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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작성일 : 2008-06-30 01:47:59
박정희 정권 18년을 통하여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가장 많은 의혹과 물의를 빚은 사건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인혁당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 역시 모든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법대로 처리된 것이었다. 검찰의 기소단계에서부터 제 1심, 항소심, 대법원의 확정판결 그리고 법무부장관의 확인을 거쳐 사형집행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이 처리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사건은 오랜 시간에 걸쳐 내외로부터 커다란 의혹을 샀다. 일부 사람들은 인혁당 사건이란 조작된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다.

관련 피고인 8명이 대법원의 판결이 있고, 스무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처형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그리고 25년이 흐른 오늘까지, 인혁당 사건의 진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 되고 있다.



② 36년 전, 19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이 맨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4년 8월 14일이다. 이날 김형욱 중앙 정보부장은 기자회견을 소집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은 전국에 수배 중에 있다."며 북한의 지령을 받고 국가변란을 기도한 남한 내 지하조직 사건이라는 것이 사건발표의 요지였다.
1차 인혁당 사건이 발표되던 64년은 김종필과 일본외상 오히라의 비밀협상 사실이 드러나면서, 굴욕적인 대일외교에 반대하는 학생, 지식인 세력과 한일회담 재개를 앞둔 정부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던 때였다.
그 와중에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사건 개요는 다음과 같다.

"3.24 이후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한 이 인민혁명당은 1962년 1월 우동읍 집에 서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민청 중앙위원장이 던 우동읍과 동맹간사 김배영, 김영광, 민민청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작, 전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 박현채 등이 참가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회를 갖고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 경제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북괴로동당 강령 규약을 토대로 인민혁명당의 새 강령과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발족하였다. 인혁당은 창당후 조직을 확대해오다가 1964년 4월 북괴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동당 중앙상임위원인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중심이 되어 한일회담반대 학생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함과 동시에 학생데모를 4 19와 같은 혁명으로 발전케 함으로써 현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인혁당 사건 관련자로 구속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도예종(40. 무직), 박현채(30. 서울대 강사), 정도영(39. 합동통신 조사부장), 이재문(31. 대구 매일신문 기자), 허표(31. 부산 봉래초등학교 교사), 박상흥(45. 서적상), 김경희(27. 민중서관 사원), 전무배(33. 서울신문 기자), 박중기(29. 한국여론조사 취재부장), 양춘우(29. 무직), 서정복(24. 서울문리대 철학과 4년), 김정강(25. 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정남(22. 서울문리대 정치과 3년), 김중태(24.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현승일(21.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도현(21. 서울문리대 정치과 4년), 김승균(26.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4년)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에서 관련자들을 조사하다가 1964년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사건이 정보부의 손을 떠나 검찰에 넘어간 뒤부터 인혁당 사건은 묘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정보부가 주장한 것처럼 사건이 그렇게 북괴의 지령을 받은 어마어마한 국가보안법 사범이 아니라는 점과 이로 말미암은 검찰내부의 분규 및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설 등이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혁당 사건은 그 결과로 다시 한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네 명의 담당검사가 만장일치로 공소를 기각한 것이다.



③ 공소를 기각한 공안부 검사들

사건을 담당한 공안부 검사(이용훈,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들은 구속연장 만료일인 9월 5일, 증거상으로는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기소장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관련자들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불온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었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고 항명의 경위를 밝혔다.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3명의 검사는 기소거부와 함께 사표까지 제출했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앙정보부는 발칵 뒤집혔다. 대규모의 국가보안사범이라고 대대적인 발표를 했는데 담당검사들이 무혐의라고 손을 들고 말았으니 수사당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담당검사로서 기소를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한 바 있던 장원찬 (現 변호사) 검사의 회고는 이렇다.

"한차례 구속기간을 연장해 가면서까지 수사를 해도 정보부 발표대로 그들이 북쪽의 지령을 받고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난수표가 나온다던지, 어떤 조직을 결성하려면 강령이 있다던지, 당에 가입해 선서를 했다던지, 가입증이라던지, 자기들끼리 모이는 사진을 촬영했다던지, 녹음, 전화도청... 뭔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도 없었다. 그저 정보부에서 작성한 조서만 있었다. 그런데 그건 피의자들 모두가 '인혁당'이란 단어 자체를 들어본 일이 없고 모두 고문에 의해 한 것이라고 혐의사실을 강력히 부인했다. 그건 증거로서 효력이 없다. 하다못해 심증이 갈만한 무슨 종이쪽지라도 있어야 할텐데 정말 하나도 없어 답답했다. 공안부 다른 선배 검사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무리하게 기소를 한다해도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나의 양심에 배치되는 짓이었다."

궁지에 몰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검찰에 압력을 넣어 당시 숙직담당 검사였던 정명래 검사로 하여금 가까스로 서명토록 하여 간신히 기소할 수 있었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고, 관련자들이 수사기관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한 사실이 하나 둘 터져 나왔다.



