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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고백

프리댄서 조회수 : 885
작성일 : 2009-05-27 23:35:51
‘노통의 죽음’을 접하면서 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이미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70세의 노학자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인데요, 1995년이었죠. 당시 언어학을 공부하느라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던 고종석이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한겨레신문에 짤막한 기사를 실었더랬습니다. 철학자 질 들뢰즈,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 물론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판이하게 달랐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던 무렵 두 사람이 느낀 소회는 공교롭게도 비슷합니다. 들뢰즈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병 때문에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 철학자로서 이건 삶이 아니다....

그보다 한참 전인 1980년에 들뢰즈는 펠릭스 가타리라는 정신분석학자와 함께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대담에 참여하여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천의 고원>은 당신의 훌륭한 책들 중에서도 제일 잘 쓰인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전 책들에 비해 대중들의 반응은 미미하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들뢰즈가 대답했습니다. 책이 너무 두껍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들뢰즈가 무슨 뜻으로 저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죠, 맞는 말입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명예라는 말은 뭐랄까....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시대입니다. 그게 뭐가 중요한가요? 경제만 살리면 됩니다. 명예, 품위, 존엄 따위들은 그 다음 문제들입니다.

예, 게다가, 정말로 게다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죠. 순정이 통했던 건 옛날하고도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열정은 여전히 칭송받으나 순정은 그렇지 못합니다. 순정은, 그런 게 아직도 있고 그게 여전히 통한다고 믿는 것은 촌스럽고 답답하며 모자라게까지 느껴집니다. 누구나 알다시피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통의 죽음은 그런 생각 혹은 확신을 새삼 조용히 뒤흔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명예, 품위, 존엄, 염치와 같은 덕목들이 왜 중요하지 않냐고, 변함없이 중요하다고 말이죠. 또한 순정이 결코 우스운 것이 아니며 대인배와 소인배, 신의, 의리와 같은, 당신이 평소 정서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삼국지식 레토릭들이 지금에도 인간을 평가하는 어떤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나직하지만 강하게 웅변하는 듯합니다.

아마도 그런 것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강렬히 호응토록 만들었고 그를 향한 밀도 높은 믿음을 이끌어냈겠지요. 그리고 고백하건대, 저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겉으로는 삐딱한 체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노통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신없이 바빴던 지난 주말과 새로운 주초를 보내고 뒤늦게 고백해봅니다. 이 명철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적 호응만으로 한 명의 정치인 혹은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게 타당한가, 라는 질문에 저는 예전보다는 조금 자신 있는 태도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  

들뢰즈의 저서와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그는, ‘그런 시대가 아닌 지금’에 던져진 한 권의 두껍고 문제적인 책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서 오직 저주와 조롱의 정치학만을 펼쳐 보인 자들, 그리하여 또다시 검찰과 국세청, 국정원, 감사원 등의 국가기구를 권력유지의 도구로 끌어들여 정치 포르노를 찍어대고 그것을 언론을 통해 상영하는 포르노업자들. 그들이 없는 곳에서 이제는 편히 쉬시길.

내일은 저도 덕수궁에 가서 국화꽃 한 송이 바치겠습니다.  
IP : 218.235.xxx.134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인천한라봉
    '09.5.27 11:38 PM (211.179.xxx.58)

    네.. 좋은글 잘봤습니다.
    의미없는 죽음이 아니길.. 살아 생전에 바꾸지 못한 세상을 바꿀수있기를..
    더불어 그분이 그토록 좋아하시던 사람사는 세상이 뭔지 제대로.. 이뤄나갔으면.. 합니다.

  • 2. 감사힙니다
    '09.5.27 11:44 PM (75.143.xxx.91)

    프리댄서 님의 글이 이 진흙탕 공간의 한줌 맑은물이 되기를..
    어지럽고 어수선한 게시판을 보면서
    '이번에도 우리가 그들에게 진건가' 하고 절망했었더랬습니다.
    아직 울고 있고, 분노하고 있지만
    프리댄서님의 글에 한없은 동질감과 위안을 받고 갑니다

  • 3. 현랑켄챠
    '09.5.27 11:44 PM (123.243.xxx.5)

    조조가 그런말을 했었던 것 같네요.
    믿지 못할 자는 부하로 들이지 말 것이며 한 번 부하로 들인자는
    끝까지 믿어라......

