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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수다,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

사춘기의 추억

| 조회수 : 1,346 | 추천수 : 13
작성일 : 2005-09-09 11:35:18
어느 글인가에도 썼지만 저는 혹독한 병고를 치르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원인도 모른 채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던 중3때의 일입니다.

당시 제가 살던,
개울을 끼고 있어서 신작로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야 했던 그 마을은
그래서 조그마한 섬 같은 인상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깨끗하고 조용하여 마음에 쏙 드는 곳이었지요.

그러나 당시 저는 알 수 없는 신병으로 몸이 자꾸 야위어갔고,
음식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으며,
자다가 헛소리도 자주 하여 맏딸에 대한 부모님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항상 일찍 자라고 성화가 대단했지만
야행성 기질은 그때도 있었는지 밤늦도록 책상에 앉아서 놀기 좋아했어요.
내 방에서 내다보면 공사중인 어떤 건물 앞에 수북이 쌓인 모래더미가 보였고,
그 더미 꼭대기에 담배연기를 뿜으며 인부가 앉아 있는 모습도 가끔 볼 수 있었어요.

한여름밤.
그날은 왠지 자꾸 졸음이 와서 일찍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자다가 막연하게나마 이상한 느낌이 엄습하는 것이었습니다.

발치께의 이불이 자꾸만 들쳐지는 거였어요.
처음 한두 번은 당겨 덮었지만 반복되니까 잠결에도 느낌이 나빴지요.
가위 눌리듯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석연찮은 기분에 눈을 살며시 떴는데, 으헉!
그 어둠에도 내 발치께에 시커먼, 집채만한 물체가 화라락 눈에 들어왔어요.

처녀도둑!
사춘기 소녀의 본능으로 직감되는 예리한 위험이 찌리릿 전신을 타고 흐르고.....

순간,
나는 이제 죽는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이래서는 안되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난감했으나
온몸이 마비된 듯한 상황에서도 하필 바로 전날 가사 시간에 배운 내용이 휘리릭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도난방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도둑이야! 하고 호들갑을 떨면
당황한 도둑이 강도로 돌변하여 무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침착하게 대처하라는 내용이었지요.

이를테면, 한밤에 자다가 도둑을 만났을 때, 인기척을 내어 쫓던가
또는 그 도둑을 서비스맨쯤으로 치부하고 눈을 비비며,

“왜 이리 늦게 오셨어요?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었네. 지금 몇 신가?”

이렇게 능청스럽게 대응하면 제 발 저린 도둑이 대개는 물러가게 돼있다고...
또, 도덕책이었던가?
집안에 든 도둑을 창고로 몰아넣고 사람들을 불러 도둑을 잡은 침착한 소년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어린 저는 그저 "음냐음냐" 잠소리를 하면서 몸을 뒤척일 뿐이었는데,
그런데 그 집채만한 물체가 한순간 몸을 낮추면서 한껏 엎드리대요.
일단 안도하여 저는 더 크게 잠꼬대를 하며 다시 한 번 돌아누웠지요.
그러자 그 물체가 조심스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가는 게 아닙니까 !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지요.

제 방 문을 열면 바로 현관이었어요.
그런데 가만 보니 현관에서 무춤거리던, 집채만한 물체가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려서는,
하얗게 질린 채 누워 있는 저를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물론 어두워서 그 물체가 저를 자세히 볼 수는 없었겠지요.

그 순간, 저는 제 방 창으로 바라보이던 모래더미의 인부를 떠올렸지요.
사십 평생 그렇게 위협적인 물체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그 물체가 다시 들어오는 기미가 보이는 순간 저는
마비된 몸을 혼신의 힘을 다하여 크게 뒤척이며 잠꼬대를 하였습니다. 처절했지요.....

이제 더 이상 용기를 낼 수 없었는지 물체는 휭하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현관 문도 닫지 않은 채.
물체가 완전히 가버렸다는 흔적은 반쯤 열린 현관문으로 알 수 있었는데,
그 문으로 훤히 들어오는 달빛의 각도로 보아 시각이 삼경은 된 듯하였습니다.

저는 여적지 그날만큼 하이얀, 그날처럼 밝은 달빛을 본 적이 없습니다.
파들파들 질리도록 하아~얀,
작은 구덩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강렬한 빛무리에 눈동자를 찡그려야 할 정도였지요.
얼른 일어나서 저 문을 잠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으나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은 얼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안간힘을 쓰며 기신기신 일어나 작은 쪽마루에 서서 문고리를 잠그기까지 얼마나 떨리는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그길로 부모님이 주무시는 방으로 뛰쳐들어가서는 대뜸,

"도도도도도도, 도, 도도………"

혼비백산하여 넋이 반쯤 나간 채로 버벅거리는 딸을 보고 얼마나 놀라셨는지
아버지가 얼른 부엌에 가서 식칼을 들고 제 방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현관문과 창문이 다 잠겨 있는 걸 보고는 돌아와서 하신다는 말씀.

"야가 몸이 안 좋더니 나쁜 꿈을 꿨구만!"

그날 저는 부모님 사이에 꼭 안겨서야 잠들 수 있었지요.
담날 아침, 학교에 갈 때 나는 용돈으로 1,000원을 얻었습니다. 맛있는 것 사먹으라고...
엄마의 안쓰러운 마음을 담은 돈이겠지요.

