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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산골편지 -- 트럭 컴플렉스

| 조회수 : 1,365 | 추천수 : 21
작성일 : 2004-08-23 03:37:42


추수철에는 '고양이 손도 빌릴지경'이라는 옛말이 실김나게 한다. 이제 고추는 거의 마무리를 해야 할 단계이지만 이제까지 따서 말린 것들을 선별해야 하는 일들이 엄청나다.

누렇게 누렇게 옆산 쫓아 색이 변하는 벼를 베기 위해서는 논의 물을 다 빼야 하는데 초보 농사꾼의 논은 물빠질 기미가 안보인다.

열심히 삽들고 뒷고랑 친다고 드나드나 별반 효과가 없다고 걱정이다.
대추는 비바람에 땅에 내려와 앉은지 오랜데도 손길줄 여유가 없어 눈길만 주고 혀만 찬다.

감자도 어찌나 바쁜지 급한 대로 그때 그때 한 바구니씩 캐먹는중이다.
애써 심어가꾼 홍화씨는 바구니들고 올라가 보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만 지난 비에 다 떨어져 풀에 섞여 놀고 있었다.
빈 바구니 들고 내려오는데 더운 날 윗밭까지 오르내리며 얼굴이 붇도록 김매준 생각을 하니 씁쓸했다. 차라리 심지나 말 것을.............
...................................................

추석이 내일이라 서울에 가야 하는데 급한 일들이 너무 산골에 널려 있어 통제가 안된다.
아침부터 비가 오니 일이 더 더디다.

아이들을 집에 두고 밭으로, 들로 다니며 산골비울 준비를 한다.
이사와서부터 지금까지 집을 잠그고 다닌 적이 없다.
잠그는 것도 만들지 않았으니 서울에 며칠 묵든 어떻든 그저 편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를 두고 사람만 옮겨 다녔다.

그런데 고추말린 것을 하우스에 두고 가려니 이웃이 더 말렸다. 컨테이너에 다 옮겨 놓고 잠그고 가라는 것이다.
이런 때 농작물을 제일 많이 도둑맞는다나.................

일년 내 고생한 생각을 하니 그리해야 할 것같아 그리하기로 했다.
그 많은 것을 다 옮기고 나니 진이 다 빠져 서울갈까 싶지가 않았다.
오후 4시에 4식구 트럭에 올랐다.

아이들은 형들 본다고 들뜬 마음이 트럭을 찌르지만 두 농사꾼은 두 눈만 껌벅일 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올라가는 길에는 산골만큼이나 예쁘게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난 가을을 좋아하면서도 가을앓이를 어김없이 한다.


산골에 와서는 달라지겠지 싶었다. 추수때와 겹치니 그럴 여유가 있을라고 싶어.
그러나 산골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었다.
여전히 깔깔한 바람에 살갗이 반응을 하며 가슴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유학가고 싶은 가슴 속 응어리가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감당못하기는 마찬가지고.....

결국 말수가 적어지고 웃음을 아끼게 되는 가을병이 도진 것이다. 산골에서도.
그러다 어쨋든 서울나들이를 하게 되었으니 오가는 바람에 마음을 헹구어내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늘어놓은 일들을 뒤로 하고 산골을 과감히 떴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가을나무에 눈길을 주다가 옆 승용차 안의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마냥 얼른 머리를 돌리게 되는 거였다. 내가....
그러기를 몇 번 하다보니 옆을 보기가 싫었다. 가슴도 쓸쓸해지고..................

귀농 후 수없이 서울을 오가면서도 이리 민감하지는 않았는데 하고 마음을 쓸어내리려 하면 할수록 더 질기게 오감을 자극했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휴게소에 잠시 들러 커피마시는 그 여유가 좋아서이다.

그러나 이번 추석에는 휴게소에 들리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트럭이다 보니 트렁크에 넣을 짐을 차 안에 다 넣고 가야 한다. 혹여 비가 올까봐.

그러니 발 아래에까지 짐이 차지할 수밖에.
신발도 벗어서 한 쪽에 찔러 넣고 짐 위에 발올려 놓고 오가는 것이 이제는 상식처럼 되었다.

그런데 휴게소에 예전처럼 차 한 잔 마시기 위해 들러보라.
우선 짐 속에서 신발을 찾아 문을 열고 밖으로 던진 다음 내려 서서 신어야 한다.

6인이 타는 포터 더블캡인데도 아이들이 크다보니 장거리에는 뒷좌석에 서로 자기 위해 싸움이 잦았다.
결국 생각해 낸 것이 뒷좌석에는 딸아이가 자고 발놓는 곳에 돗자리를 깔고 큰놈이 누워 잔다. 물론 신발은 다 벗어 돗자리 밑에 넣고.
그러니 내 신던져 신으랴, 뒷자리의 아이들 신발찾아주랴 벌써 기분은 번데기처럼 구겨져 버리고 만다.

예전에 서울 오갈 때에는 그래도 덤덤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본가와 친정에서 산골에 필요할 거라며 주시는 짐을 실었는데 모습이 가관이었다.

한쪽에는 각목과 PVC 파이프 등을 실었고 한쪽에는 의자, 책상, 바구니 등을 실었는데 거의 망한 집 이삿짐 같았다.
사이사이로 찔러 실은 자루들은 떨어지는 낙엽만큼이나 쓸쓸해 보였다.
산골로 향하는데 다 내 트럭만 쳐다보는 것 같아 또 마음이 쓰였다.
거기까지도 좋았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려는데 톨게이트 직원이 밖에 서있다가 우리 게이트를 막고는 자동표를 자기가 뽑아들고 주지 않았다.
20대로 보이는 직원이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한동안을 그러고 있는거였다.
화를 참으며 하늘을 보고 있는데 퉁명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짐을 이렇게 실으면 어떻게 합니까? 덮개를 씌워서 정리한 다음 다녀야지, 짐이 이게 뭡니까?”

가을은 산골에 어울리게 정리되어가는 가치관도 뒤흔들어 놓을만큼이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

가을에는 왜 하늘이 높아지는걸까?
요즘 밭걷이를 하면서 며칠 동안 입 안으로 오물거리는 말이다.
가을만에라도 깔깔해진 마음을 넓게 쓰라고 하늘이 비껴나 앉은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까지 배려를 하는데 못이기는 척하고 가슴을 열었다.
잉크번지듯 가슴 밑바닥에까지 펴져드는 가을내음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그 기분 그대로 차 한 잔 들고 툇마루에 나와 앉으니 낮에 옥수수밭에서 보았던 어린 꿩의 코고는 소리가 어둔 숲에서 들리는듯하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골에서 2001년 10월 12일 배동분 소피아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재영맘
    '04.8.23 5:56 PM

    님의 맘이 여지없이 느껴집니다.
    여름의 그 쟁쟁한 더위에 한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어느새 가을인가요?
    항상 건강하세요.

  • 2. 하늘마음
    '04.8.24 1:33 AM

    이 글이 귀농 다음 해에 쓴 글이니 한참 전의 일이네요.
    지금은 많이 초연해 지네요.
    무엇이 중요한지를 산골살이 하면서 많이 자연에서 배웁니다.

    사람에게 있어 무엇이 중요한지.
    사람에게 어떤 향기가 나야하는지 말입니다.

    저 글이 10월 글인데 지금은 8월인데도 가을같아요.

    산골에는 서늘한 기운이 영낙없이 가을입니다.

    가을 많이 느끼시고, 건강하셔요.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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