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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호선 전 대변인 인터뷰 " 신혼집에 찾아온 노통에 이끌려 비서로 합류 "
[스포츠서울닷컴ㅣ장 민 박형남기자] 22년 전 경찰이 포위한 한 대기업 노조의 파업 현장에 진흙투성이의 한 청년이 유리창을 깨고 잠입했다. 그의 두 손에는 갑작스럽게 파업에 들어간 여성노동자를 위한 생리대 한 박스가 들여 있었다.
비오는 날, 산기슭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 파업현장에 뛰어든 탓인지 얼굴은 빗물과 진흙 범벅이었으나, 표정은 한 없이 순박했다. 얼마 전 위장취업이 드러나 근무 도중 돌연 공장에서 사라졌던 천호선 노조원이었다. 결국 노조 파업 농성은 13박 14일간 이어졌고, 파업을 주도했던 그는 곧바로 구속돼 1년 2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은 유순한 인상에 비해 살아온 이력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순전히 자신의 선택 탓이다. 학생운동의 지도부로 활동하다 두 번의 투옥을 거쳤고 한때는 수강생 6백 명에 달하는 '스타 학원 강사'였지만, 직접 수원의 신혼집까지 찾아온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설득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20년간 정치권 주변을 맴돌며 '세대교체'의 선도자 역할을 자임했고 지방자치 현장으로 뛰어가 송파구청 구정연구단장을 맡는 등 정치권과 행정에 대한 다채로운 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의 정치를 하기 보단 다른 정치인의 조력자의 삶을 살았다. 청와대 3대 요직인 국정상황실장, 의전비서관, 대변인을 모두 역임했지만, 출사표 한번 없이 '노무현 참모'로 남았다. 큰 소리 내지 않고 참여정부의 주장과 논리를 차분히 설명하던 그가 친노신당의 깃발을 들고 새로운 정치실험에 나섰다. 외유내강형으로 앞줄에 나서기보다 뒷전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해온 그의 평소 언행을 감안하면 다소 의외였다.
인터뷰 현장에서 만난 천 전 대변인은 활기가 넘쳤다. “사진이 실물보다 못나온다"며 "창조와 과장이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옆집 아저씨’ 같은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그는 시원 털털한 성격에 탄력을 받아서 어떤 질문에도 속사포같이 거침없는 태도로 분위기를 잡아갔다.
보기 드문 '순수 서울 청년'…"서울사람 특유의 장단점 지닌 '깍쟁이'"
천 전 대변인은 서울에서 태어나 한 번도 서울을 떠난 적이 없는 ‘서울 토종’이다. 친가, 외가가 모두 서울 출신이다. 천 전 대변인은 "서울 사람들은 농촌공동체에 대한 경험이 적은 탓인지 아무래도 남의 일에 끼어들기 싫어하고, 남이 자기 일에 참견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다녔던 아버지 탓에 큰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부모님과는 한때 갈등도 있었다. 학생운동에 투신하면서 믿었던 아들에게 적지 않게 실망하는 평범한 부모였다.
“누구나 그렇지만 다 큰 자식을 말릴 수가 없잖아요. 결국 대학시절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옥살이 내내 ‘긴장관계’가 형성됐죠. 다행히 정치권에 들어와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자 부모님도 그제서야 저를 이해해주시더군요. 이후 대화폭도 넓어졌죠.(한숨)”
리더십 제로였던 학창시절…"고3때 반항심 키워 담임선생님께 대들기도"
학창시절은 '특별'하지 않은 무명의 시절이었다. 운동, 공부 무엇 하나 특출 난 게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공립학교를 다니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저를 사립학교에 보냈어요. 잘사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라 굉장히 위축됐죠. 성적도 바닥에 머물렀고, 문화가 틀리니 학교에 눈도장만 찍으러 다닌 거죠.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조용히 공부만 하는 학생인 탓에 리더십은 제로였죠. 중학교 때 임시 부반장을 한 게 유일한 감투예요. 말 그대로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진 ‘전형적인 FM 학생’이었어요.”
그는 고교시절 전혜린 작가의 영향을 받아 독일 문학에 빠져 있었다. 문과진학이 목표였다. 우연히 만난 현직 국어선생과 서울대 재학생의 영향으로 당시 반정부 문구가 가득한 각종 불온문서를 접하고 차츰 세상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의식화'된 고교생은 아니었다.
