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만 영화의 끊어진 필름 한 토막처럼
부모님의 이민으로 이젠 이곳 미국에 사는 인생이
더 길어져 버린 이민 1세입니다.
그런 저에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사육신과 생육신의 이름을 외우던
중학교때의 국사시간이 생각나고
역사를 통한 미래의 길을 배우게 하셨던 그 국사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릴 수 있는 계기가 된 책 '왕도와 신도'는
너무도 먼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사는 저에게 우연히 왔습니다.
다섯권 밖엔 나오지 않았던 때 이민을 와 버려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언젠가는 꼭 마저 읽고 싶다는
저의 지나가는 말을 새겨들은 친구의 우정어린 선물꾸러미에서
저자 김용상님의 '왕도와 신도'를 만났었지요.
신숙주와 성삼문의 우정이 세상과 사상의 갈림길에서
어쩔 수 없는 아픔으로 저에게 절절히 다가 오는것은
아마도 그 친구의 배려와 우정이 담긴 선물인 책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흘러감은 언어가 다른 이방인도 다름이 없어서
종교적인 배경이나 그 사회의 문화적 배경의 잣대로
비판하고 판단되어지는 것을 봅니다.
터부와 죄악시 되던 동성간의 연애가 법으로 보호가 되는 시절로 변하듯이
우리들의 역사는 살아서 움직이고 변화 무쌍하는 모습을 보이며
나의 가치기준과 중심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돌아보게 합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받아서 그대로 내 것인 양 여겼던 그 많은 지식들에 대한
회의까지 들게 하였지요.
배움을 맹목적으로 믿고 의심없이 외우고 나의 머리에 입력을 해 버린 것은
아니었나는 두려움마저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치열한 입시라는 한국교육의 문제점도 있었겠지요.
이미 나의 한국의 유교적인 사상에 물든 교육에서
윗사람에게는 복종을 해야 한다는 뿌리가 저에게는 아직도 깊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국의 직장에서 잘못된 상사의 결정임에도
그것을 거스르는 일이 언제나 크게 마음의 부담이 되고 힘이 들지요.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그린 신숙주는
나의 일 인양 절절하고 그의 행로는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서
교육의 획일성에서 벗어나
우리들에게 융통성을 가르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기쁨은
잊혀진 언어와 잃어버린 단어들을 배우게 해 준 점입니다.
일의 뒤끝을 깨끗이 마무리 한다는 '매기단했다' (16쪽),
동갑나이라는 뜻의 '갑장' (22쪽),
'초근초근한'의 귀찮을 정도로 조르는 모양새(23쪽)를 시작으로
아예 국어사전을 놓고 새 단어를 찾으며 읽는 일이 여간 재미난 것이
아니었지요.
언어는 그 문화를 반영한다고 했습니다.
또 언어는 살아 움직이니 모양새가 크고 작게 언제나 변한다고도 했습니다.
물론 역사소설이니 지금은 사용치 않는 단어들이 많이 있겠지만
근심 답답하여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할 때 쓰는 '울가망했다'(329쪽)같은
단어는 그 단어외에는 딱 떨어지는 한 단어가 없으니
이런 풍요로운 언어들이 더 많이 사용 되어졌으면 하는 바램을 해 보았습니다.
수양대군의 '군왕은 근심하는 자'라는 글(435쪽)에서는 수양대군을
푹군이라고 단정 해 버린 옛날의 저의 경솔함에 왠지 미안한 마음도 들고
'두려워하고 근신하며 오직 힘쓰고...' (439쪽)라고 결연의 의지를 다짐했던
어린 예종의 말에 믿음의 근본이 주를 경외함이라는 성경의 말로
연결지어지는 것이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역사와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니까요!
한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책 전반에 여자들과의 대화나 전개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가지 정도래도 집안 뒤안의 일이 전개되었더라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을 덜고
맛있는 한접시의 요리에 얹은 고명처럼 빛을 발했을터인데 말이지요.
끝으로 나의 언어를 버리고 뿌리를 다시 내리면서
애면글면 살아온 저의 타국인생 2011년을 보내며 읽은
좋은 책들 중 하나였음을 고백합니다.
저자의 발전에 기대를 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