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상하게 더 친밀한 느낌으로 글을 읽게 되네요.
오늘 집에 들어와서 앉으면 모란님께 글을 쓰다 보니
다시 화제가 이윤기로 돌아와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이 한 편 있어서 올려놓습니다.
제가 이 윤기라는 이름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번역작업을 통해서입니다. 번역, 그것도 너무 어렵고 복잡한 책만을 번역하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글에서 우리말이 살아나는 생명체가 되는 기분을 느겼지요. 안 정효의 번역과는 또 다른 맛이 느껴졌지요.
저는 번역본 책을 읽을 때 번역자를 가려서 보는 편인데 왜냐하면 글에서 한국어의 맛을 못 살린 글을 읽을 때 작품에 몰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 혼자 생각하기로는 번역은 번역하려는 책의 언어보다는 우리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해야 하는 작업이로구나 하고 있지요.
그런 이 윤기가 1994년인가 천국의 문이라는 3부작을 썼습니다. 상당히 철학적인, 종교적인 사유가 담긴 글이고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라 인간 이 윤기를 아는데 도움이 되는 소설이었지요. 특히 문화와 예술에 경도되는 인간, 시골에서 살다가 대도시인 대구로 나와 문화적 충격을 겪는 청소년기의 이야기, 종교적인 문제로 방황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실감이 났고 어떤 부분은 좀 더 나이가 든 후 다시 읽어보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하는 대목이 있기도 했지요.
저 혼자 속으로 이 사람은 소설을 쓰면 참 좋은 소설가가 되겠구나, 그러나 사변이 많아서 대중에게 어필하고 많이 팔리는 소설이 되기는 어렵겠다. 그래도 참 좋은 작가가 탄생한 것을 혼자 축하하는 정도였지요.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글이 다양한 형태로 발간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에세이 온 아메리카라는 에세이가 나와서 사 보니 그는 어느 사이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더군요. 실제 학력은 대학을 마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는 신화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교환교수로 가서 그런 에세이를 써냈고 그 이후 어른의 학교, 무지개와 프리즘 등의 에세이를 연달아 발표합니다. 그런데 그 글들 속에 인문학에 대한 애정, 고전에 대한 애정을 담뿍 담아서 저를 끌어당기는 글을 보여주고 있더군요.
아마 그 때부터 이 윤기가 쓰는 글들은 에세이, 소설을 가리지 않고 읽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에는 나무가 기도하는 집이라는 소설과 이 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나무가 기도하는 집은 중편소설정도의 분량인데 가방끈이 짧아 텔레비전을 학교 삼아 보기 좋아하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우야아저씨인데 실제 이름은 이 민우입니다. 그러나 팔공산 밑자락에서 사는 아저씨의 동네는 사람들의 이름에 야를 붙이는 습성이 있어서 그는 이름의 끝에 야를 붙여 우야아저씨라고 불리지요.
그는 지난 해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살고 있는데 그가 하는 일은 농사 이외에도 나무, 그것도 고아가 된 나무를 돌보는 일이 있습니다. 나무에도 생명이 있고 나무도 사람의 느낌을 알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 그에게는 나무가 그냥 나무가 아니지요. 그래서 얼마 되지 않는 보리밭이 해마다 버려지는 나무를 돌보느라 야금야금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있습니다.
그런 집에 어느날 불청객인 손님이 왔습니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여인이 그 집이 기도원인 줄 알고 들어왔다가 어머니가 쓰던 방에서 장농서랍 속에 있던 어머니의 가락지를 끼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지요.
그런데 이 우야아저씨는 여느 사람과는 달리 그 여자를 윽박지르지 않고 왜 기도원에 가려 했는지, 왜 가락지를 끼고 있는지 구박하지 않으면서 그 여자의 회복을 지켜봅니다.
드디어 시간이 며칠 지나자 그 여자는 자신의 형부가 자신을 범한 이야기, 그래서 언니가 남편도 동생도 내칠 수 없어 자신을 기도원에 보낸 이야기를 하지요. 그들은 어머니 산소에서 한밤중 달빛만 비치는 속에서 하나가 되는데 그들의 행위에 대한 자의식이 없을 정도로 몰두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그 여자 자야(김 송자라)아가씨는 종적을 감춥니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에서 나온 소행인데 우야아저씨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자신에 대한 긍정의 첫 발자국임을 아는 사람이라 열 일 제치고 자야아가씨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드디어 자야아가씨를 찾아서 집으로 데려온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이야기 중간중간에 이야기꾼의 소질을 발휘하여 신화및 다양한 이야기를 감칠 맛 있게 끼어놓았는데 그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것이 에뤼시크톤의 말로에 관한 것이었지요.
에뤼시크톤은 신들에게 반항적이고 거만한 인간이었는데 어느 날 데메테르 여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참나무를 베어냅니다. 하인들에게 나무를 베어내라고 지시하자 이를 부당하다고 여긴 하인들이 간청합니다. 나무에게도 생명이 있는데 하늘이 용서치 않으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이런 간청을 묵살하지요. 화가 난 데메테르는 그에게 걸신이 들리는 벌을 내립니다. 그는 무엇이든 보는 대로 먹어치우고 심지어는 딸마저도 팔아버리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도 먹어치워서 그가 죽고 남은 자리에는 그의 이빨만 덩그라니 남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두가지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무에 대한 것을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실제로 제가 이사온 아파트의 베란다에는 유난히 나무가 잘 자라고 있어서 보는 제 눈을 즐겁게 해 주는 데 알고보니 15층에 사는 할아버지 한 분이 정성껏 가꾸고 계시더군요. 소일삼아 한다고 보기에는 그 정성이 남달라서 여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지요. 그 노인에게는 나무가 그저 소일거리가 아니라 정성을 쏟는 존재인 것이고 그 덕분에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것을 보면서 나무를 심는 사람이란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사서 길러 본 화분에서 늘 실패한 아픈 기억때문에 저는 화분을 갖는 일을 포기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아는 집에 놀러 갔더니 베란다에 잘 자란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러워했더니 그 집 주인 왈 마음의 여유를 갖고 정성을 들여야 나무가 잘 자란다고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인데도 그 날 그 이야기가 마음속에 와 닿았습니다.
제가 사는 방식을 한 번 다시 둘러보게 된 날입니다. 아무 일에도 그저 되는 일은 없구나 세상에 공짜는 없어 그런 마음이 들어 부끄럽기도 하고 내 삶에 시간을 분초로 다투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으랴 좀 여유있게 주변을 둘러보며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기도 했지요.
이 윤기가 우리에게 펼쳐주는 그 유장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신화와 전설의 세계에서 상상력을 한 번 펼쳐 보는 것, 지식의 과잉으로 관념적인 색채가 있던 주인공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감성과 자연에 밀착한 아름다운 인간상이 보여주는 통찰의 세계를 만나는 일이 이 무더위에 좋은 휴가가 되지 않을까요?
책 소개의 분위기로 보면 신화의 세계를 그린 그림들을 소개하고 보아야 할텐데
며칠 째 마음이 모네에게 기울어져 있어서
그냥 마음 내키는대로 보기로 했습니다.
이탈리아에 다녀온 하모니님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저는 꼭 시간을 여유있게 쓸 수 있는 주부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미술사 시간에 초대를 한 것인데
알고 보니 직장에 다니시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많은 시간을 내어서 여행을 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음악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니
부럽게도 음악관계의 일을 하는 사람일까?
혼자 공상을 하기도 했네요.
여기까지가 모네가 그린 이탈리아 그림입니다.
모네의 그림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피로가 확 풀리는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