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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더 마인호프>를 보고
미셸 푸코에 따르면 가톨릭의 고백성사는 그러한 자각 위에서 구축되어갔다고 합니다. 그 전까지는 ‘의무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의식이 없었던 것이죠. 고백하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달려와서 죄를 토로한 뒤 그에 합당한 고행을 하면서 속죄를 했을 뿐. 그런데 고백이라는 행위가 수치심을 유발하고 그 수치심이 그 자체로 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뒤부터 점차 죄의 고백이 ‘의무적인 것’이 되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죄의 고백은, 때론 집단적인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80년 광주를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죠. 80년 5월 이후, 광주는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다 같이 고백하고픈 죄가 되었더랬습니다. 그 죄를 고백하는 과정에서 느끼게 된 울분, 죄책감, 아픔, 원통함 등은 그 자체로 광주를 외면하거나 광주를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한 벌이 되었고 거대한 정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씻김굿이 필요한 법이고 그래서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요구되는 것이죠. 요즘 한일 양국에서 기존의 역사교과서가 ‘자학사관’에 입각해 기술됐다며 난리부르스를 추는 세력들이 있는데, 그들은 반성과 자학을 혼동하고 참회와 투항이 구분되지 않아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군국주의 행위를 오히려 아시아인의 긍지를 빛낸 것으로 치장하고 군부독재를 ‘다만’ 제3세계 국가가 ‘어쩔 수 없이’ 거쳐야만 하는 운명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주장하는 자긍심 가득한 역사관은 지구상에서 북한이 제일 강해보이는데 말이죠...--;)
1960년대와 1970년대 서구의 젊은이들에게도 집단적으로 고백하고 싶은 죄가 있었습니다. 바로 베트남전쟁이 그것이었죠.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이 베트남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던 1965년만 해도 베트남전은 몇 달이면 끝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변해갔고, 미군의 승전보 대신 베트콩과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미군의 잔악한 범죄만이 풍문과 종군기자들의 펜을 통해 끊임없이 들려올 뿐이었습니다.
헌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죄는 그것만이 아니었다는 게 또 문제였죠. 그 어느 때보다 전 세계에서 자유와 해방의 목소리가 드높이 터져나왔던 그 시기,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해 미국에서 민권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하나둘 암살이 됐고,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 산악에서 숨진 채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칠레에서는 아옌데 정권이 전복됐고 남미의 다른 나라들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아갔죠.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공수부대가 비무장 아일랜드인 시위대를 향해 발포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졌는가 하면 체코의 프라하에는 소련의 탱크들이 진격해왔습니다. 이란에서는 전제군주인 팔레비 왕이 폭압정치를 펼치고 있었고 그리고,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팔레스타인을 협박하며 4차 중동전쟁까지 치르고 있었습니다.
서구의 젊은이들은 그 죄들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기성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졌죠. 그 욕망은 한편으로는 좌파 혁명활동으로,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세련된 저항으로, 한편으로는 샌프란시스코에 모여서 ‘전쟁 대신 평화를, 무기 대신 머리에 꽃을’이라는 구호 아래 자연주의적으로 살아가는 히피운동으로 펼쳐졌습니다.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들국화 1집에 ‘머리에 꽃을’이라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게 바로 히피운동에 대한 동경을 담은 노래입니다. 또한 스콧 맥킨지가 부른 ‘San Francisco'라는 노래에도 샌프란시스코를 본산지로 해서 펼쳐졌던 히피운동, 일명 ‘플라워 무브먼트’의 일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하는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
거기에 일본의 젊은이들도 가세했어요. 그리하여 그 고백이 폭발적인 형태로 터져나왔던 게 바로 68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혁명은 실패로 끝이 나고 혁명의 주역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불 꺼진 잔칫집, 그 휑뎅그렁한 마당 한 구석에 남아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만 제외하고. 그들은 반제, 반자본주의 기치 아래 기어이 세계혁명을 완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극좌 모험주의의 길로 나섰습니다. 그 ‘앙팡 테리블’들을 가리켜 세상은 ‘적군파(Red Army Faction)’라 불렀죠.