학업은 고1부터 자꾸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학진학 문제로 선생님께 반항했다가 맞은 적도 있었다. 그런 탓인지 그는 자신의 대학진학이 '행운'이었다고 표현했다. “진짜 운이 좋았어요. 특차에서 모두다 다 떨어졌어요. 본고사에서도 ‘떨어지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또다시 지원했죠. 그런데 그 중에 연세대만 붙었어요. 다른 곳은 다 떨어지고 왜 연대만 붙었는지 지금도 신기할 따름이에요.(웃음)”
'운동가 천호선' 지하서클 '핵심부'서 활동…"나만의 3대 수칙 있었다"
천 전 대변인은 대학에 진학한 후 2학년 때 반 지하 서클인 '목하'에 가입했다. 연대 학생운동의 전통을 이어온 곳으로 일정한 심사를 거쳐 가입이 허용되는 '운동조직'이었다. 누구보다 성실하고 품성이 좋았던 그는 시위팀을 조직하고 이론을 다지면서 4학년 때는 연대 학생운동의 '중앙'으로 활동했다. 각종 시위는 물론 학생운동의 방향과 이론이 그의 손을 거쳤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 전 대변인 역시 자신의 수칙을 세웠다. ▲졸업하는 것을 포기한다 ▲감옥 가는 것은 감수한다. 고로 군대는 안간다. ▲학생운동 끝나면 노동운동을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운동에 임했다.
“단순한 민주화 운동보다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혁명적 분위기가 강했어요. 일각에선 총을 들 수 있는 상황까지 올 것으로 판단했을 정도예요. 다른 대학 운동팀과 연대하는 일, 시위팀을 비공식적으로 만들어 유인물 배포 등을 비롯해 갖가지 알리바이, 시위 주제를 정하고 의논하는 역할을 했죠. 그러나 4학년 초 뜻하지 않게 경찰과 손잡은 선배로 인해 노출이 됐어요. 결국 연대에서 마지막으로 시위를 하고 체포돼 구속됐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공식적으로 들어갔는데 학생운동을 하면 할수록 비공식으로 바뀌어버렸네요.(웃음)”
노신영 안기부 부장과의 '구치소 회담'…"느닷없는 가족얘기만 쭈욱~"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됐을 당시 노신영 안기부 부장이 불쑥 찾아왔다. “어느 날 갑자기 교도관이 ‘허름한 수복이 아닌 깨끗한 한복을 입고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저 끝에 어떤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라고 묻더니 ‘내가 노신영이네~’라고 하더군요. 특별한 얘기는 없었고, 노 부장 자식들 얘기를 하면서 편안하게 얘기했던 기억밖에 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원 자율화 조치를 하기로 결심한 뒤 학생운동 출신을 직접 만나는 과정이 필요해서 나를 만난 것 같아요. 물론 그 당시 서대문 구치소는 난리가 났었죠.(웃음)”
천 전 대변인과 노 부장의 만남 후, 며칠 후 학원 자율화 조치가 발표되면서 1차 시위한 사람들은 모두 석방됐다. 천 전 대변인도 4개월의 형을 살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천 전 대변인은 "징역생활이 답답하지 않고 재미있었다"며 "아마도 감옥 체질인 것 같다"고 웃었다.
“이미 3대 각오를 했기 때문에 큰 고민이 없었던 것 같아요. 더욱이 소명의식을 가지고 학생운동을 했으니까요.”
천 전 대변인은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으로 또 다른 것을 시작했다. 바로 노동운동이다.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날 당시 전자 계열 한 대기업 회사에 위장취업했다.
대형전자 회사 '위장취업'…"생리대 품고 파업 현장 뛰어 들어가기도"
“대학 서클 선배였던 이모씨의 아버지가 장관을 역임했던 대단한 권력자였어요. 그 덕에 입사를 했어요. 든든한 빽이 있다 보니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더군요. 그런데 노동자 파업을 하면서 잡혔어요. 파업을 주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 이력 때문에 제 신분이 드러난 거죠. 예비군 문제도 있었고….”
그런 그는 책임의식 때문에 파업 현장에 뛰어들 결심을 하게 됐다. 담을 넘고, 산을 건너 파업 현장으로 침투했던 것이다. “비가 쏟아지던 날 새벽 3시,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산기슭을 포복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창문을 깨고 파업 현장에 들어갔는데 그 당시 모습은 한 마디로 ‘진흙덩어리’였죠. 특히 파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어서 고립된 여성들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을 했어요. 후배 여성에게 조언을 구한 결과 생리대가 필요할 것이라고 얘기해 온몸에 생리대를 품고 들어갔어요. 그런 과정을 거쳐 13박 14일 파업을 벌였죠.”
