살림살이들 볼 때 마다
솔직히 조금씩 쓸쓸해지기도 하고 그럽니다. ㅜ.ㅜ)
큰딸을 위해 미리미리 살뜰하게 챙겨 놓으셨다 저에게 주신 엄마의 마음 탓에
후라이팬 두어번 새로 바꾼 것 말고는 고만고만하게 잘 쓰고 지내는
낡고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이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새로 장만한 것은 없고 틈틈히 버리고만 산 것 같지만
그래도 저만의 소중한 보물들이 하나둘 늘어나 있더군요.
다름아닌, 혼자 갖는 茶 시간을 위한 살림 꾸러미들 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마시는 것에 돈 들이는 거 모으면 벌써 차 한대는 샀겠다" 라고요.
네.. 맞습니다. 저는 마시는 건 다 좋아라 합니다.
커피, 홍차, 녹차, 허브티, 와인, 쏘주, 맥주... 맹물까지...
그리고는 제 살이 모두 물살이라며 우깁니다. -.-a
제 나이 또래에는 다 비슷하겠지만
결혼할 무렵 신혼 집들이 선물로 커피메이커를 들이게 되었지요.
워낙 커피를 좋아하던 저였지만 젊은 시절엔 주로
자판기 커피나 자취방 커피는 늘 인스턴트였고
우짜다 들리게 되는 까페에서나 원두커피를 감질나게 맛보았었지요.
한창 유행이던 헤이즐넛 같은 향커피를 마시는 날이면
일기에도 적어 놓을 만치 중요한 추억이 되었던 때였으니
결혼과 함께 생긴 신혼 살림들 중 그 하얀 커피메이커를
저는 유난히 애지중지 했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제1호 보물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지금은 저에게 남아 있지 않는...
드립커피로 전향하고는 계속 부엌 장식품으로 먼지만 쌓이던 녀석을
좁아지는 부엌에 도저히 끌어 안고 살지 못해서
몇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버려졌습니다.
어딘가에서 다시 커피메이커의 커피맛을 보게 되면
나의 소중한 보물 1호였던 녀석이 더 많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후로 가까운 백화점 지하 마트에 봉다리 원두를 사러 들리는 일이 늘어갔고
원두를 커피를 내리기 전에 바로 갈아 마시면 더 맛있고 향이 짙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결국 세일 중이던 커피 코너에서 전동커피분쇄기를 사들고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년째 사용 중이군요.
크게 비싼 가격은 아니었고, 세일이라 많이 저렴했지만
그 당시 남편과 저는 아르바이트 수준으로 돈을 벌고 있을 때라
2-3번 걸음을 하며 엄청 망설이다가 사들고 왔었지요.
요즘은 모카포트로 커피를 주로 마시다 보니
꺼내서 쓰는 일도 거의 없어졌지만
갓 볶아서 집으로 보내온 커피를 바로 갈때의 그 향기는
수동으로 드르륵 거리며 가는 것 보다야 못하겠지만
아주 오래도록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중 하나입니다.
요 전동커피분쇄기가 저의 커피 살림 2호 였습니다.
그렇게 커피메이커와 분쇄기로 매일 행복한 커피타임을 즐기며 지내다
첫 아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길고 긴 수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임신하면서 부터 조바심 내며 마시는 커피는 싫어서 딱! 끊고 지냈었지요.
수유기간에도 그렇고...
그렇게 큰 아이 낳고 돌을 넘기고 나서 결혼 3주년이 되던 날.
무뚝뚝하고 살뜰하게 챙겨주는 면이 없는 갱상도컨츄리보이 남편이
내심 가장 반가운 백화점 상품권을 턱 하고 내밀었습니다.
그거 받고 바로 백화점으로 튀어 갔었지요.
계속 눈도장 찍어 두고 있던 사이폰 을 안아 오기 위해서 였습니다.

