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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을 고민하시는 분들께 - 박노자
저는 직업상 선생질하고 종이를 베리는 사람이지만 일종의 "부업"으로 이민 내지 유학 상담까지 하고 있다는 착각을 가끔 일으킬 지경입니다. 이민/유학 상담소를 개업한 일도 없고 할 생각도 없지만 그 관련으로는 하도 많은 이들이 문의하니 직업이 아닌 직업이 돼가는 듯한 감입니다. 아마 최초는 약 10년 전에, 제가 경희대에서 재직했을 때에 제게 "한국에서 정착할 수 없느냐"고 물어본 한 러시아 교환 여학생이었습니다. 저는 그 학생에게는 "한국에서는 노동 이민자에게는 영주권의 개념은 거의 없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저를 포함해서 거의 대다수 비정규직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결혼 내지 귀화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정착'이란 불가능하다, 아직은 '정착 외국인'을 반기는 형태의 사회가 안됐다"라는 요지로 답을 드렸는데, 다음 질문은 "한국 남성과 결혼할 수 없느냐"이었습니다. 구체적인 대상자가 있느냐고 물었는데, 한국 국적의 남성이라면 무조건 결혼부터 하여 한국에 남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여학생의 고향이었던 러시아의 한 오지 지방과 수원의 생활 수준의 차이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끔 할 만 했습니다. 지금 러시아에서 잘 살고 소장파 학자가 된 그 여성은 10년 전의 저와의 "이민, 결혼 상담"을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 당시에 "한국행을 위한 묻지마 결혼"을 안해서 정말 천만다행이었습니다!
노르웨이에 가고 나서는 "스칸디나비아 이민/유학"에 대한 "상담건" (?)은 부쩍 늘었습니다. 대체로는 문의하시는 분들은 대졸들이고 문의의 요지는 "스칸디나비아에 가서 석사/박사를 할 경우에는 거기에서 취직해서 정착해 살 수 있느냐"는 형입니다. 사실, 마음같으면 긍정적으로 답하여 국내에서의 구직 지옥, 부동산 시장의 지옥, 비정규직 참극으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빠져나오게끔 해드리고 싶지만 이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긍정 일변도로 답을 드릴 수 없는 이유들을 열거해보자면 중요성의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1. 노르웨이도 궁극적으로 일개 자본주의 국민 국가입니다. 유럽 국가들이 다 그렇듯 노르웨이의 이민 정책에는 공식적으로 "차별"은 없다 해도 확실한 "구분 짓기"는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노르웨이인처럼 취직할 수 있고, 유럽연합 국민들이 매우 간소화된 절차로 취직할 수 있지만, 유럽 연합 바깥의 "나머지 세계" 출신들의 취직 절차는 아직까지 다소 복잡합니다. 원칙상 취직시 본국인 및 유럽연합 국민들이 우선권을 가지며, 유럽연합 바깥의 구직자가 성공적으로 취직됐을 경우에도 일단 관련 정부 부서로부터 노동 허가를 발급 받지 못하면 들어와서 일할 수 없습니다. 그 발급에 소요되는 시일은 몇개월이 될 수도 있고요. 많은 직장에서 이와 같은 시간 낭비가 우려돼 되도록이면 "非유럽연합 국민" 고용을 기피합니다. 거기에다가 노르웨이 노동 시장의 특성들도 가미됩니다. 예컨대 간호사라든가 프로그래머 등 인력난이 심한 일부 직종에서는 외국인이든 외계인이든 능력만 있으면 쉽게 고용될 수 있다 해도 "문화인류학"이나 "국제 갈등 해결 및 평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노르웨이 안에서 받는다 해도 과연 어디에 가서 구직을 해야 합니까?