지금도 저는 우리 아이가 좀 힘들어 보이면 1,000원짜리를 건네면서
"아이스케키 사먹자" 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그걸 들고 나가서 500원짜리 막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들고 와서 하나를 건넵니다.
둘이서 하나씩 물고 테레비 오락 프로를 틀어놓고 가끔 서로 쳐다보며 웃다 보면
어느새 아이의 표정이 편안해지는 걸 알 수 있지요.
저도 아마 그때 엄마가 주신 돈으로 평소 못 먹었던 걸 이것저것 사먹으면서
그 악몽 같았던 기억을 털어낼 수 있었을 겁니다.

이후 그날의 일은 환자인 맏딸이 시달린 악몽일 뿐,
우리 식구 그 누구도 저의 그 끔찍한 경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다 돌아가신 제 부모님은 가끔 그 얘기를 꺼낼라치면 그냥 웃으셨어요.
"그래, 그때 니가 많이 아팠지."

하긴 그 이후 3년간 저는 쭉 결핵으로 고생했고 다 나았을 즈음에 또다시 풍파가 몰아쳤는데,
다름 아닌 경운기와 부딪쳐 머리가 깨지는 바람에
그로부터 몇 년간 또다시 후유증으로 시달렸으니
믿지 않으시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주위에서 아무도 안 믿으니 저는 가끔 그 일이 정말 악몽일 뿐이었는지,
나 자신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영향인지,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힘겨운 문제를 안고 자는 날이면
나를 마구 짓누르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걸 아는 남편, 출장 갈 때면 아들을 불러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꼭 당부합니다.

바로 작년까지만 해도 아빠의 당부로 사명감에 불타던 아들녀석은
그러나 이제 엄마는 안중에도 없고 제 흥미에만 골몰하니, 외롭구나, 사십대!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이효숙
    '05.9.9 12:11 PM

    안녕하세요?
    간이 조마조마 하면서 읽었네요. 어린나이에 굉장히 침착하시고 현명하게 대처하셨군요.
    역시 수업시간엔 딴짓하면 안된다는 진리를 또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도 중학생때 도둑을 본적이 있었는데 ...
    한옥에 살던때 여름이라 앞문은 열어놓고 뒷문만 닫아놓고 모기장 속에서 자고 있었는데
    살포시 잠이 들 무렵에 뒷문에 스르륵 열렸다는....컥
    그 뒤로 비숫한 남자만 보면 도둑같이 보이고 막 의심이 가고...
    그런 기억은 어른이 된 지금도 잊혀지지 않네요.

  • 2. 바다사랑
    '05.9.9 1:29 PM

    아이고 내 가슴이 다 떨려요.
    을메나 놀랐을거나...
    맺힌 상처를 풀어내야할긴데..

  • 3. 둥둥이
    '05.9.9 1:47 PM

    아휴..
    추억이라고 하셔서 냉큼 들어왔는데..
    얼마나 무서우셨을까...
    아드님이 엄마를 안중에 없어한다고 슬퍼마세요..
    속에 다 있을꺼예요..^^
    누가 키운 아들인데 엄마가 안중에 없겠어요..그쵸?

    전 자면 죽어가는지라..
    한번은 집에 도둑이 문을 열라고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온 집안 식구들이 불키고 난리를 쳤는데...
    모르고 아침까지 잤다는..
    아침에 식구들이..입을 모아 구박을..ㅠ.ㅠ

  • 4. 건이현이
    '05.9.9 3:02 PM

    헉~ 저도 예전에 자다가 가위 잘 눌리는데 기분 진짜 안 좋아요.
    무서운 꿈꾸고 남편 쳐다보면서 큰소리로(실제로는 개미소리) 부르는데 남편은 못듣고....
    혼자서 아주 죽을 힘을 다해 발가락, 손가락 움직이고는 풀리죠.

    아이둘 낳고 요즘 너무 바쁘니 가위 눌리는 일 없어서 좋긴하네요.
    그 대신 잠이 모자라서....피곤해요.

  • 5. 뽀하하
    '05.9.9 4:26 PM

    전 딱한번 자다가 가위눌린적이 있는데..정말 꺼먼 남자같은물체가..스르륵 다가와서는 저를 한참 쳐다보고는 다시 스르륵 가더라는..
    그때는 눈을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몸을 움직이려니 꼼짝도 할수가 없었고...그래서 너무 괴로워서 다시 잠드는 쪽을 택해서 잤지요..깨어나서 보니 문은 다 잠겨져 있고..물체도 걷는것이 아니고 귀신처럼 스르륵...왔다가 스르륵 사라졌기땜에...가위눌린거였구나..싶더라구요.
    근데 가위눌린거면 몸을 꼼짝도 할수가 없는데..뒤척였다는걸보니 가위눌린건 아니고 정말이었나보네요..휴....꿈도 끔찍한데...실제라면 정말...끔찍하셨겠어요.

  • 6. 름름
    '05.9.9 5:23 PM

    제 동생은 칼까지 든 남자가 소리 지르면 찌른다고 하는데도
    소리 지르고 발로 찼다네요.. 그 땐 그런가보다 했는데요
    동생도 한번씩 몸서리 치며 악몽을 꿀 것 같네요.......
    저도 자취방 문 안 잠그고 잤다가 비슷한 경험에 기겁했구요
    자취방이 반지하라 창가에서 xx하는 x도 있었구요

    왜들 그럴까요?
    자게에서 읽었던 사연들도 그렇구요..

    하지만 강금희님의 마직막 글귀에서 웃고 갑니다 ^^

  • 7. 푸우
    '05.9.9 10:32 PM

    한편의 수필,, 같아요,,
    잘 읽고 갑니다,,글 자주자주 올려주세요,,

  • 8. 강두선
    '05.9.10 2:07 AM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이로군요.
    그 당시, 얼마나 무서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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