파업내내 '배고픔'을 몰랐던 사연…"식당에서 파업해 먹을 것이 많았다"
천 전 대변인이 들려준 후일담 하나. 파업 내내 ‘배고픔’을 몰랐다고. 한순간에 이뤄진 파업이었지만 식당에서 파업이 이뤄져 먹을 것이 풍부했던 덕이었다. 냉장고에서 소고기, 초콜릿 등을 먹었고, 그 때 먹었던 밥 역시 세상에서 가장 맛있었다고 한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을 거친 그는 개천절 특사로 1년 2개월 만에 출소한 뒤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노동운동에 대한 소명의식이 부족하다는 한계를 절감했던 것. 결국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대형학원 단과반 영어 강사를 시작했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천 전 대변인의 강의 실력은 한마디로 ‘꽝’이었다.
4개월 동안 단과반 강의를 했으나 학생이 모이지 않았다. 간혹 강의폐강 턱걸이(2명)선을 겨우 넘겼으나 그마저 나머지 학생들이 차례차례 나오지 않아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결국 학원에선 특단의 조치로 그에게 예고도 없이 ‘사형선고’를 내렸다.
비인기 학원 강사에서 '스타 강사'로 변신…"청와대 시절보다 월급 많아"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예고도 없이 책상이 없어졌더라고요. 강의시간표에서 이름은 빠져 있고…. 누가 아무런 얘기도 안 해줘요. 알아서 짐을 싸서 나갔죠. 그 당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처음으로 사회생활의 쓴맛을 느꼈고, 이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비인기 강사’로 찍힌 그는 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우선 홍보 팸플릿을 세련되게 제작했다. 그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팸플릿을 보고 600여명의 중학교 3학생들이 천 전 대표의 기본영어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연봉도 높았다. 청와대 홍보 수석 재직시절보다 수입이 많을 정도로 ‘고액 연봉을 받는 톱클래스 강사’였다.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 덕분에 그는 ‘학원가’에서 손꼽히는 유명 인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이광재 의원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천 전 대변인의 신혼집에 불쑥 찾아왔다.
신혼집 불쑥 찾아온 노무현 전 대통령…"정치 개혁 꿈 품고 '밑바닥부터 배웠다'"
“이광재 의원과 제 처가 선후배지간이에요. 집 사람이 노 의원 실에서 잠깐 일한 인연이 있어 주례도 노 전 대통령이 섰죠. 이광재 보좌관을 대동하고 나타난 노 의원이 ‘내일부터 나와 일해요’라고 말하더군요. 알고 보니 이광재 의원이 저를 추천했더라고요."
그는 노 전 대통령에게 끌리는 카리스마 탓인지 '신들린 것처럼' 곧바로 학원을 정리했다. "노 전 대통령이 의원인 시절 5급 비서관으로 근무하게 됐어요. 임기 1년을 남기고 정치에 뛰어든 노 전 대통령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1년 동안 좋은 구경을 했습니다. 특히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노 전 대통령과 함께한다면 정치 개혁 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죠.”
이후 노 전 대통령의 낙선과 함께 유인태 의원 보좌관으로 일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시절 존경과 감동도 있었지만 오래된 정당의 폐해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며 정치개혁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유 의원이 내무위(현 행안부)였던 탓에 지방행정문제를 다루고 있어, 지방자치제에 관한 공부를 시작, ‘밑바닥부터 배우겠다’는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도 구청장을 왜 뽑는지 몰랐을 정도로 '지방자치 문외한'들이었어요. 그래서 결국 국회 보좌관들을 모아 공부모임을 만들었죠. 그때 ‘고향으로 돌아가자’, ‘기초에 집중하자’, ‘도의원 생각 말고, 군 의원하자’ 등 기초의원 선거, 젊은이들의 지방자치 출마운동 내부 캠페인을 펼쳤죠. 93년에 참여와 자치를 위한 청년 캠프를 만들었습니다. 그 덕인지 민주당에서 30대 서울시 의원 10여명이 나오고 구의원까지 상당수가 당선됐습니다. 정치권에 들어 와 참 보람 있는 일을 했던 것 같아요.”