2. 이와 같은 직종의 고학력자들은 시민단체, NGO 등에서 얼마든지 좋은 취직 기회를 얻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다음 걸림돌은 언어일 것입니다. 아주 필요한 외국 프로그래머가 몇년 간 영어로 소통을 해도 직장 동료들이 토를 달지 않겠지만 원칙상 노르웨이의 거의 모든 직장에서는 노르웨이어 소통만이 허용됩니다. 영어를 못해서도 아니고 굳이 집안과 같은 자기 직장에서 외국어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입니다. 대학에서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외국인들 같으면, 보통 고용의 시점에서 2년간 노르웨이어를 충분히 익히겠다는 각서를 써야 합니다. 그러면, "이민"을 생각하시는 분들은 평소에 배워보지 못한 게르만계 언어를 거의 2년 내로 고속도로 일할 수 있을 만큼 - 다른 공부를 하면서 - 배우겠다는 각오를 하셔야겠습니다. 글쎄, 영어만으로도 직장 소통이 되는 IT관계자나 이미 국내에서 스웨덴어 등을 익힌 소수의 스칸디나비아과 졸업생들은 괜찮겠지만 대체로는 쉬운 조건은 아닙니다.
3. 구직은 성공되고, 취직 절차상의 문제가 순조로이 풀리고 언어 문제도 해결되고 일단 형식 상의 "정착"이 다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봅시다. 남은 것은? 6월초에 눈이 올 수도 있는, 한반도 출신에게 아주 이질적인 기후, 직장 동료라고 해서 몇년 간 같이 회식을 거의 하지 않는 등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아주 철저하게 구분하고 외국인을 자신들의 사적 공간으로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질적인 북구형 문화, 임금은 아무리 높아도 염가 중국 식당에 가족끼리 가서 2-3개의 요리만 시켜도 벌써 7-8만원이 깨지는 "살인적"이다 싶은 물가 (고급 외식을 한 달에 4-5차례 이상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대다수 이웃, 동료들의 무지와 무관심 등등입니다... 제 아내만 해도, 이웃 사람들에게 이미 몇 년전부터 "코리아"라고 똑똑히 자기 소개해도 지금까지도 "아, 베트남에서 온 것이지요?"와 같은 질문에 시달릴 정도입니다. 하기야, 국내에서는 노르웨이사람과 덴마크 사람을 구분 잘하겠습니까? 하여간 지구는 하나라 하지만 "타자"로서의 생활을 해보지 않으신 분들이 그게 쉽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사람마다 사정마다 다르다고 봐야 합니다. 예컨대 20대의 결혼 이민자의 경우에는 노르웨이에서의 적응이 비교적으로 쉬운 것으로 보입니다. 또 예컨대 국내에서 어차피 전과자가 되어 평생 고생해야 할 여호와 증인 등 총을 들 수 없는 남자 분 같으면, 차라리 여기에 와서 "정착"을 시도해보는 것이 나을는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국내에서라도 "타자"로 살아야 하는 형편인지라 말씀입니다. 그리고 IT 등 "인기 높은" 직종에 속하시는 분들께, 만약 취직 제안을 받으실 경우에는 노르웨이행을 권고해드리고 싶습니다. 일단 재미있고 배울 만한 경험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쨌든 "이민"을 무겁게 생각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리 "선진국이다", "사민주의 국가"다 해도 자본주의 세계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나 자신을 고용주에게 "잘 팔아야" 하고, 어디를 가나 "국민"과 "타자"들이 구분되어집니다.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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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에 대한 글을 읽다가 그의 아내가 궁금해져서 검색하다가(개인적인 면보다는 어떻게 한국인이 노르웨이에서 정규직 교사가 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이 궁금해서) 발견한 글입니다. 박노자씨가 2008년에 쓴 글이네요. 그의 아내가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참 대단하다 싶네요.
1. 러시아 원어민
'11.1.8 9:15 PM (220.127.xxx.237)인 박노자씨가,
한국말로 저런 글을 쓸 수 있다니....
그는 정말 대~단해요!
전 영어질 몇년이라도,
과연 같은 내용을 영어로 쓸 수 있을까? 싶습니다.
