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 (餘震)
이 병률
다 살고 치우고 나서야 알게 된다
찬장 뒤쪽으로 훤히 나 있는 뒷문을
그 문 뒤로는 한여름에도 눈이 펄펄 날린다는 비밀을
한참을 열어 놓고서야 알게 된다
처음의 처음까지 다 이해할 수 있음을
여진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된다
그러고도 가끔은 자고 있는 중에 문이 열린다
열린 문이 열린다
봄날은 갈 것이다
그 사실을 보내는 동안 여름날도 갈 것이다
양손으로 상자를 받았는데 상자를 내려놓지 못하고
상자를 열게 되더라도
무엇이 뼈고 무엇이 옷이며 지도인지를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은 다음에야 다 볼 수 있으리
뒤늦게 더듬어서라도 다 볼 수 있다면
아무것 없이도 아름다우리라고
대륙의 끝으로 자신을 끌고 가
한없이 데리고 울다 지친 이
그가 들썩일 때마다 뒷문이 울린다
조금은 알게 될 것이라고
그가 끄덕일 때마다 뒷문이 따라 열린다
비릿한 뒷일들도 문지방을 넘게 될 것이라고
갈라진 마음 끝에 빛이 들듯
그렇게 가을날도 갈 것이다
-이병률, 시집'눈사람여관'. 문학과지성사
아..와 어..는 다른데,
그 다름의 으뜸은 시
소란스런 일상에
내 손바닥의 자석
휴대폰도 노상 잃어 먹는데,
지친 지난 여름에 산 시집쯤
어드메 집구석에 있고 말고
찾을 생각은 아예 하덜덜도 말았지
이병률시인이야
모두의 탁월한 선택이라
흔한 넘의 집 담벼락에 굵게 올린 시
또렷함이 맘에 들어 퍼와보니
올린 이
나처럼 노안이구나
군데군데 틀려, 고치려니
둘러 가다
올 데 갈 데 없이 멱살 잡힌 격
잡힌 참에 통성명부터 다시 나누니,
말을 들을 수록, 맘이 들리고
말을 새길 수록, 뺨이 새겨진다
어느 끝이든
끝까지 가 본 사람은
그 곳에서 벼락치고, 눈보라 일어도
빛이든, 바람이든, 꽃이든
제 마음대로
피었다가 또 지었다가 하는 걸 보았겠지
*사진 위는 시인의 시
*사진과 사진 아래 사설은 쑥과마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