젊은이들의 정치 참여 모임 결성…"지역정치 경험 위해 송파구에서 일하기도"
정작 천 전 대변인은 출마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자신은 ‘출마형’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 출마하지 않느냐’라는 말들을 들었고, 그는 결국 지역정치를 경험하기 위해 지역으로 내려갔다. 민주당 송파지구장 사무국장이 그의 귀착지였다.
그곳에서 지역정치를 경험하면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지역정치, 청년정치 개혁 그룹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그는 ‘한국의 미래 제3의 미래 한국의 힘’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청년 정치 모임 중 최대 규모였죠. 지역에서 한참 일을 하는데 김성순 의원과 인연을 맺었어요. 그 과정에서 김 의원의 구청장 선거를 돕고 구청의 별정직으로 들어가, 구정연구장 단장을 1년 넘게 일을 했었죠. 일선 말단 행정을 공부하다보니 세월이 2000년까지 흘렀던 것 같아요.”
상근이 아닌 객원 생활을 했던 탓일까. 천 전 대변인은 서울 송파구에서 많은 일들을 하면서도 노 전 대통령의 지방자치연구소에 합류했다. 그러나 때론 노 전 대통령에게 미안한 부분이 많다고 한다. 10년 동안 참모 역할에 열중하기보다 젊은 세대를 묶어보자는 생각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느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대선 위해 인터넷 선거 준비…"대중이 참여하는 여론 정치 시작"
그는 2001년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의지를 확인하고 인터넷 분야의 책임자로 합류했다. .
“당시 처음으로 정치 전문 인터넷 매체를 만들었어요. 정치광고기획사 성격을 가미해 나름대로 언론 매체를 만들었어요. 홈페이지를 설계하면서 많이 배웠죠. 그 경험을 통해 정치 현안에 대해 인터넷 투표를 하고 정책 결정자들에게 보내서 일종의 대중이 참여하는 여론 정치, 정책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천 전 대변인은 지금도 그 시절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 '천 사장님'으로 불린다. 당시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는 백원우 의원과 같이 유명 정치인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다. "돌아보면 노 전 대통령께서 구상한 '민주주의 2.0'과 같은 것이었어요. 인터넷을 통해 누군가 정치적 의제를 제기하고 인터넷 토론, 온라인 투표 등을 할 뿐 아니라 전국의 교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전문 교수들에게 이메일 등을 보냈기 때문이죠. 그리고 여야 국회의원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했죠.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넷 팀을 만들어 본선 기간 내내 인터넷 기획실장으로서 일을 했어요.”
그러한 실험을 토대로 대선을 치렀고 당당히 대선에 승리한 노 전 대통령. 천 전 대변인은 노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기 시작했다. 의전 비서관, 국정상황실장, 대변인 등 주요 요직도 거쳤다. "그 때가 참 즐거웠던 시절"이라고 천 전 대변인은 회고한다.
“의전 비서관 때 좋은 점은 대통령 주재로 하는 회의에 모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듣기만 해도 공부가 됐어요. 이른바 대한민국 최고수준의 정책 보고, 토론, 의사 결정과정 등을 겪어보니 무슨 질문이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 생기더라고요. 대통령의 기본 방침을 이해할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또 행사를 많이 다녀서 하루하루가 새로웠어요. 자이툰 부대 방문, 남북정상회담 등 전 세계를 다 돌아다녔으니까요. 이 때문에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나의 친구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부시 전 대통령은 저를 모르지만 저는 너무 가까운 친구처럼 느껴졌을 정도였으니….”
국정상황실장부터 대변인까지…"생중계 브리핑은 쉽지 않았었다"
청와대 시절 얘기를 나누다가 국정상황실장 시절 당시 뜻하지 않은 사고를 쳤던 기억이 난다고 대답한다. 이광재 의원의 철도공사유전사업 의혹이 바로 그것이다. 천 전 대변인은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5분단위로 정보보고를 받을 정도로 진이 빠져 있었을 때였죠. 처음 이 사건이 보도됐을 때 직원 중 한명이 철도공사유전사업 사건을 조사 한 적이 있다며 ‘자신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어요. ‘잘했다’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실을 까먹어 버린 거죠. 갈수록 문제는 심각해졌고,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떠오르더라고요. 뒤늦게 기억을 떠올리며 그 사건의 전말을 얘기하자 난리가 났었죠. ‘국장상황실장이 고의로 은폐했다’는 보도가 빗발쳤죠. 그때 엄청나게 곤욕을 치렀죠. 아마 저의 이름을 치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그 사건일걸요.(웃음)”
천 전 대변인은 국정상황실장보다는 대변인으로 ‘유명세’를 탔다. 참여정부 말기 언론과의 관계가 어려웠을 때 대변인을 맡았고, 국민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브리핑을 생중계하기로 결정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했었다. 그는 ‘생중계 브리핑’을 결정하기 전까지 누구보다 많은 고민을 했다. 예상 질문을 철저히 준비해야 될 뿐 아니라 말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을 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메라 없이 질의응답을 편하게 받고,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만 찍을 때는 실수를 해도 ‘다시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됐지만 생중계는 그게 불가능하잖아요. 카메라 앞에서만 서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진땀이 나더라고요.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못하면 국민들이 청와대를 어떻게 바라보겠어요…. 그래도 대변인의 발언이 왜곡되지 않고 모든 것이 투명하게 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던 것 같아요.”