④ 당시 국회 정치쟁점으로 번졌던 1차 인혁당 사건

인혁당 사건의 기소, 불기소를 둘러싼 검찰 내부의 갈등과 피의자들의 고문설은 국회에서 정치쟁점으로까지 번졌다. 9월 9일, 국회는 민복기 법무부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인혁당 사건 기소경위에 관해 추궁했다. 그날 야당의원들은 "소위 인혁당 사건은 과거 굴욕외교반대데모를 벌인 학생들을 때려잡고 또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학생데모를 막기 위해 조작한 정치적 쇼가 아닌가?"를 물었다.

박한상 변호사(현 한국인권옹호협회장)는 "이번 사건은 6 3계엄사태를 합리화하기 위해 엉터리로 조작된 것이며, 이러한 엉터리 조작에만 여념이 없는 중앙정보부는 이번 기회에 아주 없애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소."라며 중정해체론까지 주장하며 추궁했다. 이 같은 추궁에 대해 민복기 법무부 장관은 "인민혁명당은 북괴 노동당 강령을 골자로 하는 규약을 토대로 조직된 불법단체고, 정부전복을 목적하고 3 24에서 6 3까지의 학생데모를 배후에서 조종했다." 고 대답했다. 수사를 맡았던 공안검사들의 집단사표 제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마당에 민복기 법무부장관의 대답은 설득력이 약했다.

이렇게 되자 인혁당 사건에 대해 국민들은 점차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과연 중앙정보부의 발표대로 그들이 '빨갱이'인가하는 점에 대한 의혹이었다. 더구나 당국의 발표에 신뢰를 주기엔 다소 주저하도록 만든 부분이 또한 [고문]이었다.
피고인들의 변론을 맡았던 박한상 변호사가 밝힌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사례는 심각했다. 당시 서울교도소에서 피고인들을 면담, 조사한 뒤 "거의 대부분이 수사기관의 예심과정에서 전기 물 몽둥이 등으로 심한 고문을 당해 피까지 토한 피의자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 폭로된 고문사례

도예종 : 촬영실이라는 방안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긴 다음 다다미 2장 넓이 위에 앉혀놓고 물을 머리위로부터 부은 다음 수건과 로프로 결박, 나중엔 옷을 입히고 두꺼운 베같은 것으로 만든 잠수복 비슷한 것을 덮어 씌워 목과 다리만 나오게 했는데 몸을 조금만 밀어 붙이면 두 다리는 위로 올라가고 고개를 꼼짝 못하게 결박된다. 수건으로 코, 입, 얼굴을 씌워 막고 물을 부으면서 엄지 발가락에 끼운 전선에 전기를 통했다 끊었다 하는 전기고문을 당했다.

정도영 : 침대 위에 눕히고 물과 전기로 고문을 당했다. 고문 직후엔 2시간동안 의식을 잃었다. "고문까지 했으니 우린 약점을 잡힐대로 잡혔다."면서 고문했다.

전무배 : 발가벗겨져 사지를 묶인 채 뒤로 뉘어진 상태에서 물고문을 당했다. 수사관들은 "인민혁명당 조직보따리를 내놔라"라고 윽박지르며 물고문을 했는데 전씨는 그 후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나왔다.

고문폭로에 검찰 측에서도 조사에 착수, 일부 사실들을 확인했다. 기소단계에서부터 말썽이 많았던 인혁당 사건은 우여곡절을 거쳐 검찰은 서울고검의 한옥신 검사로 하여금 사건의 재수사를 지시했다.
애초의 연루자 47명, 그러나 판결은 도예종을 포함한 13명에 대해서만 유죄가 선고됐다. 죄목도 반국가단체 구성의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국가단체의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혐의로 공소장을 경미하게 변경했다. 대법원에서는 이들에게 도예종에 대한 3년형을 최고로 선고했고,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당초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했던 어마어마한 사건은 용두사미격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10년 뒤, 인혁당 사건은 부활한다.



⑤ 민청학련 사건의 발표와 배후세력인 '인혁당 재건위'의 등장

1972년 박정희에게 영구 집권의 길을 열어놓은 유신헌법이 발표되고 처음 1년, 유신체제는 별다른 저항없이 순항하는 듯 했다. 그러나 힘의 논리는 그만큼의 저항을 불러왔다. 강압을 통한 박정희 영구집권 체제는 서울대 문리대의 시위를 시작으로 한 대대적인 유신철폐운동의 벽 앞에 부딪혔다. 재야 민주인사들의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은 열흘만에 30만명을 넘길 만큼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고, 종교계에서도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 등을 통해 유신반대의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었다.
1974년 1월 8일, 방학중임에도 불구하고 광주에선 전남대생 1천여명의 개헌요구 데모가 벌어졌다. 같은 날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1호 :


-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난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 前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
-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 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긴급조치 2호 :


- 중앙정보부 부장이 사건의 정보, 조사, 보안업무를 조정, 감독한다.


