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또 글을 쓰게 되었네요.
지난 글(옛 자유게시판)에 이어 옛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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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여름 어느날.
학교 갔다왔는데 아랫집 아줌마가 간식을 챙겨주시는 겁니다.
집에 뭔 일이 생긴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
아줌마는 축하한다고 기뻐해주셨지만
저는 그냥 얼떨떨한 기분이었죠.
저녁에 할머니랑 병원에 갔습니다.
엄마 얼굴이 많이 부어있었고 아직도 아픈지 얼굴빛이 좋지 않았어요.
움직일 때마다 찡그리며 아파하는 모습을
왠지 똑바로 볼 수가 없었어요.
광징히 미워했던 엄마지만
아기를 낳은 한 여인의 모습은...당황스러웠어요.
미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위로하거나 축하해줄 깜냥도 안되어
아주 당황스럽고 얼떨떨한 상황이었죠.
그때,
간호사가 아기를 데리고 왔는데
할머니가 기저귀를 풀으시며 확인을 하시는 겁니다.
제 못된 피는 갑자기 할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죠.
저는 넷째가 생기게 된 이유가
할머니에게 있다고 멋대로 판단하고
안그래도 그 부분에 있어서 할머니한테 원망을 쌓고 있었는데
아기 기저귀를 풀어 성별을 확인하시는 모습을 보며
꼭지가 확 돌았던 거지요.
(뭐, 그렇다고 큰 일을 저지르진 않았지만요...^^)
사실 아주 나중에 제가 스무 살이 넘어
어느날 할머니하고 먹걸리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오해했던 부분이 많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할머니는 남동생을 많이 바라셨던 것이 사실이었어요.
그 연세의 노인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평균적인 가치관이라고 지금은 이해합니다.
(그 가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요. 당연히...)
그냥 어떠한 시대, 어떠한 사회를 살아온 한 개인이
평범하게 갖게 되는, 또는 알게 모르게 학습하게 되는
일련의 사회화의 의미로 이해한다는 거지요.
각설하고...
할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였어요.
우리집 셋째딸이 태어날 때,
그때는 방학이라 시골집에 가족이 모두 가 있었는데
새벽에 엄마가 진통을 시작해서
11시쯤 셋째를 낳았던 걸로 기억해요.
(집에서 낳았는데 제가 열한살 때였으니까 모두 기억하지요.)
저와 둘째는 방안에 못 들어오게 하고
할머니와 외할머니(엄마의 엄마)가 셋째를 받았는데
그때 할머니는 당신도 모르게
"아이구~!"
하는 소리가 나오셨더랍니다.
셋째까지도 손녀를 보게 된 게 섭섭하셔서 그러신 거였는데
아기가 나오는 순간, 그만 그렇게 말씀해버리셨다는 거에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 이후로 그 탄식이 평생 가슴에 남아계시대요.
고생해서 아기를 낳은 며느리한테 차마 못할 말을 했다는 생각에
죄스럽게 생각하고 계셨던 거에요.
"내가 그래서는 안되는데... 그때 뭐가 씌웠는지.. 네 어멈한테 못할 소리를 한 셈이 되었지."
그날 이후 할머니는 스스로 다짐을 하셨답니다.
혹시 나중에 아들 손자를 보게 되더라도
너무 기뻐하지 말자.
내가 며느리한테 그런 죄를 짓고
손녀, 손자를 가리는 마음을 가지면 더 큰 죄가 된다...그런 마음을 잡숫고 계셨대요.
절에 가서도 그걸 사죄하는 마음을 혼자 비시면서
"부처님, 제 죄를 갚기 위해 아들 손자를 바라는 마음을 줄여주십시오."
하고 불공을 드리시곤 했대요.
신기하게도
점점 아들 손자에 대한 욕심이 차츰 줄어들더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막걸리가 아니었음 아직까지도 못 들었을 이야기지요. ^^ )
"내가 그것만큼은 진짜.. 네 어멈한테 미안해서..."