식당에서 뉴스보고 놀랬던 천호선…"한번에 7번 나왔네!"
대변인 시절 겪었던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아프칸 피랍사건 당시 24시간 브리핑을 할 때의 일이다. 뉴스를 통해 대변인의 얼굴이 자주 나가지만 정작 그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아프칸 피랍사건과 관련된 청와대 공식입장을 발표하는 모습이 언론에 얼마나 자주 나오는 지 스스로 체크를 해봤다고 한다. “와! 아프칸 피랍사건 4꼭지! 다른 뉴스까지 합쳐서 한 번에 7번! 덕분에 유명인사가 됐어요. 가끔 길을 가다보면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더군요. 택시비 안 받으려는 택시기사 아저씨, 식당가면 밥값 안 받는 사람, 친절하게 대해주고…. 대변인을 짧게 했지만 정말 보람된 청와대 시절이었죠.”
천 전 대변인과 마주앉아 2시간가량 인터뷰를 했는데 끝날 때쯤 되니 휴~ 힘들다”, “목이 아프다”고 엄살(?)을 피우거나 한숨을 내쉬며 인간미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내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정말 뜻 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고 말하며 지난 시간을 차곡차곡 재정리했다.
<사진=이승훈 기자>
▶[천호선 전 대변인 인터뷰②] “5천명 당원 확보…
1. 음~~
'09.10.29 10:30 PM (125.180.xxx.5)링크좀...
천호선님 얼굴보고싶어요2. 흠
'09.10.29 10:33 PM (116.46.xxx.41)이 양반도 곧 얼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3. ...
'09.10.29 10:42 PM (221.138.xxx.96)http://www.sportsseoul.com/news2/ptoday/people/2009/1029/20091029101140200000...
4. ...
'09.10.29 10:42 PM (221.138.xxx.96)http://www.sportsseoul.com/news2/ptoday/people/2009/1029/20091029101140200000...
5. *^^*
'09.10.29 10:44 PM (58.224.xxx.167)노무현 대통령님 청와대에 계시던 때 (다시 눈물이 ....) 뉴스를 더 꼬박꼬박 챙겨보던 이유중 하나가 천호선 대변인 때문이었습니다 ;;
그러다가 지금의 대변인을 보노라니 눈이 썩는것 같습니다 ㅠㅠㅠㅠㅠ6. 천호선대변인
'09.10.29 10:48 PM (125.180.xxx.5)인물만 좋은줄알았더니...손도 너무 예쁘시네요
제손보다 더 하얗고 고와요~~7. ???
'09.10.29 10:58 PM (123.228.xxx.246)아니 어쩜 사람이 그래요??
인물이 잘났으면 키라도 작던가,
키가 그렇게 훤칠하면 배라도 나오던가,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안좋던가,
거기다 머리좋아, 말 잘해, 무엇보다 정치사상 섹시해, 의리있어-
정말 한나라당 애들로 하여금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 위화감을 조성하게 만드는 인물이네요8. ..
'09.10.30 12:07 AM (122.202.xxx.166)평소에 TV 뉴스 시간에 나오면 참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제 옆으로 스쳐지나가신 적이 있었어요.
앞에서 제 쪽으로 걸어오시는데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광채가 나는 게 꼭 천사 같다는.
여태 살면서 그렇게 피부가 뽀얗고 해맑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9. 식물성
'09.10.30 10:03 AM (119.67.xxx.56)누군가 말했듯이
참여정부인사들은 하나같이 외모가 식물성.............
반면에 현정부 인사들들은 개기름 흐르는 동물성.....대표적 인물이 땅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