이어 박정희는 긴급조치 1,2호를 발표한지 6일 후 '국민생활안정을 위한 긴급조치 3호'를 선포, 정치불안에 따르는 국민들의 경제 심리를 무마코자 애썼다.
정부는 유신헌법이 보장한 대통령 비상권한인 긴급조치권의 발동으로 유신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봉쇄하려 했지만 반체제의 불길은 수그러질 줄 몰랐다. 개학철인 3월이래 술렁대던 학원가에서는 '3,4월 위기설'이 나돌았고 1974년 4월 3일 서울대를 비롯, 각 대학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뿌려진 유인물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민청학련)이란 생소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된다.

긴급조치 4호 :


-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며, 이 조치를 위반한 자 및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에 처한다. 이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는 폐교처분을 할 수 있다.


긴급조치 4호는 민청학련을 겨냥, 이에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주장과 행위는 최고 '사형'에 처한다는 극단의 조치가 발동된 것이다.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 선포에 즈음한 특별담화를 통해 "지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전개하는 적화통일을 위한 이른바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불법활동 양상이 대두되고 있다. 이 같은 불순요인을 발본색원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을 공고히 다지겠다."는 강경자세를 보였다.

이 같은 특별담화를 통하여 학생데모와 관련, 정부가 대공관계와 연계된 모종의 강경책을 쓰고 나오리라는 전망이 감지되었다. 그 같은 우려는 3주일 후인 4월 25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사실로 드러났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발표한 내용은 예상한대로 학생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10년만에 다시 듣는 '인혁당'이 그것이었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재건위 조직과 재일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농민에 의한 정권수립을 목표로 했으며 과도적 정치기구로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했다."

10년만에 등장한 '인혁당'-, 그러나 인혁당 사건은 10년 전인 그때와 혐의 사실이 비슷했다. ▶학생들의 반정부데모가 뚜렷해질 시기에 배후조종세력으로서 ▶학생시위를 공산혁명으로 유도, 노동자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은 점이 공통점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민청학련 사건에는 인혁당 뿐 아니라 윤보선, 지학순, 김동길, 김지하 등 각계 명망가들도 학생데모의 배후조종자로서 함께 기소되었다는 것이다.

민청학련과 관련돼 구속된 인원은 1,024명-, 긴급조치 하의 판결은 가혹했다. 이철, 유인태 등 학생운동 주동자와 김지하 등 7명에게 사형이 선고 됐고, 무기징역 7명 총 32명에 대해서는 무거운 형량이 내려졌다. 그러나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열 달이 채 못되어 전원 석방되었다. 그들 대부분이 학생이나 익히 알려진 명망가들이란 점 때문에 국가변란을 꾀했다는 죄목은 국민들로부터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석방의 환호뒤엔 숨죽여 통곡하는 이들이 있었다. 국민들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얼굴들. 인혁당재건위 즉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으로 잡힌 2차 인혁당 23명의 가족들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라는 인혁당 관련자들은 처음부터 민청학련 사건에선 소외된, 관심밖의 낯선 인물들이었다. 실제 재판과정에서도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 심리는 분리돼 진행되었다.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는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이란 방대한 책자에서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지명도가 높은 사람들을 사건에 관련시킬 경우 64년도의 경우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로 인해 당국의 허점들이 노출되어 당국이 곤혹스러운 지경에 놓이게 될 수도 있다. 사실상 인혁당 사건이 발표된 이후 수개월 동안 인혁당에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무명인들, 그것도 반공법위반 혐의를 안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선뜻 관심을 표명한다는 것은 반공법 만능의 한국상황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국이 그 점을 의도하였다면 당국은 거의 성공을 거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0년의 공백을 두고 일어난 1, 2차 인혁당 사건의 수사에 같은 인물이 관련하였다는 사실이다. 2차 인혁당 사건을 발표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64년 당시 검찰총장, 그리고 실질적인 수사를 도맡아 한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은 64년 당시 중앙정보부 5국 대공과장이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넘겨 버릴 수도 있지만 1차 인혁당 사건에서 기소여부를 둘러싸고 공안검사들과 세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던 사람이 10년만에 단단한 준비 끝에 보복을 꾀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일부에서는 설득력있게 나돌았다.

74년 5월 27일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인혁당사건의 피의자는 모두 23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혁당은 [남한에 강력한 지하당을 조직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1961년 남파된 북괴간첩 김상한이 재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1962년 1월에 조직한 지하당이다. 인혁당의 조직과 활동상황은 1964년 6 3사태 배후조종자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거됨으로써 처음으로 드러났는데 당시 김상한과 재정책 김배영이 1962년 5월 월북하고 없었기 때문에 검거된 자들은 고문에 의한 조작설을 유포, 법정투쟁을 통해 극히 경미한 형을 받았다.
그 뒤 1967년 김배영이 인혁당 재건지령을 받고 다시 남파되었다가 검거되어 인혁당의 진상이 뒤늦게나마 입증되었으나 일사부재리의 원칙 때문에 다시 처벌할 수 없었다.

