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팠다. 협재해수욕장에 도착해 정신없이 놀다보니 어느새 저녁이 된 것이다. 이 낯선 곳에서 밥먹을 곳을 또 어떻게 찾지? 김포공항에서 아침으로 먹은 비빔밥도 그랬지만, 제주도에 내려서 먹은 열번의 끼니 중 여덟번이 모두 심하게 맛이 없거나 그저 그런 수준이었고 가격은 일관되게 모두 비쌌다. 식재료 대부분을 육지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겠지. 빡빡한 일정이 질색이라 대충 먹고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 제주도에서의 식사는 고민거리였다.
스마트폰을 켜서 '협재해수욕장 식사'로 검색하니 식당들이 좌라락 떴지만 다 내키지 않았다. 흑돼지고기는 정말 맛있었지만 이미 먹어봤고, 갈치 고등어 전복 해물 말고 뭔가 다른 것이 먹고 싶었다. 이를테면 꼬리꼬리한 냄새가 나는 시골된장찌개나 칼칼한 김치찌개! 그런데 아무리 검색해도 그런 식당이 안나온다.
궁리끝에 검색어를 '협재해수욕장 가정식'으로 했더니 딱 한 집이 뜬다. 상호가 조간대 밥집인데 상세정보 옆에 평가가 달려있다. 맛있다, 친절하다는 글이 몇 개 보이지만 진위를 알 수 없으니 신경쓰지 않는다. 어쨌든 벌써 저녁 7시가 넘은지라 15도 이상의 경사만 만나면 한숨같은 엔진소리를 내면서 끙끙거리는 국민차 렌트카로 열심히 달렸다.
조간대 밥집은 협재해수욕장에서 바다를 왼쪽에 끼고 가다가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곳에 혼자 있었다. 해수욕장에서 2km정도의 거리, 10분도 채 안걸릴 정도로 가깝다. 자리에 앉아 벽에 붙은 차림표를 난생 처음 찍었다. 나흘동안 식당을 다니면서 제주도사람들은 된장찌개, 김치찌개는 잘 안먹나?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었는데 이곳에서 보니 반가워서.
김치찌개를 시키니 인상 좋은 사장님이 미안해하면서 '고기가 없어서 안된다'고 한다. 괜찮아요. 그럼 된장찌개 주세요. 제주도 와서 조림은 아직 안먹어봤으니 고등어조림도 작은 걸로 부탁한다.
음식을 기다리면서 창밖을 보니 해가 지고 있다. 풍경도 고요하고 식당도 조용하다. 근처의 협재해수욕장은 하루종일 복작복작하는데 이곳은 마치 멀리 떨어져있는 것처럼 전혀 다른 곳이다. 식당 한켠에 진열된 오래된 카메라들도 역사가 있어보이면서 뭔가 과묵해보인다.
반찬들이 나온다. 뱃속에서 갑자기 얼른 집어넣으라고 난리다. 얼마만에 보는 두부구이, 버섯인가? 이 감동적인 광경을 찍어야해! 내가 사진 찍는 동안 한개 남은 저 두부 건드리지 마! 매콤하게 무친 오이며 호박나물, 부추무침, 감자조림, 김치까지 모두 슴슴한 간과 함께 재료 본연의 맛이 난다. 된장찌개가 나왔는데 사장님이 '된장도 괜찮을겁니다'라고 했었지만 아니, 이건 정말 맛있었다. 고등어조림은 김치찌개를 못해줬다고 과하게 투하해준 김치와 감자의 맛까지 발군이라 싹싹 긁어먹었고 사진은 전혀 없다. 먹느라 너무 바빴다. 맛있게 배불리 먹어서 행복해진 배를 두드리며 숙소로.
다음날 아침. 이날은 해수욕장에서 좀더 놀다가 오후비행기로 서울로 갈 계획이다. 제주도에 더 있고 싶어서 가기싫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지만 태풍 두 개가 오고있다는 일기예보를 보고는 마음을 접었다. 아침식사는 당연히 조간대 밥집에서.
아침 먹으러 가서 찍은 사진. 돌담위로 저런 방울 같은 모양의 장식들이 다양하게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늘어서있다. 식당주변으로 이렇게 시원한 풍경이 끝없이 너르게 펼쳐진다. 아침부터 엄청 더워서 이만큼만 찍고 식당안으로 피신.
저멀리 아침 물질을 하고 나오는 해녀도 손가락크기만큼 보이고, 수평선 너머로 배도 지나간다. 저녁도 아침도 조용한 이곳. 나온 반찬들은 어제 먹었던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아니, 아침에도 맛있잖아! 어제 배고파서 과하게 맛을 느꼈나 했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딱 맛있는 맛이다. 성게미역국과 옥돔구이를 뚝딱 먹어치웠다. 역시 맛있다.(언어의 빈곤이다)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아이가 '난 배도 안고팠는데 많이 먹었어.'라고 한다. 항상 정량을 먹고 과식하는 법이 없는 아이인데 처음 먹어본 옥돔이 정말 맛있었단다. 엄마는 주인아주머니께서 너 주려고 따로 만들었다는 그 오뎅조림도 정말 맛있었어.
예전에 TV에서 어떤 요리사가 '사람마다 입맛이 다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맛집은 어느 누가 와서 먹어도 맛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조미료를 쓸 수밖에 없다. 향신료도 많이 써서 맛도 더 강하게 내어야 하고. 식당은 이윤을 내는데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먹는 사람의 건강을 생각하는 것은 가정에서 준비하는 식사가 최고다. 가정이 맛집의 흉내를 내려고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을 했다.
조간대 밥집에서 우리가 그토록 맛있게 먹었던 두 번의 식사가 어느 누구에게는 불만스러울지도 모른다. 아주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갔는데 뭐야, 흔한 식당이잖아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식구는 참 좋았다. 내어주는 물 한잔도 그냥 생수가 아니었던 조간대 밥집. 모든게 다 의미가 있고 생각이 들어있고 정성이 깃들어있어서 먹으면서 기뻤고, 먹고나니 힘이 났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이 났다. 가정식. 그것 말고는 뭐라 표현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