제가 엊그제 본 영화 <바더 마인호프(Der Baader-Meinhof Komplex)>는 적군파 중에서도 독일 적군파에 대한 영화입니다. 독일 적군파는 일본 적군파 및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등과 구분되도록, 창설자인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의 이름을 따서 '바더-마인호프 그룹’ 혹은 ‘바더-마인호프 갱’^^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잠시 옆길로 새서, 하인리히 뵐의 소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요? 하인리히 뵐이 그 소설을 쓰게 된 건 일상적인 ‘폭력’의 범람 때문이었습니다. 발단은 하노버공대의 페테 브뤼크너 교수가 바더-마인호프 그룹에게 은신처를 제공해준 일이었죠.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교수가 울리케 마인호프의 지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독일 적군파의 창설자 중 한 명인 울리케 마인호프는 아주 유명한 여성 언론인이었고, (비유를 하자면 여자 진중권쯤? 혹은 그보다 좀 약하거나...-_-;;) 따라서 그녀에게는 지식인 친구들이 꽤 있었을 테니까요.
영화에서도 마인호프가 조직원들을 데리고 대학교수인 듯한 친구네 집으로 피신하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그 친구는 순전히 마인호프와의 친분 때문에 ‘하룻밤’ 집을 비워준 것뿐이었어요. 그거 보면서 저는 저 에피소드가 바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탄생시킨 브뤼크너 교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무튼 그 ‘갱단’에 은신처를 제공해준 일이 알려지면서 브뤼크너 교수는 하루아침에 동물보다도 못한 파렴치한, 빨갱이, 천하에 죽일 놈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때 그 ‘명예 살인’ (명예롭게 살인을 당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명예가 처참하게 살해됐다는 뜻에서)에 앞장선 것이 독일의 조중동이라 할 수 있는 ‘악셀 슈프링거사’였답니다. 2차대전 직후에 악셀 슈프링거라는 사람이 출판사로 시작한 ‘악셀 슈프링거사’는 이후 보수 정치인들과의 밀착에 기반해 서독 최대의 미디어제국으로 발전했어요. 대중지 <빌트>를 앞세운 그들의 점유율은, 68혁명이 일어날 즈음에는, 서독 전체 신문시장의 40%에 달했다는군요. 암튼 보수 정치인들과의 밀착으로 성장한 만큼 당연히 <빌트>를 비롯한 악셀 슈프링거사 활자미디어들은 논조 또한 보수, 더 나아가 극우의 목소리를 대변했습니다. 하여 젊은이들은 악셀 슈프링거사를 ‘나치의 전위대’라 부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고 바더-마인호프 그룹은 그 건물에 폭탄테러를 하는 것으로 그들의 ‘악행’을 응징했죠.
노벨상 수상작가인 하인리히 뵐 역시 이미 그 거대 언론사로부터 호되게 사상공세를 당한 바가 있었습니다. (물론 노벨상 수상은 그 이후였지만--;) 그런 데다 페터 브뤼크너 교수 사건까지 일어나자 하인리히 뵐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착하게 펜을 들어 거대언론이 자행하는 일상적인 폭력의 실태를 고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부로 일하면서 진정한 사랑을 꿈꾸기도 하는 그녀, 카타리나 블룸. 성실하게 일하고 근면하게 저축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는 데 일조했던 평범한 (그런 동시에 위대한 시민으로서의) 삶. 그런 그녀를 누가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로, 빨갱이로, 음탕한 색녀로 몰아갔는가. 그리고 결국엔 살인자로 만들었는가... 그것이 바로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입니다.
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미디어법과 관련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만 거기에는 ‘재판’이라는 절차 속에서, 사법부에(여기서는 검사)에 의해 개인의 사생활이 농락당하는 모습도 그려집니다. 마침 얼마 전에는 <로만 폴란스키 : 원티드 앤 디자이어드 (Wanted and Desired)>라는 다큐멘터리도 봤네요. 아는 분이 노통 서거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면서 적극 권해서 보게 됐는데, 의외로 재밌더라구요? <원티드 앤 디자이어드>에서는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즐기는 판사가, 재판을 일일이 언론에 중계하며 여론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과정에서 폴란스키 감독의 사생활이 더욱 짓뭉개지고 그의 명예가 더 엉망진창으로 나뒹구는 것은 개의치 않죠.