인혁당은 그 뒤 지하로 잠복했다가 1972년 7월 4일 남북대화의 시작을 틈타 지하활동을 강화, 1973년 10월 이후의 학원소요와 유류파동, 개헌청원서명운동 등이 일어나자 제2의 4 19로 사회혼란을 조장, 민중봉기로 정부를 전복함으로써 적화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결정적 시기라고 속단, 인혁당 재건을 완료하고 학생을 선동, 폭력에 의한 정부전복을 기도하다가 검거된 것이다."

비상보통군법회의를 거쳐 항소심인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이들이 받은 형량은 ▶사형 8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4명 ▶징역 15년 4명 등 하나같이 중형이었다.  






⑥ 민청학련 사건의 소외그룹, 인혁당 재건위

형집행을 받은 23명에는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3년형을 살았던 도예종을 비롯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이하 사형언도), 정만진, 김한덕, 조만호 등 7명이었다. 그러나 도예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혐의로 풀려나왔다. 그럼에도 '인혁당 재건'이란 멍에는 10년 동안 그들을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물론 23명의 인혁당 사건 관련자 가운데 상당수가 70년대 한국사회가 지녔던 여러 모순에 대해 나름대로의 일정한 정도의 비판의식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하는데 연결고리 몫을 했다고 정부에서 주장한 여정남 (31. 사형집행)의 경우가 그러하다. 43년에 태어난 그는 경북고를 거쳐 경북대 정치학과에 입학,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64년도에 있었던 6 3 시위를 주도하다 제적된 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으나 필화사건, 포고령 위반으로 두 번 구속됐던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사형언도를 받은 8명 중 여정남을 제외한 주요인물들은 모두 이승만 정권기부터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혁신계 인물들이었다. 이후 평화통일론은 조봉암의 진보당이 공식적인 당령으로 채택함으로써 힘을 얻어갔다. 그러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사형당함으로써 혁신계의 평화통일론은 숨죽여야 했다. 평화통일론은 4 19로 다시 터져 나왔다.(당시 이승만의 통일론은 북진통일론이었다.)

특히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은 4 19 직후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진보적 조직인 민족민주청년동맹 (민민청)의 중심인물들이다. 이들은 민민청 활동의 전력 탓에 5 16 군사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명재판에 회부돼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도예종의 경우 검거선풍을 비껴 피신했으나 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기소중지자'로서 체포됐다. 그가 1차 사건 때 3년의 실형을 언도 받은 데는 '기소중지'건이 크게 작용한 때문으로 이야기되어진다. 대구사범 출신의 송상진은 국교교사로 있으면서 4 19 직후 교원노조 활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도예종과 마찬가지로 1차 인혁당 사건 때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었다.

부산사범을 나와 한때 갑을국교교사로 있던 이수병은 경희대로 진학, 4 19 당시 경희대 민족통일연맹(학생 민통련) 위원장을 지냈던 4 19세대로서 '민족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수석 합격하기도 했다. 그러나 5 16 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15년 징역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한 전력을 지녔다.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의 김용원도 4 19세대로서 서울문리대 학생민통련에서 활동했고, 64년 1차 인혁당 사건 때 연행돼 조사를 받았으나 바로 풀려났다.
육군대위 출신의 우홍선은 4 19직후 통일민주청년동맹 (통민청) 위원장으로서 5 16이일어나자 한때 수배되기도 했다. 김용원과 마찬가지로 1차 인혁당 사건 때 체포돼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이렇듯 2차 인혁당 사건의 주요인물들은 대부분 평화통일론을 계승한 혁신세력이었지만 이후 혁신계의 뚜렷한 활동은 없었고, 관련자들은 대부분 민청학련 사건 발표 뒤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⑦ 의문의 사형집행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수사와 재판은 파행적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의 혐의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분리되어 재판은 진행되었다. 수사는 끝까지 중앙정보부 수사관에 의해 이뤄졌고, 가족면회는 금지됐다. 가족 중 단 한사람만이 참관할 수 있었던 법정에선 반론의 기회도 없었다. 사실심리 절차가 무시되기도 했다.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강창덕의 얘기를 들어보자.

"피고 진술 기회를 주지 않는다. 기회도 안 주고 검사의 일방적 심문만이 있을 뿐이다. 판사들은 묵묵히 앉아서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냥 요식행위만 갖추고 일사천리로 끌고 나가는 것이다. 내 경우에는 사실심리도 없이 변호인보고 바로 변론을 하라고 했다."

도예종의 부인인 신동숙도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면회도 한번 안 시키고 변호사도 제대로 변론 못하게 한다. 본인이 무슨 의사표시는 해야할 것이 아닌가.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이고, 그런데 전혀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 이런 재판이 어디있나?"

