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내내 다양한 공부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관한 간단한 글을 읽고
그 다음에 증여와 교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마지막 시간에 하이쿠의 대가 바쇼에 대한 글, 이어서 부손에
대한 글을 읽은 다음 우키요에에서 기억할 화가 스즈키 하루노부에 대한 글을 읽었답니다. 물론 화요일의
하일라이트는 맛있는 점심식사이지요. 점심을 먹으면서 여기까지 하고 머리는 생각하지만 혀는 그것이
불가능한 지점이 있더라고요. 배가 더부룩해지기 직전 마무리하고, 증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증여에 대해서요.
잠시 집에 와서 쉬기 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과 우키요에 어느 것을 더 자세히 볼까 망서리다가
마음이 하루노부쪽으로 기운 것은 잘 모르기때문이지요. 사실 에도시대, 하이쿠, 그리고 우키요에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이런 책은 누가 사나?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혼자 웃게 되네요.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서 멋대로 판단하고 문을 닫아버리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요?
조닌(상인)들이 에도 시대에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자 무사들의 문화가 아닌 자신들의 문화를 가꾸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읽다보니 조선 시대 후기의 민화, 판소리등이 생기는 과정이 생각나면서 각각의 나라에서 사회가 변화하는
것이 어떤 점에서는 공통점이 어떤 점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나는 그런 지점을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드네요.
다색판화의 색, 그리고 완전 평면을 이루고 있는 장면이 서양에 처음 알려졌을 때 화가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지요. 그러니 문화에서 낯선 것에 어떻게 노출되고 거기서 그대로의 차용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에 맞는 변용을
거친 수용이 가져오는 또 다른 문화, 그것이 상당히 매력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은 자꾸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키요에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되지만 각 화가들은 나름대로 특징이 있고 그 사람 개인의 경우에도 다양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한 사람에 대한 지나친 요약적 설명은 사실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이왕이면 한 사람에 대해서 알려면 다양한 작품을 찾아서 보려고 합니다. 마침 그의 그림을 여러 점 올려놓은
싸이트가 있어서 도움이 되는군요.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에서 오늘 칸트와 라캉이 살짝 인용되었더군요. 그런데 라캉의 현실계, 상상계
읽은 적은 있으나 말로 되어 설명이 편하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간단하게라도 라캉에 대해서
함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수업을 끝내고 무엇인가를 보고 싶거나, 들어보고 싶거나 혹은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날, 아니면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꿈꾸게 만드는 날, 그런 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배우는 것의 즐거움을 누리는 날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