감독은 그 다큐멘터리를 통해 열세 살 소녀와 성관계를 맺은 폴란스키의 행동이 잘못된 것은 분명하지만 사법부와 언론의 유착이 그를, 그의 잘못을 뛰어넘는 구제불능의 괴물로 몰아갔으며 그 안에는 ‘동구권(폴란드) 출신으로 미국에서 대성공을 거둔, 체구도 왜소한 영화감독’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편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꼬집습니다. 단,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 오직 판사만이 고인이 됐고, 따라서 그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저 다큐의 객관성에 의문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실제로 판사를 너무 어릿광대처럼 그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만 폴란스키 : 원티드 앤 디자이어드>는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과 한데 묶어서 이런 문제를 생각해보기에 좋은 재료가 되는 것 같아요. 범죄자의 사생활이, 그가 범죄자라는 이유로 대중들 앞에 샅샅이 공개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또 잔혹범죄에 대한 우리들의 혐오 및 정서적 시달림, 그 범죄에 희생당한 피해자들의 해원을 사형이라는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은 또 어떤가. 그리하여 신정아에 대한 언론보도를 묵과할 때 혹은 송윤아에 대한 집요한 응징을 다짐할 때 우리의 사생활은 과연 끝까지 안전히 보호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강호순을 당연히 사형시켜야 할 때, 더 나아가 그가 저지른 범죄를 생각한다면 사형도 얌전한 사형이 아니라 중세 때의 처형방식으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목소리 높일 때 우리는 심리적 만족감을 얻게 되지만 그 만족감에 비례해, 아니 어쩌면 그것을 초월해서 우리가 쓰라리게 지불해야 할 건 과연, 정말로 과연 없는가.
에구, 옆길로 새는 게 너무 길어졌는데 영화 <바더 마인호프>를 보게 된 계기는 그처럼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때문이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_-;;; 어쨌든 <바더 마인호프>는 독일 적군파가 결성되는 시점에서부터 은행습격, 요인암살, 폭탄테러, 여객기 납치 등을 감행하며 ‘제국주의화된 서구 자본주의’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그들의 전성기(?)를 지나 주요 멤버들의 투옥으로 인한 시련 그리고 종내 찾아온 좌절까지를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영화는 그들의 이상과 목적이 아무리 숭고했다 해도 그들의 행동 자체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앗아간 테러리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음을 짚어나가죠.
그렇다면 테러리즘은 왜 끊이지 않고 발호할까? 영화 <바더 마인호프>가 보여주는 진정한 미덕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적군파 단원들이 아니라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애쓰는 독일 연방 경찰국장이었는데요, 그가 부하 직원에게 던진 저 질문 속에 이 영화의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대답을 하지 못해 우물거리는 부하직원을 보며 경찰국장이 스스로 대답하죠. 신화 때문이지. 그렇다면 그 신화는 왜 끊임없는 부활을 도모하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도, 적군파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경대응을 반대하는 경찰국장은 스스로 답합니다. 우리가 테러리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테러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중동과 베트남을 봐야 해.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어떤 짓을 하는지를 직시하고 베트남전의 본질을 꿰뚫어할 필요가 있어. 그래야 테러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것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는 거야.
그건 미국에 살면서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만든 독일 출신의 노감독이 9.11 이후의 미국에 던지는 충고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적군파들의 그 이후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레전드 오브 리타>를 보시길. 한편으로는 가슴 아리게 다가오는 그들의 말로가 그 영화 속에 그려져 있으니까요.
1. 하늘을 날자
'09.8.6 9:02 AM (121.65.xxx.253)오옷! 프리댄서님 글이닷!!! 하하. 1착으로 리플을 달게 되는 영광이 저에게.^^
저는 '순위권 놀이'를 상당히 좋아했었는데요. '찌질이나 하는 짓'라며 저를 비난하던 친구들도 있었지만, 1착으로 리플을 달면 왜 그리 뿌듯하고 기분이 좋은지...^^;;;
(왠만하면 그만 놀라라고 하셨지만) 언제나 프리댄서님 글을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도, <바더 마인호프>도 너무 보고 싶어지네요.
늘 좋은 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2. 댓글부터담
'09.8.6 9:07 AM (203.247.xxx.172)언냐~요즘 고종석 감염된 언어 읽고 있는데 복거일 부분...
제 머릿속 어디인지는 모르겠던 소양감에...효자손입니다~ㅎㅎ3. 하늘을 날자
'09.8.6 10:18 AM (121.65.xxx.253)제가 꽤나 좋아했던 만화 중에 (만화라면, 거의 다 좋아하지만.;;;) <허리케인 죠>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권투만화인데요. 지옥같은 링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우는 (그야말로 '완전연소'!) 주인공이 등장하는 만화에요. (아마 아실 듯.) 일본에서는 <내일의 죠>라는 제목으로 나왔었는데, 일본 적군파가 1970년대 항공기를 납치해서 북한으로 가면서, '우리는 내일의 죠다!'라고 외치면서 더욱 유명해졌던 만화라고 하더군요. 저는 <허리케인 죠>를 먼저 보고 나서, 일본 적군파에 대해서 (아주 조금) 알게 되어서 왠지 그들이 반갑더군요. 테러나 항공기 납치를 찬성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만, 같은 만화를 감동적으로 봤다는 점에서.;;; 일본 적군파도 1960년대, 1970년대 소위 '전공투' 세대 이후 등장한 극좌모험주의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왠지 위 영화도, 위 책도 보고 나면, 잠깐 <허리케인 죠>를 떠올리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물론 전혀 근거 없는 예감입니다만.;;;) 제가 만화를 주로 보고 자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박노해 시인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도, 김남주 시인의 시를 처음 접했을 때도 이현세 선생님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그 작품들이 어떤 정서적 기반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들이어서 그런 것일까요?
