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모처럼 친구와의 만남을 풍요롭게 하고 싶은 마음과 지구촌시대에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어 대상 수상으로 이어졌는지도 궁금한 차에 보게 되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이 강도입니다. 이름이 중의적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강도가 하는 일이 청계천 일대의 영세공들이 사채를 쓰다가 갚지 못할 시 보험금으로 그 대출금을 추심하는 날강도같은 일을 하는 의미로 그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구원받았던 그 강도를 연상케도 합니다.
1평 남짓한 곳에 기계 하나 놓고 생계를 잇고 있는 영세공들은 은행과 제2금융 같은 제도권과는 이미 거리가 멀고 결국 사채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사채의 이자율은 IMF이후 경기활성화를 목표 아래 이자제한법이 없어졌다가 사채업의 불법추심이나 상상을 초월한 고율의 이자 문제로 이자 67%인가를 상한으로 제한하는 법이 재도입되었습니다만 실상에서의 법규정은 무용지물이죠.
왜 법에?란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들 앞에 놓여진 실상은 냉혹하기만 합니다. 대출업자는 이 강도를 통해서 온갖 폭력을 동원해 원금의 몇십배가 넘는 돈을 착취합니다. 그럼에도 영세공의 분노는 대출업자보단 인간 백정이라고 하는 이 강도에게 향하죠. 대출업자는 더러운 폭력은 이 강도에게 맡기고 그는 오로지 이 강도가 가져온 피 한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돈만 손에 쥡니다. 이 편이 훨 덜 꺼림칙하죠. 자신이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걸 직접 목격하고 싶진 않으니요.
결국 가해자는 이 강도가 됩니다. 같은 사회적 약자임에도...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그는 버려진 아이.. 기아였습니다. 이 버려진 아이가 30이 넘어 인간 백정 쓰레기로 이 사회의 한쪽에 자리 잡은 것입니다. 세상과 소통을 해본적 없는 그는 생물을 날 것으로 먹는 그야말로 원시적인 짐승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문을 열면 승냥이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포획하고 그들이 흘린 상흔은 그의 저녁거리인 닭의 피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존본능으로만 살아가고 있던 그..
그런 그가 처음으로 타인의 방문을 받게 되고 세상과의 접점이 시작됩니다.
얼마전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나찌가 폴란드 아이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한 사진이었죠. 성기가 잘못 달리거나 아예 없는 아이... 아이들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기만 한데 그 사진은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참혹하고 슬픈 사진이었습니다. 순수한? 아리아의 혈통을 지키겠다는 그들의 목적은 그 외의 모든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시키고 인간을 대상화 수단화시키는 데까지 이르죠. 사진 속의 그 아이들은 어떤 생을 살았을까요? 2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우린 자유 평등 박애 중 박애에 더 많은 중점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버려진 사람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또 버려진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요? 제 주위엔 고아출신은 없습니다. 여러분도 비슷할 겁니다. 그럼에도 고아 출신은 있습니다. 승자독식을 당연시 여기는 사회.. 기회균등이 일면에서만 이루어지는 사회에선 버려진 사람들은 점점 더 우리 주위에서 사라지겠지요. 그리고 이런 줄긋기 경계 구별 차별 등등이 계속되는한 우리란 낱말에서 저와 여러분이 배제된 그런 우리만의 사회도 충분히 가능할 것입니다.
이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요? 감히 제가 단언한다면 그건 자본주의의 황폐화도 아니고 결국 소외된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장면으로 가면서 눈물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리고 세상를 향해 외칩니다.
자비를..
자비를 베푸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