파행적인 재판 속에서도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힌 인혁당 관련자의 가족들은 어느 한곳 호소 할 데가 없었다. 그러나 가족들의 구명운동은 백방으로 펼쳐졌다. 구명운동으로 중앙정보부까지 불려갔던 가족들은 다시금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공판기록이 변조된 것이다. 공판기록이 변조된 것을 처음 목격한 사람은 당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전창일의 부인 임인영이다.

"무슨 책을 하나 가지고 나와서 펴더니 다른데는 안보여주고 전창일씨 부분만 보여줬다. 탁 펴놓더니 이걸 보래요. 이렇게 하고도 조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내가 공판기록을 쳐다봤더니 거기에 그렇게 적혀있는 거에요. '국가변란을 모의 했습니까' 하니까 전창일씨가 재판정에서는 '나는 절대로 그런 일을 안했습니다'하고 얘기했는데 거기에는 '네, 했습니다' 그렇게 적혀있고, 그 다음에 또 거기서 묻는 대답에 또 그렇게 '네, 했습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하도 기가막혀서 거기서 따졌다. 너희들 공판기록이라는게 이거냐. 너희들 어떻게 공판기록까지 조작을 하느냐해서 막 덤볐다. 그랬더니 취조하던 사람이 얼른 공판기록을 덮더니 캐비넷에 갖다놓고 열쇠로 잠궜다."

조작된 공판기록 부분은 법정증인의 한 사람인 김종길 변호사에 의해서 확인됐다. 그러나 최종판결은 변조된 공판기록을 토대로 선고됐다. 그리고 상고는 기각됐다. 대법원에선 군법회의에서 내려진 중형을 원심 그대로 확정 판결한 것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에겐 사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그날 오후, 고려대엔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됐다. 75년 4월 8일의 일이었다. 이날을,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 선고를 받은 8명의 인혁당 관련자들과 그 가족들 앞엔 또 하나의 파란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법원의 상고가 기각되고 채 스무시간도 지나지 않은 새벽, 8명 전원에겐 사형이 집행됐다. 그들에겐 재심의 기회도, 탄원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날 가족들은 사형집행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남편의 면회를 갔던 이영교씨 (하재완의 처)는 그 날을 이렇게 얘기한다.

"면회는 일체 안됐으니까 꿈도 꾸지 않았다. 남편에게 사식이라도 넣어주려고 새벽부터 교도소에 갔다. 교도소 문이 잠겨 있더라. 교도소 형편에 의해 오늘은 면회 안한다고 써 붙여놨더라. 그 길로 이상해서 전창일씨 부인한테 전화해보니 라디오에 나왔다고…"

느닷없는 사형집행은 가족들에게만 충격이 된 것이 아니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하고 무기징역형을 받았던 전창일씨가 기억하는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집행은 이미 대법원 판결이 있기 전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

"내가 교도소에 있는데 4월 8일날 사형집행장소를 청소시켰다는 거다. 그 시간을 후에 따져보니 대법원에서 재판하기 전부터 청소를 시킨 거다. 오전 11시에 재판이 있었는데 10시부터 여기에 청소부를 동원해서 청소를 시작했다. 당시 구치소 소장의 말은 내일 사형집행이 있으니 여기 청소 시키는 거다. 최종 확정 나기 전, 이미 내일 집행하려고 여기를 청소한 것이다."

사형집행 소식은 이틀이 지나서야 언론에 보도됐다. 2차 인혁당 사건은 1차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의혹으로 조작설이 나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유신체제 하에서 순치되기 시작한 언론은 이를 제대로 보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때와는 크게 위축된 이 땅의 언론 위상이었다. 석연찮은 사형집행에 의혹은 그 이후 점점 커져갔다.

그 당시의 군법회의법에 따르면 사형집행은 다음의 절차를 따라야했다. 사형언도가 확정될 경우 국방부장관은 6개월 안에 사형집행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이 있은지 5일 안에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서종철 국방부장관이 상고기각 당일로 사형집행명령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 법조인의 말을 빌려보자.

"만일 형집행을 안하고 계속 살려두면 어떤 조작이라던가 가공적인 혐의가 밖으로 알려져 박정권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을까. 적어도 재심청구 기회를 주는 것이 법의 정신이다. 다음날 바로 사형집행 한 자체가 권력의 야만이다. 어느 경우를 보더라도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정말 그들이 말한대로 국가보안법 위반 빨갱이었다면 형이 확정되었다고 해서 다음날 집행할 이유가 없다."

급작스런 사형집행 이후 사건조작 논란은 계속 됐지만 1차와 2차 사건을 모두 지휘했던 당시 중앙정보부 6국장 이용택의 입장은 단호하다.

