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또 다른 주인공 , 커피와 담배를 말하다 .
영화 청춘스케치 (1994) 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바로 마지막에 트로이 ( 에단호크 ) 가 레이나에게 이 말을 건네는 장면입니다 .
“ 레이나 ,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거야 . 담배 몇 개피 , 커피 한 잔 , 약간의 대화 , 너와 나 , 그리고 단돈 5 달러 .”
어린 날에는 자신의 청춘이 이렇게 비루할 것이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레이나는 번듯한 직장을 가진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우울한 상태에 빠져있는데요 , 그런 레이나에게 트로이가 건네는 이 말은 사랑고백인 동시에 따뜻한 위로가 됩니다 .
관객들에게는 담배와 커피만 마실 수 있어도 우리의 청춘은 아직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남겨두면서 말이죠 . 때문에 , 이 영화는 커피와 담배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
하지만 , 굳이 이렇게 커피와 담배를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 커피와 담배는 많은 영화 속에서 내용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요 . 오늘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커피와 담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
짐 자무시 감독의 < 커피와 담배 > 는 그 제목만큼이나 커피와 담배가 많이 , 그것도 함께 등장합니다 .
영화 속에서 뮤지션인 이기팝과 톰웨이츠가 만나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다가 서로의 신경을 긁게 되는데요 . 그러다 톰웨이츠는 " 담배를 끊은 것이 좋은 점이 뭔지 아나 ? 언제나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지 " 라고 말하며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는 이기 팝에게도 하나를 권합니다 . 이기 팝은 " 맞아 . 그러면 나도 오래간만에 하나 피워볼까 ?' 라고 하며 담배를 받아 불을 붙입니다 .
이 때 연기와 함께 몽롱하게 던지는 이기 팝의 한마디가 인상 깊죠 .
" 역시 커피와 담배는 찰떡궁합이야 (Coffee & cigarette is COMPLE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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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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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옴니버스 형태로 진행되는데요 대부분의 에피소드에서 커피와 담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어색한 틈을 메워주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
담배로 표현되는 수천 가지 표정
1948 년 애틀랜식 먼슬리는 화면 또는 무대에서 담배가 소품으로서 나타낼 수 있는 정서와 감정 범위를 다양하게 말했는데요 . 그는 무대나 세트를 빠르게 돌아다니면서 담배 연기를 빨리 그리고 자주 내뿜거나 , 반쯤 탄 담배를 내던지고 바로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는 행위로 ‘ 근심 ’ 을 표현하고 , ‘ 반쯤 피운 담배를 단호하게 짓뭉개는 것으로 ‘ 극심한 고뇌 ’ 를 표현한다고 했습니다 .
또 ‘ 수줍음 ’ 은 담배와 성냥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표현되고 , ‘ 숨김없는 정열 ’ 은 “ 담배 두 개비를 한꺼번에 물고 , 두 개비에 다 불을 붙여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한 개비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고요 .
폴 헨리드가 블록버스터 영화 < 가라 , 항해자여 >(1942 년 ) 에서 베트데이비스와의 사랑을 ‘ 완성 ’ 시키기 위해 보여준 것이 바로 이 연기였습니다 . 뿐만 아니라 침실에서 두 사람이 흡연하는 장면은 막 성행위를 끝냈음을 분명히 암시하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
연기가 나지 않는 담배
담배와 관련된 장면 중 아마도 가장 극적인 것은 담배에 연기가 나지 않는 장면 아닐까요 .
몹시 불안하여 담배조차 피울 수 없는 습관적인 흡연자에게서 우리는 그의 감정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짐작합니다 . 카드 한 장에 마지막 천 달러를 걸었다가 끝내 잃고 만 카지노의 도박꾼의 담배는 불도 붙여지지 않은 채 떨리는 손가락에서 떨어지고 , 매정한 아내에게 속아 버림받은 남편은 담배에 손을 뻗지만 담뱃갑이 떨어집니다 .
