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겐 네덜란드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그리고 고흐의 나라이지요.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언젠가 가보고 싶은 나라이기도 하고요.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반가워서
예전에 썼던 글들을 뒤적여보니 2000년도에 쓴 글이 한 편 있더군요.
그림이 내게 건네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김원일의 그림속 나의 인생이란 책에
관해서 쓴 글입니다.
도움이 될까 싶어서 올려 놓습니다.
어제는 한길사 주최로 북한산에서 이 이화선생님을 모시고 하는 등반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에 참가하겠다는 신청을 해 둔 상태에서 며칠간 감기, 몸살이 심했는데 그래도 가고 싶은 마음에 약을 먹으면서 몸의 컨디션을 조절했지요. 무려 3일이나 밤에 먹은 약은 몸의 상태를 어질어질하게 하면서 내리 자게 만들더군요. 그런 와중에서 손에 든 책이 김 원일의 산문집 그림속 나의 인생입니다.
아들녀석을 데리고 도서관에서 함께 신청한 네 집이 모여서 이북오도청앞에 갔지요. 그곳만 해도 꽃이 너무 아름답게 피어 그저 눈이 부신 느낌이었지요. 이런 별천지를 곁에 두고도 제대로 감상못하고 세월이 속절없이 가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이번 등반의 목적에는 이제 막 이 이화선생님이 쓴 책을 읽기 시작한 아들에게 글을 쓰는 분과의 만남을 통해 아이가 좀 더 친밀감을 통한 글읽기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지요. 그런 취지를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너무나 친절하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를 대하는 듯한 태도가 참 아름답더군요.
한길사에서 회원신청 가입원서를 나누어주면서 가장 감명깊었던 책과 좋아하는 취미나 특기를 쓰라는 난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숱한 글을 읽었는데 무슨 책을 가장 감명깊다고 쓰나 하는 망설임이 있었는데 저는 결국 르네상스인 미켈란젤로라고 썼고 취미난에는 그림보는 일이라고 썼습니다.
사실 저는 그림을 독자적으로 보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설을 읽어야 그림을 더 잘 파악하는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그림을 보는 일, 그림을 읽는 일이 제게 주는 기쁨과 슬픔을 생각하는 일이 잦은 편이더군요.
얼마 전에 고흐가 그린 감자먹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어떤 수사보다도 더 절절하게 인간의 삶을 증언하는 그림이 주는 전율을 느꼈지요. 그림이 갖는 직접적인 호소력이 마음을 뒤흔드는 경험을 했습니다. 제가 그림에 마음을 열면 그림이 제게 말하는 것이 정말 강렬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 그림보는 일이 제게 주는 의미가 커지는 것을 느끼는 셈입니다.
김 원일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가족들에게는 말하기 어려운 고초를 준 삶의 아픔을 간직하고 살아온 작가입니다. 그의 동생도 (김 원우)역시 소설가인데 두 사람의 작품경향은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막내 동생이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그 동생도 시를 썼다고 하더군요. 본인은 10대의 자폐라는 말을 쓸 정도로 혹독한 시절을 보냈던데 그는 사실 그림그리는 일을 업으로 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림을 읽는 소설가의 시각이 예사롭지 않았고 그림 한편마다 자신의 인생이야기, 화가의 인생이야기가 묻어났습니다.
한편 저로서는 처음보는 화가나 그림의 소개도 있어서 그런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지요.아 저 그림은 꼭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여러 작품 있었고요. 저는 몇년 전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던 시절에 파리와 런던에서 그림을 보는 일을 10일정도 지속적으로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 프랑스로 유학가 있던 동생의 도움으로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유난히 그림만 보러 돌아다니고 왔습니다. 그 때는 잘 모르고 보았는데 후에 그림에 관한 책을 읽다보니 참 후회가 되었습니다. 미리 준비된 상태로 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컸고요.