"형은 확정 됐으니 확정되면 한시간 후라도 집행하지 말란 법 없다. 확정판결 났으면 그거로서 집행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괘씸하게 생각하고 빨리 집행 해버려라. 말썽꾸러기다. 그때 학생들 막 데모도 많이 일어났을 때니까, 학생들의 시위를 비롯 체제 도전세력의 움직임이 가라앉지 않은 어수선한 시국에 그런 극한수단을 써서라도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박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 기억되기론 정보부 관계자들도 그렇게 빨리 사형이 집행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⑧ 시신 탈취, 고문에 의한 조작 의혹

사형집행 이후 가족들에게 남겨진 것은 황망히 시신이라도 수습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여의치 않았다. 가족들 앞엔 또 한번의 참극이 닥쳐 있었다. 박정권의 정치적 계산이야 어디에 있든 재심의 기회조차 박탈해간 75년 4월 9일의 비극은 가뜩이나 고문에 의한 조작혐의가 따르는 인혁당 사건에 의혹을 더하기에 충분하였다. 8명의 사형수 시신을 가족들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일어난 실랑이도 이러한 의혹을 더욱 짙게 했다.

8명의 시신은 다음날까지 모두 가족에게 인도되었으나 그 절차는 오로지 정부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서울 구치소 주변을 다수의 경찰로 에워싼 채 울부짖는 가족들의 의사와는 달리 정부는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8인의 시신을 따로따로 연고지로 옮겨 갔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 충돌이 벌어졌다.

4월 10일 송상진의 시체를 영구차에 실은 유가족들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으로 있던 응암동 성당에서 연미사를 드리려 했다. 그러나 성당 얼마 못미쳐 영구차는 경찰에서 동원한 견인차에 끌려 벽제 화장터로 향했다. 그리고 탈취된 시신은 군인들의 손에 화장됐다.

시신탈취의 이유는 뒤늦게야 가늠됐다. 한 시신에서, 체포되고 1년여가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은 고문흔적들이 발견된 것이다. 경찰 백차가 앞뒤로 둘러싼 가운데 남편 이수병의 시신을 싣고 녹번동 집으로 돌아온 이정숙씨는 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당국에서 끝끝내 남편의 면회를 허락해주지 않은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오후 6시반쯤 집에 도착해 함세웅 신부와 함께 우선 남편의 시신을 살폈습니다. 얼굴은 잠을 자는 듯 평온한 편인데 손톱, 발톱 부분이 새까맣게 타 있었습니다. 발뒤꿈치 아킬레스건 양쪽 움푹 들어간 곳도 새까맸어요. 등허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판에 눕혀놓고 장기간 전기고문을 했다는 증거가 뚜렷했어요. 얼마나 혹독하게 당했으면 체포돼 사형당하기까지 1년이란 기간이 흘렀는데도 그랬겠어요."

재심의 기회도 박탈한 채 인혁당 사건 피고들을 서둘러 처형한 다음날,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과 민주회복 국민회의는 각기 성명을 발표, 박정권의 비이성적인 조치를 규탄하였다.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성명을 잠깐 살펴보자.

"대법원에서 원심 그대로 확정판결이 있은 다음날 8명의 인혁당 관련자가 사형집행된 사실은 우리 성직자들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울부짖는 가족들을 볼 때 우리 성직자들은 어떻게 위로해야 될지 그 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연행되어 간 뒤 군법회의 재판정에서 한 두 번의 눈길만을 서로 주고 받았던 가족들이 단 한번도 면회허락이 안된 비인도적인 처사로 1년만에 관에 싸인 싸늘한 시체로 맞이해야하는 그 비통함을 금할 길이 없다. 우리는 그들과 그들 가족들의 최소한의 요구,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공개재판을 해달라는 안타까운 바램이 묵살된 채 사형을 맞이한 것에 대하여 애처롭게 생각한다. 변호사가 확인한 재판기록의 변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혁당 관계 사건은 파기 환송될 요건이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박정희 정권은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면할 수 없었다. 런던에 본부를 둔 국제사면위원회 (엠네스티)는 사형집행 다음날인 75년 4월 10일 [사형수 8명에게 공공연히 씌어진 증거가 의심스러운 것으로 판단한다]는 강력한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⑨ 민청학련 사건의 의문점

2차 인혁당 관련자들이 검거된 계기는 민청학련 사건이었다. 2차 인혁당 관련자들과 민청학련의 관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북괴의 사주 아래 민청학련을 배후조종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인물은 여정남이었다. 경북대학교 학생회장을 거친 여정남은 이철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조직과 북괴를 잇는 연락책으로 지목됐다. 처음 민청학련 주모자 중 한사람을 체포하러 갔다가 도망치는 한 사람을 잡은 것이 여정남이었다. 그리고 조사를 시작했고 여정남 자신이 순순히 관련자들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여정남이 연락책으로 지목된 것도 이 이유였다.

