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희야, 너는 어디 있니?'
'넌 왜 돈을 버니...'
"그 속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은 없을까?"
'나'는 어디에...
결혼은 두 사람의 만남이지만
결혼 생활은 양쪽 집안에서 이뤄지잖아요.
결혼 1년 차, 2년 차, 세월이 흐를수록 현실이 주는 무게가 크더라고요.
직장을 다녔으니
낮에는 학교 가서 수업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살림과 육아가 기다리고 있지요.
더욱이 어릴 때 아이가 몸이 약하고 아파서 마음이 더 안 좋았어요.
독한 약을 한주먹씩 6년간 먹어야 했는데,
우리가 맞벌이하니 나중에는
저희 어머니께서 전주로 아이를 데리고 가서
여섯 살까지 키워 주셨습니다.
육아의 부담은 덜었지만 아픈 아이를
늘 가슴에 안고 사니까 마음이 편하지 않지요.
챙겨야할 시댁 식구도 많았어요.
시할머니, 시부모님, 그리고 누님과 동생 다섯.
사람은 많아도 돈 버는 집은 저희 뿐이다 보니
시부모님 환갑, 결혼식 등등
집안의 모든 행사를 다 챙겨야 했습니다.
저마다 출가한 뒤에는 명절이면 30명 가까이 모이는데,
명절 음식 챙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제사 때면 영광으로 내려가 제사 준비해야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싶은데,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렇게 사는 건가 보다 했어요.
남편은 신문사 일로 매일 늦게 들어오고
(많은 분이 아시듯이 이낙연 기자는 정말 치열했어요. 과로로 병원에 수차례 입원할 정도였으니까요)
직장과 육아, 맏며느리 노릇까지
저는 파도에 밀려다니는 사람처럼 살았던 듯해요.
남들이 보기엔
슈퍼우먼처럼 씩씩해 보였을지 몰라도
저는 항상 ‘나는 어디에 있나?’
표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요즘 애들 키우며 직장 다니는 엄마들 보면 그때 제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 시절에는 정말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나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김숙희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더라고요.
저희가 결혼할 당시 막내가 초등학생이었는데, 그 막내를 대학까지 보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어요.
“다 이루었도다!”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출처] 숙희씨의 일기 #11 "나"는 어디에?|작성자 여니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