다시 그림을 보러 갈 수 있다면 어디에 가서 무엇을 볼 까 하는 공상을 많이 하는데 렘브란트와 터너, 그리고 모네와 고흐, 르노와르, 루벤스, 카라바지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를 보고 싶습니다. 혼자 속으로 생각하지요. 그런 날이 오면 어떻게 보러 갈 것인지. 아무도 없이 혼자 집중해서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와 함께 간다고 해도 그림을 보는 일은 혼자하고 싶지요. 그래야 그림을 보는 일에 집중할 수 있고 상대방의 관점이나 시선에 흔들림없이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김 원일의 그림읽기도 대부분 현장에서 본 느낌을 쓰고 있더군요. 상당히 여러번 그림을 보러 다녔고 그 때마다 새로 발견한 그림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작품에 대한 글은 한국의 화가와 연결하여 쓴 것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모딜리아니와 구 본웅에 대한 글입니다. 이 상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구 본웅 이야기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로트레크의 작품에서는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장 승업의 그림에서는 천재란 무엇이고 예술에서 천재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는가 하는 문제를,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에서는 혁명시기의 러시아에서 갑자기 들어선 아버지를 낯설게 바라보는 자식들의 시선을 보면서 만약 자신의 아버지가 그런 식으로 들어왔다면 그들이 느꼈을 공포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모네의 그림에서는 자신의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빛의 변화에 주목하는 모네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요. 그림도 그림이지만 그림을 설명하는 방식이 제 마음을 휘젓고 있습니다. 아, 그림에 대해 이렇게 접근할 수도 있구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또 한 번 다시 읽게 되는 글도 있습니다.
한 권의 책에서 저자가 선택한 화가를 보면 그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음악의 선곡이나 책의 선정과 마찬가지로 그림의 선택도 결국 작가의 내밀한 세계를 읽어내는 코드가 되더군요. 왜 세잔이 중요한지를 알게 된 이야기. 샤갈에 대한 단상, 김 대성의 석굴암에 대한 이야기,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대한 언급등도 새겨볼 만한 글이었습니다.
새로 알게 된 화가인 코린트와 놀데, 그리고 호퍼와 벤 샨, 좀 더 잘 알고 싶은 콜비츠, 김 관호, 김 종태, 이 인성, 그리고 권 진규등도 있습니다. 이렇게 글속에서 뜻하지 않게 조우하는 화가들이 제 그림보는 재미를 배가하는 셈입니다.
북한산에서 보는 자연을 눈앞에 두고 누가 저런 봄의 느낌을 그림으로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했습니다. 자연은 절로 있어도 인간이 가서 보아야만 사람에게 의미가 있듯이 화가의 그림이 널려 있어도 인간이 말을 붙여야 그림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고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림을 볼수록 새록새록 느끼는 날들입니다.(2000.4.17)
깨우니 소파에 다시 가서 드러누운 아들
그 아이가 깨어나길 기다리면서 보는 렘브란트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아르테미스인데요
사실은 모델이 자신의 부인이랍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신화속의 아르테미스와 너무 달라 웃음이 나긴 하나
빛으로 빛나는 여인을 바라보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지요.


이 그림은 성서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지만
그런 종교적인 함의를 모르더라도 아주 강렬한 인상에 사로잡히게 되는 그림일 것 같아요.
벨사자르왕의 표정에서 눈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the blinding of samson인데요
오히려 눈이 머는 현장에서 빛나는 색으로 인해
그것이 정신적인 개안의 현장인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그림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입니다.

호머의 흉상앞에 서있는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 유명한 방탕한 아들의 귀환을 그린 장면이지요.
볼 때마다 마음속에 새로운 느낌이 솟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따로 모아서 보아야 할 것 같네요.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반룬이 쓴 렘브란트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는데
네덜란드의 역사가 책속에 녹아있기도 해서 단순히 화가에 관한 소설이라고 한정지어서
설명할 수는 없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에라스무스의 나라이기도 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물리적 피난처를 제공했던 나라
지금도 많은 것에 열려 있는 나라
제겐 네덜란드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많이 실현하는 나라라는
인상이 강하게 박혀 있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침이라 더 긴 글은 쓰기 어렵네요.
이상하게 어제 오늘 그림 보는 일에 마음이 폭발하는 기분이 들어서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기도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