사형된 8명 중 1차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은 도예종을 포함해 4명. 남한내 대규모 지하조직의 구도는 이들을 주축으로 다시 그려졌다. 이 과정을 지켜본 유인태 (前 국회의원)는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 모든 것을 여정남 선배한테 수사용어로 제가 지시, 지령했다고 썼다. 그러나 한 4-5일 지나고 나니 여정남 선배가 지시, 지령한 것으로 전부 뒤바꾸더라. 그때 이게 뭔가 있구나 생각했다. 여정남 선배 뒤에 뭔가 배후를 만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유인태는 여정남과 호형호제 관계였다. 그는 여정남과 만나는 자리에 이철을 동행했었는데, 세 사람의 친분관계는 수사과정에서 어느새 조종과 복종관계의 조직체계로 조작 되어 있었다. 이철 (前 국회의원)의원 역시 인혁당 자체를 조사 받으면서 처음 알았다고 했다.

"인혁당이란 사실, 그런 집단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재판 과정까진 몰랐다. 그 분들 얼굴도, 이름도, 성향도, 존재도 몰랐으니까. 우리가 배후조종 당했다는 사실은 터무니없는 얘기다. 존재를 모르는데 어떻게 배후조종을 받을 수 있겠느냐."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에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 외에 일본공산당계 일본인 2명이 포함되어있었다. 조총련과 연계 됐다던 위험스런 일본청년들은 그러나 민청학련 관련자들과 함께 석방됐다. 일본 공산당원 출신의 민청학련 배후 하야가와 요시하루-, 그리고 한국의 학생운동을 취재왔던 다치가와 마사키 기자-. 이들이 일본 공산당계, 즉 민청학련의 또 다른 배후였다.

하야가와 요시하루, 그의 사상적 전력과 검거의 내막은 아직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한국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민청학련 또 한사람의 연루자인 다치가와 마사키 기자의 한국어 통역을 맡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사건이 나기 3년 전 이미 일본 공산당을 탈퇴한 상태였고, 민청학련과의 연루는 느닷없는 일이었다. 느닷없기는 다치가와 마사키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다치가와의 죄목은 유인태에게 공작금을 건넨 일-. 5천엔, 그러니까 당시 우리돈으로 7500원을 건네준 죄로 20년의 징역형과 자격정지 15년을 받은 것이다. 다치가와는 지금 그 일을 이렇게 회고한다.

"제가 공산당도 아니고, 인혁당도 모르고, 조총련도 모르는데 취재하러 갔다가, 나도 왜 그렇게 됐는지 정말 모르겠다. 일본 주간지 기자로서 한국 학생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갔었고, 유인태를 취재했고, 인터뷰 취재비 5천엔, 그때 미국돈 20불을 유인태에게 줬다. 여행중이라 별로 돈 없었지만 불고기나 사 먹으라고 인터뷰 취재비 조로 준 돈이었는데 그 돈이 나중에 북한에서 받아 학생들 선동자금으로 줬다고 날조됐다."

난데없이 사건에 연루된 두 일본인의 경험은 한국에 대한 어두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고, 당시의 한국 사회를 말하는 한 징표가 되어 있었다.

같은 민청학련의 배후조종 혐의에도 불구하고 일본조총련계는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또한 다치가와 마사키 기자는 사석에서지만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용택 중앙정보부 6국장으로부터 개인적인 사과를 받았다고도 했다. 사건 당시에 소외되었고-, 지금까지도 소외 받는 인혁당 관련자들. 그러나 정작 진실을 증언할 핵심적인 인물은 오늘, 이 자리에 없다.



⑩ 사건은 묻혀지고…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 그리고 노력들

인혁당 관련자 8명이 사형된 지 25년-. 인혁당 사건의 조작논란은 사형 당한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문제로 모아졌다.

열사냐, 간첩이냐…. 억울한 죽음이냐, 합법적인 형 집행이었느냐….

서둘러 집행된 사형과 고문의혹 앞에 이제 그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이 거듭되고 있다. 2차 인혁당 관련자들을 사형에 처한 가장 유력한 증거는 하재완의 노트였다. 하재완이 송상진과 함께 북한방송을 듣고 받아 적었다는 '노동당 5차 당대회 강령'은 이들이 북한과 내통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로 제시됐다. 하재완과 송상진이 자주 북한방송을 들었다는 사실은 법정에서도 확인됐다. 그러나 그들이 왜 북한방송을 받아 적었는가의 의문은 묻혀졌다. 간첩이 전달한 것을 베껴 적었는가도 증명되지 않았다. 그 당시 북한 방송을 듣는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고, 만일 그것이 법에 저촉되는 부분이라도 몇 년 이하의 징역 정도였다. 그러나 그때는 민청학련에 동조한 것만으로도 사형이 선고되던 긴급조치 시대였다.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도 법집행은 강행될 수 있었다. 하재완의 노트는 그와 송상진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6명의 가장 큰 사형 이유 역시 노트를 돌려보고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당시 15년 형을 확정 받았던 임구호의 얘기는 달랐다

"정보부 사람이 자기가 부르는대로 받아 쓰래. 부르는대로 받아 쓰니까 그게 하재완씨 노트 요약한 부분인데 이걸 가지고 새벽까지 다 외우래, 나보고 암기를 하래.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참 어이가 없더라구. 처음에는 외울려고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외워지지도 않더라구."