하여간 할머니에 대한 위 이야기는 나중에 듣게 된 것이고
제가 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저는 아기가 너무 낯설어서 기분이 영 이상했고
그냥 마구 혼란스럽고 얼떨떨한 기분에서
할머니가 기저귀를 풀어보시는 걸 보고는
할머니를 막 미워했어요.
(나중에 할머니 말씀은 그때 기저귀를 풀어보았지만.. 생각만큼 좋고 반갑지는 않더라.. 하시더라구요.
그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셋째손녀 낳을 때, 엄마한테 미안했던 이야기를 하셨던 거구요.
저는 며느리에게 했던 당신의 실수를 반성하는 마음에서
당신의 욕심-아들손주 바라는 마음-을 줄이려고 노력했다는,
불공을 드리며 간절히 참회하셨다는 할머니를 안아드렸습니다.
가슴 속에 품어왔던 원망은 살며시 내려놓으면서요... )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할머니까지 미워하면서...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한자락 펼치지 않고
칼날 세우고
철조망 두르고
스스로는 더욱더 골병이 들어가며
열 다섯의 나날을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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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도
중2,3 때의 즐거운 추억이랄 게 하나도 기억에 없어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그때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보면
항상 얼굴을 찌그리고 있어요.
양미간에 내 천(川)자를 그려놓고 살았죠.
참으로 미운 얼굴이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계속-
(너무 개인적인 얘기라서...
조심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러네요.
한편으론 남에게 이런 얘기를 펼칠 수 있을만큼
지난 시절의 상처나 부끄러움으로부터 자유로와졌다는 게 감사하기도 하구요.
저로선 의미 있는 글이지만...
보는 분들은 재미없으실 수도 있겠어요.
그냥 어딘가에
그때 그 마음, 그때 그 깨달음을
기록해놓고 싶었는데
여기에 이렇게 펼치게 되었네요.
써놓고 나니까 괜히 '주책맞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 ^^;
점점 소심해지고 있어요.)
이런글 저런질문
즐거운 수다, 이야기를 만드는 공간
그 아이의 열 다섯, 열 일곱 (2)
인우둥 |
조회수 : 1,546 |
추천수 : 1
작성일 : 2005-04-22 21:5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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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꽃게
'05.4.22 10:50 PM아뇨~~~
사춘기 시절 누구나 가지는 감정일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참 늦되었는지,,,그 시절 다른 친구들도 다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결혼, 성, 임신, 출산 이런 것들을 완전히 깨달은데 대학1학년때였어요.
지금 제목은 기억이 안나는데 그 때 '문학사상'에 실린 최인호씨의 단편소설을 통해서 ~~~
이후 부모님 얼굴 대하기가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어요...ㅎㅎㅎㅎ2. jongjin
'05.4.22 11:42 PM책을 읽는듯 잘 읽었네요.. 다음 얘기도 기다릴께요.
3. 헤스티아
'05.4.22 11:53 PM인우둥님 *^^* 기다리고 있을거에요.
4. 별가사리
'05.4.23 12:02 AM다음 이야기 꼭 올려주세요.
신문의 연재소설처럼 기대되네요.5. 창해
'05.4.23 12:24 AM너무나도 아름다운 어린 날의 삽화입니다
할머니의 마음씨가 너무도 고우십니다
이런 수채화 같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를 않습니다
문장력도 좋으시군요
계속 올려주세요6. 퐁퐁솟는샘
'05.4.23 4:24 AM아~~
저번글 읽고 많이 기대했는데
기대했던것보다 더 재밌네요^^
다음글 기대할게요~~7. 제민
'05.4.23 6:48 AM재미있어요...
8. hippo
'05.4.23 7:22 AM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다음 이야기도 기대되네요.
9. soon
'05.4.23 12:41 PM와 글을 넘 잘 쓰시네요. 작가해도 손색이 없겠어요.
10. 달려라하니
'05.4.23 9:59 PM소심하지 마세요...
마음으로 잘 읽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누구나 성숙해 지니까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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