대학시절 방학 때나 가끔 들릴 수 있던 까페에서
800원짜리 원두커피를 시키면 내오던 사이폰에 동경을 늘 꿈 꾸고 있다가
결국엔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지요.
사실 다른 살림살이나 필요한 것들도 있었을텐데,
그 백화점 상품권도 쪼달리는 살림살이의 한쪼가리였을텐데,
그것을 공돈이 생긴 것 처럼 온통 저만을 위해 덥썩 사이폰을 샀던
무지막지 철 없던 새댁... ^^;;

하지만 지금껏 그때 저 사이폰을 샀던 걸 후회해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결혼생활의 구비구비를 넘을 때,
맥주 한캔 살 돈이 없이 멍하니 밤을 지새울 때 마다
냉동실 구석에 금붙이 마냥 꽁꽁 숨겨둔 원두를 갈아
이 사이폰에 불을 지피며 기도하듯 그렇게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그 앞에서 물이 끓을 때 까지 펑펑 눈물 쏟다가도
물이 끓으면 바짝 긴장해서 커피를 올리고 시간 맞춰 알콜램프를 끄고.
언제 울었느냐는 듯, 그렇게 만든 커피는 홀짝이며 다시 기운을 내곤 했었습니다.
그 힘으로 이렇게 10년이란 세월을 무사히 지켜왔습니다.

지금은 더 세련되고 좋은 사이폰도 많지만
슬금슬금 녹도 생기고 필터도 낡아서 커피 가루도 엄청 내려오는
나의 낡은 구닥다리 사이폰을 사랑합니다.
나의 가장 아픈 상처를 보듬어 주었던 비밀 친구 같은 녀석.
그 후로 어느날, 컴퓨터 속 세상을 거닐다 알게 된 갓 뽁은 커피와 드립의 세계.
봉다리 원두만 마시던 저에게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 같은 갓 뽁은 원두가 전해주던 그 커피 향과 맛이란!!!
저는 거의 뽕~ 에 취한 사람 처럼 빠져 들기 시작했습니다.

무리하게 스뎅 포트까지 구입하고 웹사이트 마다 돌아다니며
드립 방법에 대해 공부도 해가면서...
그리고 원산지별 커피는 죄다 섭렵하며 입맛을 쩝쩝거려 보았었지요.
뭐 나름대로는 제 입맛에 맞는 커피 찾아 삼만리하는 실험정신으로. ^^
결국 코스타리카 타라주 커피가 제 입맛에 가장 맞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아직까지도 꾸준히 코스타리카만 마십니다. 드립커피로는.
아이들이 모두 잠들기를 기다렸다 물을 끓이고 한포트 가득 커피를 내릴 때에는
정말 저만을 위한 의식이라도 치루듯 그런 심정으로 드립을 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드립포트를 들면 손이 달달달... 떨린다지요.

그것 조차 여유롭게 즐기지 못한 시간도 간간히 생기고
또 다시 구비구비, 철없는 남편이 속을 썩이고 넘어 가던 어느 날.
제가 웹을 통해 알고 지내던 분께서 모카포트를 권해 주셨습니다.
드립커피 보다 모카커피 만들어 물 타서 마시는 것이 훨씬 카페인 함량이 적을 거라면서요.
(커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저의 건강을 걱정해 주셨던 것이지요. ㅜ.ㅜ)
솔직히 지금도 그렇지만, 별다방 같은 곳도 지금껏 3-4번 가본 것이 전부이고
집 밖에서 자판기 커피 말고 마셔본 적도 거의 없습니다.
3년전이었으니, 그땐 더 그랬었죠.
에스프레소 커피가 어떤 맛이나 농도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아줌마가
단지 드립 보다 훨씬 간편할 것 같은 생각에 용감무쌍하게도
저의 35번째 생일을 혼자 기념하며 모카포트를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비알레띠 브리카 4인용 포트.
바로 전에 그냥 모카포트 3인용을 한달쯤 썼던 저에게 이 포트는 어찌나 듬직하던지.
3년 동안 아무 탈 없이 거칠지만 믿음직스런 크레마를 만들어주는 녀석.
첨엔 이걸로 하루 2-3번씩 커피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첫 모금의 그 찡- 하고 짜릿한 맛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그랬는지
그만큼 사는 것이 복잡하고 힘들어서였는지
매일처럼 모카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었지요.
그 무렵엔 그냥 숨을 쉬어도 그게 한숨이었을 때였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정신을 놓거나 마음이 흔들리면 안되기에
아마 그렇게 커피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동안 마셨던 모카커피 깡통도 무지하게 모였었는데
이래저래 남편 재떨이로 사용되거나
아이들 수채화 그릴 때 물통으로 재활용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씩쯤은 기념으로 모아 놓으려고 하는데
깡통이 부피가 제법 커서 그게 잘 안되네요.
그나마 "깡통" 때문에 사서 마셨던 일리 커피 같은 경우엔
아까워서 버릴 일은 없겠지만요. ^^