어두운 긴 시대를 지나며 사건은 묻혀졌고, 여덟명의 죽음은 잊혀졌다. 억울한 죽음을 애닯아 하는 이들에 의해 통일열사의 이름을 달았지만 그것은 아직 온전한 이름은 아니다.

세월의 힘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에겐 치유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아이들의 경우 친구들로부터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을 받는 것은 물론, 친구의 부모로부터 거부대상 1호였다. 심지어 선생님에게서조차 '빨갱이 새끼가 이 안에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야 했다. 가장을 잃은 현실 앞엔 경제적인 압박 또한 컸다. 그러나 그 또한 언제나 뒷전의 문제였다. 이들 앞엔 늘 외롭고도 두려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물론 '그들과 어울리지 말아라. 그들과 함께 어울리면 같은 빨갱이로 오인 받아 너희들도 잡아간다'는 등의 이야기들은 항상 그들을 따라 다녔다. 세월이 흐르면 약이라고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약이 되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살아있음으로 죄스러운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있다. 세상을 향해 더 이상 할 일도, 가족을 위해 할 일도 이제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 소 꼴을 먹이다 잠들던 고향 언덕도 더 이상 설자리가 될 수 없었던 지난 세월-. 왜놈 치하의 하늘 보다 더 혹독했다던 그 시절, 그들에겐 친구들이고 고향 사람들이고 간에 그들을 대하는 부담감이 있었고 그 부담감이 그들에겐 이방인의 착잡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가게 만들었다.

지난 91년 4월 9일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여덟 명 가운데 두 사람, 여정남과 이재문의 이름이 세상의 밝은 빛 아래로 나왔다. 모교인 경북대학교에 그들의 추모비가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추모비는 오래 가지 못했다. 추모비가 세워지고 5년 뒤, 96년 6월 18일 밤 학생들의 시위는 시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었고 그 격전의 다른 한편에선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의 추모비가 경찰에 의해 뽑혀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엔 빼앗긴 추모비의 흔적만이 남았다. 영남대에서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의 추모비가 95년 4월 9일 세워졌다. 그리고 그 역시 같은 해 5월 10일 추모비가 뽑혀 나갔다. 지금 그 자리엔 나무로 만든 작은 추모비의 흔적만이 남이 있을 뿐이다. 추모할 수 없는 이름으로 남아버린 인혁당-.

그 역사의 이면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추모비를 세우고, 빼앗기는 과정들은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인혁당 관련 사형자들에 대한 첫 공개 추모식이 열린 것은 지난 99년 4월이다. 공개 추모식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반가웠다. 이종찬 국정원장의 조의문도 받았다. "인혁당 사건 희생자 24주기 추도식을 맞아 다시 한번 가신 님들의 영전에 조의를 표합니다. 인혁당 관련자 여러분의 명예회복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여러분과 애석한 마음을 함께 하며 살아남은 자의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새 천년인 지금-, 남은 우리들에겐 숙제가 있다.

불온한 이름, 인혁당-. 그 세 글자에 진실을 매김하는 것이다. 그들이 과연 국가변란을 기도했던가, 그들에 대한 재판은 왜 대부분 비공개로 진행됐고, 당국이 증거로 내 놓은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지금 그것이 공개되지 않고 정확히 조사되지 않는지… 그리고 또 관련자 여덟 명의 급작스런 사형집행에 정치적 의혹은 없는지…

더불어 그들이 진정으로 염원했던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은 무엇인지
IP : 59.26.xxx.90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박정희의 딸
    '08.6.30 2:04 AM (59.20.xxx.192)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답한 마음 억누를 수 없군요
    박정희의 딸이 버젓이 지지를 받고 있는 현실이 무섭습니다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인간들을 어찌 하면 좋을까요

  • 2. 나겨원은 머지?
    '08.6.30 2:13 AM (59.26.xxx.90)

    http://k.daum.net/qna/view.html?qid=390aZ&q=인혁당


    나경원의 이때의 태도는 먼가요?

  • 3. 끝도 없음다
    '08.6.30 2:46 AM (59.26.xxx.90)

    http://www.mgoon.com/view.htm?id=1349938


    인혁당 검색하다....할말 잊었음다.


    이 동영상의 주이공


    박근혜 부친 박정희
    인혁당 사건을 외면한 조중동
    방송 언론 ebs


    지금 시국과 넘 비슷합니다.
    그리고 동영상 마지막에....ebs 자막이 올라가면서

    "
    본 편을 제작하면서
    잠시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 나중에 세상이 바뀌어서
    이 영상물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나쁜일을
    겪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이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

    요렇게 자막이 올라가면서 끝납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뼈에 박히도록 공부하는 중입니다.
    벌써 새벽 3시네요

    이렇게 늘 잠 못잔지 2달이네요

  • 4. 처음으로
    '08.6.30 11:18 AM (58.226.xxx.119)

    김재규란 사람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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