    우리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신의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지....
    바보 현덕은 그렇게 갔습니다. ㅠㅠ.

  • 4. 가로수
    '09.5.27 11:48 PM (221.148.xxx.201)

    뒤늦은 고백에 저도 마음을 싣습니다, 오늘 조문을 다녀왔는데 마음이 착잡하군요
    순정이라는 단어를 들으니 생각나는게 있어요, 오래전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훌륭히 역할을 하시는 김인국신부님이 어떤 모금을 위하여 어느성당에 와서 강론을 하셨는데 순정을 바치겠노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선한 젊은 신부님이다하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그이름을 기억해 두었는데...오늘날 뜻밖에 신문과 방송에서 그이름을 듣지요
    그분을 신문이 아닌 그냥 조촐한 성당에서 만나는 그런 날이 와야 할텐데요
    노대통령에겐 미안합니다라고 적어 놓고 왔습니다 .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들
    미안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 5. 잘읽었습니다
    '09.5.28 12:14 AM (221.146.xxx.39)

    (항상 프리댄서님 글 잘 읽고 있습니다ㅎㅎ)

    평생 보통의 직업인으로 80년대 이후에 정년 퇴직한 60대 이상의 중산층 한나라당 지지자들에 대해
    그런 분석이 있었어요
    그들이 노대통령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유...가

    까면 까이면서 내 비굴(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로 일군 이 나라인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하던 촌 넘이 갑자기 정의로움을 가치로 들고 나와
    노고를 폄훼한다...는 해석이었지요...
    (어디 좀 무안한 자리에서 제 친정 아버지를 만난 기분이 들었었습니다...)


    저는 지금의 시대가 이전과 다르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순정이 지켜야 하는 가치로 지켜지던 시대가 따로 있었다
    고 생각하지도 못하겠습니다...

  • 6. 좋은글 잘 잀었
    '09.5.28 12:34 AM (222.98.xxx.175)

    참 좋은 글 입니다. 잘 읽었어요.

  • 7. ...
    '09.5.28 1:19 AM (114.129.xxx.77)

    아름다운 글입니다... 감탄하고 갑니다..
    슬픔에 빠져있는 제 마음을 톡 건드려 주시네요..

  • 8. 프리댄서
    '09.5.28 7:35 AM (218.235.xxx.134)

    참여정부 당시 제 친구 하나는 노무현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고 했었죠.
    생각해보니 그때도 전 속으로 '그래도 완전히라고 하기엔...'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진보신당 지지자면서 유시민도 괜찮아, 대선에 나오면 솔직히 유시민한테 힘을 실어줄까 말까 고민하게 될 것 같애, 하고 있네요. 하하. '노통의 죽음'을 계기로 새삼 저의 사기스러운 정체성을 깨닫게 됩니다.

    어쨌든, 각자가 인정하든 안 하든 간에 노통에게는 확실히 감정적으로 커다란 감응력을 발휘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그를 잃은 후 사람들이 보이는 슬픔의 형태도 '서러움'인 듯하구요. 부디 MB가 그 서러움을 표출하는 주체들의 범위가 결코 좁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합니다. 공안통치가 법치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되고 국가기관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변질되는 이 풍경들이 정말 낯설지 않습니다.

    근데 가만 생각해보니 말 잘하고, 말 많은 두 명의 대통령이 (그 중 한 명은 더더욱 말이 많았죠^^) 거하고 말 못하고 토론에서는 동문서답하기 일쑤인 대통령이 내하니 다시 그런 풍경들이 연출되는 것도 같군요.ㅠㅠ 말이 딸리니 힘으로 누르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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