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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분홍, 한때

| 조회수 : 1,050 | 추천수 : 0
작성일 : 2018-09-05 02:23:14

분홍 
                              
                                                                          - 송종규


저 작은 꽃잎 한 장에 천 개의 분홍을 풀어놓은 제비꽃, 저것을 절망으로 건너가는 한 개의 발자국이라 한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허물어지는 빛들과,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또 누구의 무덤이라 한다면

바이올린과 기타와 회중시계가 들어 있는, 호루라기와 손풍금과 아쟁이 들어 있는 액자 속을 고요라 한다면
층계마다 엎드린 저 납작한 소리들을 또 불운한 누구의 손바닥이라 한다면

하루 종일 꽃잎 곁에서 저물어도 좋겠네 절망절망 건너는 발자국마다 분홍 즙 자욱한 삶의 안쪽
손바닥으로 기어서 건너가도 좋겠네

세상은 슬픔으로 물들겠지만 꽃잎은 이내 짓무르겠지만 새의 작은 가슴은 가쁜 호흡으로 터질지 모르지만

슬픔으로 물들지 않고 닿을 수 있는 해안은 없었네 짓무르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세월은 없었네

눈부신 분홍, 한때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 민음사, 2015년, pp.18~19





닿지 않아도 좋으니,
해안 따위는 영원히 닿지 않아도 좋으리니,
슬픔으로 물들지 않고..

건너지 않아도 좋으니,
나 따위는 패쓰해도 좋으니,
짓무르지 않으면 참 진리인 것을..

기어이 나를 통과하여
큰 깨우침 주시는 슬픔과 짓무름에 백기를..



p.s.: 저 분홍꽃은 작약입니다.
Sarah Bernhardt라는 가수이름을 딴 종류입니다
만발하면, 그 크기가 소시적 우리 막내의 머리통만 하다지요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Harmony
    '18.9.5 4:29 AM

    자다깨서는 책한줄읽다
    들어와봤어요.
    말이 책읽기이지
    잡념상비처방으로 활자만 읽습니다..
    작약하면 자주색만 연상되었는데 꽃색이 그야말로 꽃분홍이네요.
    큰깨우침 주시는 슬픔과 짓무름에 ...

  • 쑥과마눌
    '18.9.5 6:07 AM

    자다깨서 책을 읽을 정신이면 대단한 거입니다
    저는 자다 깨질 못해, 저 사진속 저놈이 걷어차고야...ㅠㅠ

    큰 깨우침은 결코 달갑지 않다지요

  • 2. 행복나눔미소
    '18.9.6 12:48 AM

    짓무르던 시절이라 생각했던 시기도 지나고 나니

    '눈부신 분홍, 한때'였더군요.

    나이가 든다는 것의 좋은 점은 일상의 감사함을 알게해주는 것이네요 ㅎㅎ

  • 쑥과마눌
    '18.9.6 1:03 AM

    댓글 또한 시라서, 눈물이 나렵니다 ^^;;

  • 3. 에르바
    '18.9.6 1:48 PM

    이렇게 또 시 한 편을 읽게 되네요.
    어릴때 집 화단에 피어나던 여러해살이 꽃중에
    하얀 홑겹의 작약이 있었어요.
    어딘가 귀티가 나고 고상해 보이던 흰작약은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참 좋아하시던 화초였어요.
    갖난아기 주먹만하던 단아한 작약꽃이 눈에 선합니다.

  • 쑥과마눌
    '18.9.6 9:37 PM

    제가 기르는 작약도 홑겹이라지요
    저는 빨강이라 모란 분위기도 나고, 정말 꽃송이가 크답니다.

    정원을 가지고, 이리저리 화초를 심다보니,
    어릴 적 외가에서 본 꽃들을 찾아 심고 있는 저를 발견했어요
    저는 외할아버지께서 참 작약을 좋아하셨는데..
    꽃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서
    좋기도 하고, 그립기도 하네요

  • 4. whitecat
    '18.9.12 3:13 AM

    예전에요.
    시가 있어서 세상이 참 좋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단지 시가 있기 때문에, 그거 하나로도 숨을 쉴 수 있다고.

    너무 오래 시를 안 읽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근차근, 편식을 그만두고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

  • 쑥과마눌
    '18.9.26 2:59 AM

    저도 오랫동안 안 읽었던 시예요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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