쓰기야 하겠죠, 삼박사일 걸리면.... ;ㅅ;2. 재미있네요
'11.1.8 9:18 PM (125.182.xxx.42)북유럽의 배타적 민족주의는 우리나라 유교보다 더 심하다 하는데,,,잘 사시네요....
3. 매리야~
'11.1.8 9:19 PM (118.36.xxx.10)음..그냥 한국에서 살라는 말로 들리는군요.ㅎㅎ
기회가 되면 오슬로는 여행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만 드네요.
저도 박노자씨 부인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4. 저
'11.1.8 9:24 PM (180.64.xxx.147)글에서 노르웨이라는 나라 이름을 빼고 다른 나라 이름을 넣어도
다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 같네요.5. 봄바리
'11.1.8 9:33 PM (112.187.xxx.211)"아무리 "선진국이다", "사민주의 국가"다 해도 자본주의 세계는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나 자신을 고용주에게 "잘 팔아야" 하고, 어디를 가나 "국민"과 "타자"들이 구분되어집니다. 노르웨이 등 스칸디나비아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 핵심은 요것인듯요....ㅎㅎ
에혀.. 여튼 스칸디나비아 체제는 진심 부럽습니다.6. 유럽의
'11.1.8 9:46 PM (220.127.xxx.237)민족주의가 심하다 한들,
한국의 그것에 비교하면 양반입니다.
한국보다 더 심한 배타적 민족주의는 아마
중화주의밖에 없을 듯 하군요.7. 천재
'11.1.8 10:01 PM (119.195.xxx.134)박노자씨가 언어천재라고 들었습니다.
한국어 발음은 처음 들으면 좀 웃음이 나오지만
한 삼사분 듣다보면 고급한국어가 좔좔~ 쏟아지는데
정말 깜짝 놀랐었어요.8. 그까이꺼
'11.1.8 10:04 PM (68.36.xxx.211)인간들이 다 비슷한거지요.
체제가 부러운 것이니,
체제, 그까이꺼는 ㅋ우리도 바꾸면 됩니다. 바꿉시당!! ^^;;9. 깍뚜기
'11.1.8 10:17 PM (122.46.xxx.130)자본주의 체제는 먹고사는 문제로 대표되는 전세계의 삶살이를 동질화한다는 점에서 "Negatively, We are the world" 이지만,
(다시 한 번 이 놈 나쁘다란 생각이 드네요~ 노르웨이에서도-북유럽이 유토피아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래도 분명 차악이라고 볼 수 있잖아요 - 그렇다잖습니까....)
그 안에서도 유럽 연합으로 대표되는 블록화와 그 내부의 밥그릇, 기싸움, 유럽 내의 인종문제, 소위 '제3세계' 출신의 이민자들로 인해서 국수주의가 곳곳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전면화되는 속도와 양상도 유럽 국가별로 조금씩 다르지요. 교육 시스템과 여러가지 제도, 고용 양상 등을 객관적인 지표로 검토해본다면, 북유럽의 인종차별 양상이 전반적으로 오스트리아, 스위스, 최근 극화되는 프랑스보다 더 심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물론 '나와 너'의 이분법과 타자를 배척하는 국민국가의 국민의식은 설령 자본주의 체제가 붕괴되어도 없어지지는 않겠죠. 혹은 초국가적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서로 어울려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오묘한 결합을 하여 더 승승장구하고 있기도 하구요.
어떻튼 저 글을 읽고 저는 정녕 '자본주의가 괴물이구나' 라고 느꼈고.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 전면 거부도 아닌 '사민주의' 정도는, 그것을 묘하게 금기시하는 분위기는 타파하고 진짜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아닌지 활발히 논의되면 어떨까 합니다.
모님하의 '진보적 자유주의' 커밍아웃을 보고 정신도 아득한 마당에요...휴우~~
(이 글을 읽고 문맥적으로 여러 상상을 불러일으켜서 살짜기 산으로 가는 댓글을 달아보았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