3년째 브리카를 쓰면서 그 진하고 묵직한 맛이 너무 맘에 들면서도
자꾸 환경호르몬이나 알루미늄 성분 때문에 찜찜함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솔직히 바로바로 씻어 놓지 않으면 부식 되는 위험 때문에
급한 성질상 진득하게 커피 맛에만 취하지 못합니다.
오락가락 하며 포트가 대충 식으면 씻어 놓아야 하기에
그게 귀찮아서라도 스뎅포트가 자꾸 눈에 밟혔었지요.

스뎅포트도 가격이 만만찮아서 아예 좀더 여유가 생길 때 까지 기다렸다가
머신으로 사버릴까 말까 가격에 맞춰서 사전조사와 공부만 빡시게 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던 중, 하늘에서 갑자기 스뎅포트 하나가 뚝! 떨어졌습니다. ^^*
(모커피판매사이트 이사님께 선물 받았다는.. ^^v)
선물이 집으로 도착했던 날, 너무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바로 커피 만들어 마신다며 부랴부랴 서둘러 없는 솜씨를 발휘해서
집에 있던 와이어 철사로 삼발이를 만들어 불에 올렸었답니다.
철물점에 석쇠 사러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리. ^^;

베브 비가노 콘테사 2인용 포트인데, 크기도 정말 귀엽고
반짝거리는 스뎅의 느낌도 정말 단정합니다.
커피맛도 일부러 아주 진하게 드립한 커피의 농도 정도입니다.
바로 씻지 않아도 됩니다.
저에겐 양이 적지만 바로 씻어서 다시 만들어
뜨거운 커피로 마실 수 있습니다.
역시 스뎅~ 이었습니다. 흐흐...

그리하여 "브리카"군에 이어 "콘테사" 양이 올가을 저의 친구로 낙점 되었습니다.
물론 언제나 저에게 힘을 주는 커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영원한 벗이고 말입니다.
어쩌면 저는 이렇게 비싼 커피 용품과 커피를
집에다 놓고 즐길 형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커피마저 없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쌓인 10년의 세월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고맙게 생각합니다.
커피...
언제나 말없이 묵묵히 저의 속내를 들어주고, 토닥여준 친구.
"살림살이"로 이름 붙이기엔 너무 미안한 나의 보물들.
이제는 한숨과 함께 커피를 삼키지 않아도 될만큼이 되었지만
커피를 마실 때 마다 느껴지는 그 어떤 뭉클한 감정은
아직도 그대로 입니다.
언제나, 언제까지나,
커피는 나의 힘 일 것입니다.
아, 아주 가끔, 가을의 냄새가 짙은 날에는
홍차의 말간 빛과 향에 취하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

요녀석들도 지난해 늦은 가을,
집을 더 줄여서 이사한 후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저 스스로를 위안하며 선물한, 홍차 포트와 워머랍니다.
가끔은 나를 위한 선물로 일상에 점 하나씩이라도 찍으며
다시금 기운 내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다면
작은 사치라도 용서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결혼 10년...
내 나이 서른일곱...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깊은 우울의 시간들을 바라보며
홀로 보낸 나의 길었던 茶 시간들...
고맙다며 서로를 토닥거리고 싶은
긴 터널을 함께 해 온 나의 벗들...
이제는 정겹고 평온한 나와 당신의 茶 시간을 위해
또 다른 준비를 시작하렵니다.

숲속.
*곳곳에 비치는 시커멓고 큼직한
거슬리는 곰아줌마의 그림자는
부디 기억에서 지워주시길...
스뎅 사진 찍기 정말 어렵더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