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처단하지 못한 우리 역사에서 올바른 정신으로 식민시대를 살아온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화입니다.
1)가짜 권총
3.1운동 준비를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만해는 당시 부자로 소문났던 민영휘를 찾아갔다. 그에게 독립운동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권총을 꺼내 위협했다. 민영휘는 겁에 질려 협조하겠다고 만해에게 다짐했다. 다짐을 받은 만해는 권총을 민영휘 앞으로 던졌는데, 진
짜 권총이 아니라 장난감 권총이었다.
2)저울추
만해는 언제나 냉방에서 지냈다.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힌 산단 말인가.'라는 생각에서였다. 만해가 생각에 잠길 때면 차디찬 냉방인데도 불구하고 꼼짝 않고 앉아서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했다. 움직임이 없다 하여 어느새 그에게는 '저울추'라는 별명이 생겼다.
3)부러진 펜촉
1927년 이상재 선생의 장례를 치를 때 일이다. 만해는 자신의 이름이 장례 준비 장의 위원 명부에 올라가 있자 찾아가 자기 이름을 펜으로 박박 그어 지워버렸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펜촉이 부러지고 종이가 찢어졌다. 3.1운동 당시 이상재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그의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턱없이 관대해지고 마는데, 한용운은 그런 감상에 젖지 않고 단호했던 것이다. 그것이 만해였다.
4)소화를 소화
1927년 2월 한용운은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민족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입장 차이로 갈라지지 말고 완전한 해방과 독립을 이룰 때까지는 대동단결하자는 뜻으로 만들어진 신간회의 일을 바쁘게 하던 중, 전국에 공문을 보내려고 인쇄해온 봉투 뒷면에 일본 연호인 '소화'(昭和) 몇년 몇월 며칠이라 찍힌 것을 본 그는 아무 말 없이 1천여 장이 되는 봉투를 모두 아궁이에 넣고 불태워버렸다. 그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에게 한용운은 태연하게 말했다.
"어험, 소화(昭和)를 소화(燒火)해버리니 속이 시원하군."
일본을 불에 태워버린 것 같은 기분이라는 뜻이었다.
5)성북동 임야 20만평
1931년 6월 월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개혁운동과 독립운동을 동시 추진할 발판을 마련하려 하였으나 늘 자금이 부족해 쩔쩔매는 형편이었다. 그런 어느 날 잡지사로 식산은행 직원이 찾아와 서류를 내놓으며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도장이라니? 무슨 일이오?"
한용운은 불길한 예감으로 눈을 치떴다.
"아니, 아직 모르시고 계십니까? 성북동에 있는 임야 20만평을 선생님께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다 도장만 찍으십시오."
"뭐라고? 왜 나한테 그 많은 땅을 줘? 당장 나가!"
불길한 예감의 적중에 한용운은 천둥치듯 호통을 쳤다. 그건 총독부가 판 큰 함정이었다. 민족지도자들을 그런 식으로 줄기차게 회유해왔던 것이다. 그 미끼에 걸려든 대표적인 사람이 소설가 춘원 이광수였고, 시인이며 사학자인 육당 최남선이었다. 이광수는 지난날 도쿄 2.8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었고, 최남선은 기미독립선언문을 쓴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미독립선언에 나섰던 민족대표들도 한 사람, 한 사람 회유당해 이제 남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만해 한용운이었다.
6)최남선
최남선이 변절해 중추원 참의라는 높은 벼슬을 얻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몇 사람과 밥상을 받은 한용운이 밥그릇 가운데 숟가락을 푹 꽂으며 엄숙하고 냉정하게 말했다.
"이 자리는 최남선의 장례식이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최남선과 마주치게 되자 한용운이 못 본 체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최남선이 굳이 알은 체를 했다.
"만해 선생,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누구시지요?"
한용운이 눈을 껌벅이며 최남선을 빤히 쳐다보았다.
"육당입니다. 아, 최남선을 몰라보시겠어요?"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었소."
이렇게 내쏘고는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7)최린
3.1운동 민족지도자 중 한명이었던 최린은 변절하여 중추원 참의에 총독부 신문인 [매일신보] 사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최린의 변절소식에 한용운은 어느 날 새벽 최린의 대문 앞에 엎드려 곡을 했다.
"아이고오, 아이고오.."
쇳소리 울리는 한용운의 곡성은 컸고, 그 난데없는 소리에 놀라 집안 사람들이 뛰어나왔다.
"아니, 만해가 아니시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최린이 당황스럽게 물었다.
"내 친구 최린이 죽었다고 해서 조문을 하는 거요, 아이고오, 아이고오..."
그리고 한용운 최린이 부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 다시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8)1931년 겨울의 만해의 삶 - 불교청년총동맹 간부이자 만당 다우언이던 시조시인 조종현의 글
선생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이마가 썰렁하고 냉기가 온몸을 엄습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움칫해졌다. 방 안에는 책상 하나뿐 메모용지는커녕 펜대 한 개도 없었다. 책 한 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벽에 꽂힌 못 한 개에는 선생의 두루마기가 걸려 있었고, 그 위에는 모자가 얹혔을 뿐 방문객의 모자 하나 걸 못도 없었다... 선생은 가사, 장삼, 발우 한 벌 없는 운수납자의 생활이었다.
"조선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이다. 그런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산단 말인가." 만해는 얼음장같이 차디찬 냉돌 방에서 한 점 흐트러지지 않는 참선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