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눈에는 세상이 두 개로 보인다.
엄마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엄마 연세의 노인과 아닌 사람.
뭐 이런 식이다.
이제 나는 곧 엄마가 없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 나는 이제 곧 고아가 되겠구나.
마흔 넷 먹은 중년이 고아타령이라니...
그러나 이 사실이 정말 나를 너무나 두렵고 외롭게 한다.
그 사실 때문에 이번 설 연휴로 계속 울었다.
어떤 날은 눈이 붓도록 울다 잤고
어떤 날은 눈뜨자마자 울었다.
창밖을 보다가, 설겆이를 하다가, 테레비를 보다가도
눈물이 나는가 하면, 목에서 뜨거운게 올라온다.
엄마... 어떻게 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엄마랑 둘이서 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늘 나보다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하신 엄마.
그래서 중고등학교 시절 엄마 만큼만 컸으면 했었는데, 이제 내 가슴 정도 밖에 안된다.
나를 붙잡고도 못 일어나신다. 밥을 자꾸만 흘리신다.
엄마 드시라고 만들어간 음식과 과일을 거의 드시지 못한다.
목욕시킬때, 화장실 갈 때 같이 움직여야 할 때마다 엄마가 용을 쓰신다.
엄마, 나 절대 안 넘어지니까 내 몸 꽉 붙들어요.
차를 타고 가면서 엄마에게 자랑했다.
엄마, 네 살도 못 넘기고 죽을 것 같다던 내가 마흔도 넘게 살아있네.
손목이 벼이삭보다 가늘다고 늘 걱정하더니만 넘쳐나는 이 살들을 도대체 우짤끼야?
국민학교 졸업할때까지 내 별명이 거북이였는데 이렇게 운전해서 엄마랑 놀러도 다니고...
엄마! 나 마이 컸재?
엄마는 웃으면서, "그래, 마이 컸다."
밤에 만원짜리 50개를 내놓고 엄마한테 세어 보라고 했다.
정확하게 맞으면 엄마 다 줄게.
엄마는 52개라고 했다.
아이고 엄마는 어렸을때부터 내가 하는 건 다 좋아하더니 돈도 더 많이 주는 걸로 할라고?
다음날 엄마를 모시고 인근 명승지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식당에 걸어들어갈 힘도 빠진 엄마, 엄마를 업을 힘도 없는 딸.
방 하나 잡고 둘이서 계속 잠만 잤다. 모녀의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리는 금강산에서 50년만에 만났다 3일만에 헤어지는 이산가족처럼 울었다.
정말 이제 더 사그라들 것도 없어 보이는 엄마.
내 거주지로 돌아오는 길에 여섯 개의 시. 도를 넘었지만 나는 한번도 쉬지 않았다.
엄마, 나 그동안 엄마한테 쌓였던 것 푼 지 억수로 오래 됐다.
대학보내달라고 했다가 부지갱이로 맞은 거.
딸이라고 차별한다고 엄마한테 대들다가 "내가 네 덕 볼 줄 아나? " 이러면서 나한테 욕한 것.
그 밖에 엄마랑 나랑 있었던 많은 갈등들.
사실... 나 이거 서른 중반 넘어서면서 다 풀었다.
오히려 국민학교 6학년 미술시간에 연만들기할 대나무를 준비물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 전날 내가 집 안팎을 이리저리 둘러봐도 없어서 다음날 그냥 학교 갔는데
엄마가 10리 길이 넘는 우리 선산까지 걸어가서 대나무 베어가지고 낫과 수건을 쓴 채
교실로 들어와서 그거 주고 갔잖아.
나 그 사실 하나 만으로 평생 감동하며 살아.
지금까지 엄마한테 고맙다는 말은 안하고 불평만 하고 살아서 정말 미안해.
아버지 돌아가시고 부모님이랑 셋이서 자던 방에 둘이서 나란히 누워 있는데
엄마가 나한테 검은 수건에 곱게 싼 뭔가를 내밀었다. 만원짜리로만 묶은 3백만원이었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네가 시집을 갈란가 몰라서 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너거 언니 시집갈 때 혼수로 준 돈하고 똑 같다. 너한테는 이제 이 돈이 필요 없겠지만.
나 그 보자기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어.
엄마는 어렸을 때 내가 글짓기 상이라도 받아 오면 언니 기 죽을까봐 단 한번도 칭찬을 한 적이 없지만,
대학다닐때 등록금 한번 대 준 적 없지만 그래도 내가 교사가 된 후 동네방네 자랑한 거 다 알아.
아마 읍내 사람들 내 얼굴은 몰라도 내 직업은 다 알 걸.
엄마 평생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너무 늦게 이해해서 정말 미안해.
쫄딱 망한 종가집에 시집와서 그 고생 다하며 온갖 풍파 다 겪어내고 우리 키워준 것 고마워요.
어렸을 때 우리 한테 심하게 냉담한 시절이 아마 엄마의 갱년기 였을 것이고,
엄마도 층층시하 시집살이에 너무도 지쳐서 죽고 싶었을 순간에
눈치 없는 자식들이 엄마 속 더 긁어 놨을 거예요.
우리 자식들 중에 엄마 속 안 썩히고 무난하게 자란 놈이 없네.
엄마 열 두살에 외할머니 돌아가셔서 엄마도 엄마 정이 뭔지 몰랐을 것인데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시고 훌륭하게 훈육을 하셨는지...
그건 정말로 존경해요. 나는 선생이면서도 성질 다스리지 못해 교도관 같은 모습을 할 때가 많아요.
그런데 엄마 옆에 누워서 엄마랑 이야기하다보면 금방 내 잘못을 깨달아요.
큰 오빠가 우리한테 하는 말 중 내가 가장 크게 수긍하는 말은
엄마는 정말 훌륭한 인격자라는 거에요.
아마 오빠도 자식을 키우다 보니 엄마의 인품을 더 느끼나봐요. 엄마만큼 하는게 얼마나 힘든지.
그러니 엄마는 정말 우리한테 좋은 엄마에요.
오빠 재수할 때 그 무거운 쌀 포대기 이고 서부정류장에서 유신학원까지 걸어가셨던 엄마가
이제 걸음도 못 걸으시고 누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라는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얼른 일어나세요. 매일 운동하셔서 여름방학에는 꼭 나랑 같이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요.
엄마한테 된장, 고추장, 간장 담그는 법도 배워야 되고.
나 시집 갈 때도 언니한테 해준 것 처럼 엄마가 이바지 음식 해줘야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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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생각
^^;;; 조회수 : 451
작성일 : 2011-02-05 19:15:26
IP : 218.209.xxx.63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명절
'11.2.5 10:48 PM (121.159.xxx.27)을 지나 접속해서 본 글들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 글입니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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