담배의 추락은 그들의 크나큰 상실감 , 절대적인 절망감을 표현할 수 있겠죠 . 공범이 배반한 것을 안 범죄자가 손으로 담배를 으스러뜨리는 장면에서는 그의 분노와 복수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 코미디에서부터 비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노련한 배우의 손이나 입에 있는 담배로 표현될 수 있는 셈이죠 .
커피 한 잔 , 작업의 기술
담배와 마찬가지로 커피가 영화에 필요한 심리적 이유도 많습니다 .
담배에서 수줍음이 담배와 성냥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표현된다면 , 커피 역시 커피잔을 괜히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서 수줍음을 표현해낼 수 있죠 .
또한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에서 미란다의 뜨거운 커피가 식기 전에 빨리 배달하려고 서두르는 앤디의 모습에서는 초조함과 조급함을 느낄 수 있게 하죠 . 또한 충격적인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커피를 쏟거나 커피 잔을 깨뜨리면서 주인공의 당황스러운 마음을 나타낼 수도 있겠습니다 .
공공연한 작업 멘트인 “ 커피 한 잔 하실래요 ?” 를 통해서는 상대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주인공의 감정을 표현할 수도 있고요 .
커피 한 잔 , 대화의 기술
담배가 개별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된다면 , 커피는 둘 사이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영화 < 화양연화 > 에서 불륜 관계인 차우 ( 양조위 ) 와 리춘 ( 장만옥 ) 도원래는 밥만 계속 같이 먹다가 , 처음으로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커피숍을 찾습니다 .
무언가를 씹으면서 나눌 수 없는 얘기들 , 그렇다고 술에 취해서 할 순 없는 얘기들이라면 커피가 제격이겠죠 . 이렇듯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커피는 자연스레 둘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효과적인 도구가 됩니다 .
영화 < 비포선라이즈 > 에서도 커피를 마시는 장면은 자주 등장합니다 .
기차 안에서 서로에게 운명적 사랑을 느끼고 해가 뜨기 전까지 하루 동안 데이트를 즐기는 제시 ( 에단호크 ) 와 셀린 ( 줄리 델피 ) 은 두 번이나 커피숍을 찾습니다 .
하루라는 짧은 시간 안에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가고 탐색해야 하는 둘에게 대화의 장소로 커피숍이 가장 알맞았을 것입니다 .
또 커피에 손이 가기는커녕 서로에게 전화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치는 데만 시간을 쏟는 둘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커플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네요 .
커피는 영화 속에서 어색한 만남이든 , 사랑하는 사이든 , 둘 사이를 편안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습니다 .
앞서 영화 < 커피와 담배 > 속에서 이기 팝이 말했던 것처럼 , ‘ 커피와 담배는 찰떡궁합 ’ 이라는 말을 재현한 담배가 있습니다 . 바로 레종 카페라는 담배인데요 . 헤이즐넛 향이 나는 원두를 직접 필터에 첨가해서 커피 향과 맛을 낸 담배입니다 .
때로는 영화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표정이 아닌 담배의 종류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향과 심정들을 대변해주곤 하는데요 , 평소 독하다 싶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배우와 순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배우에게서 느낌이 확연하게 다른 것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죠 .
그런 의미에서 이 커피향 나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을 본다면 , 그 사람의 표정이나 행동들을 오랫동안 눈여겨 보지 않아도 , 평소 커피를 좋아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
담배 연기와 뜨거운 커피의 김은 자칫 어설퍼 보일 뻔 했던 씬을 가득 메움으로써 더 완성도 있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가장 일상적인 소재이기에 , 더욱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
앞으로 영화를 볼 때 커피와 담배가 어떻게 등장하고 있는지 관찰해 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요 ? 한 개피의 담배와 한 잔의 커피에도 분명 감독과 배우의 심오한 뜻이 담겨있을 테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