피의사실 공표 문제는 참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사 한 분과 잠깐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빨대' 수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물론 아직 피래미 검사로서 노 전 대통령 수사 같은 커다란 수사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그냥 '보통' 검사인데요. (제가 '거물' 검사를 알 턱이 없죠.;;;) 그 분이 그러시더군요. 수사 브리핑 해달라고 그렇게 아우성 치던 게 누구냐고. 브리핑 안해주면, '숨긴다'고 비판하고, 브리핑 해주면, '빨대'라고 비판하고. 참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많이 놀랐습니다. '피의사실 공표'는 엄연히 범죄인데... 하지만, 언론과 검찰 내지는 사법부와의 관계는 참 어려운 주제입니다. 사법부의 독립에 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최근에는 권력(행정부)로부터의 독립보다도 '재판의 독립'(신 대법관 사건에서 보듯이 '사법행정'과 '재판의 독립'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아갈 것인지 - 실제 처리해야할 사건 수가 정말 많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재판의 독립'만을 강조하고 '사법행정'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물론 신대법관 사건은 그 균형을 한참 넘어서는 문제였습니다만.-) 또는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 주로 논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론으로부터의 독립' 이게 참 어려운 문제죠.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라는 책을 보니, 1990년대 초반 이탈리아를 뒤흔들었던 '마니풀리테'(깨끗한 손)에 대해서도 좀 나와있더군요. 수많은 유력 기업인들이 피의자로 소환되었다가 자살하고, 유력 정치인들도 자살하고, 국회의원 3분의 1 정도가 구속되고. 그야말로 이탈리아 정치 전체를 거의 공동화시켰던 그 마니풀리테. 그 공동화된 틈을 비집고 혜성처럼 등장해 이탈리아를 손에 넣은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언론재벌이자 AC밀란의 구단주 베를루스코니죠. 마니풀리테야말로 언론과 검찰이 합작해서 만든 일종의 '작품'인데요. ('작품'이라는 게 반드시 좋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실제로 소환되었던 유력 기업인들 중에 유력 언론사의 사주들은 빠져있었습니다. 가령, 피아트 그룹 같은.
마니풀리테는 물론 '부패 척결'이라는 좋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죽 쒀서 개 준다'는 말이 생각나는 결과를 낳아버려서... 어느 순간 불기 시작한 작은 바람이 '언론'을 통해 여론몰이가 되면서 태풍이 되어 사정의 칼바람이 몰아치고, 정치가 공동화되고, 그리고 '죽'은 결국 '개'가 먹게 되는. (음냐. 너무 과격한 표현 죄송합니다.;;;)
이탈리아 사법제도는 우리와는 좀 달라서 (1990년대 초반) 당시만 해도 예심판사(또는 수사판사)라는 제도 하에서 예심판사가 수사도 하고 자신이 직접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하는 그런 제도였던 것 같아요. (2000년 경에 개정되었다고도 들었는데, 정확히는 잘 몰라요.;;;) 한 마디로 조사하다가 밉보이면, 바로 구속되는 거죠. 우리는 검사가 영장을 청구하면, 별개의 기관인 법원에서 영장 발부 여부를 정하기 때문에 검사에게 밉보인다고 바로 구속되지까진 않는데 말이죠. 게다가 그 구속기간도 최장 6개월까지 인데다 구속기간 연장 여부를 정하는 것도 예심판사 맘이니까요. 정말 무시무시하죠. (우린 구속기간이 최장 30일이고, 10일 단위로 청구해야 되고, 구속기간을 연장하려면 다시 법원에서 연장을 허가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소환될 예정이다...라는 소문만 떠돌아도 벌벌 떨게 되고, 결국은 자살까지 하게 되고. 이런 이탈리아의 사법제도의 특징이 '마니풀리테' 즉, 부패청산 수사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었겠지요. 하지만, 사법제도의 특징 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역시나 언론과 권력이 힘을 합쳤다는 것. 그렇게 되면, 정말 무시무시한 사정의 칼바람이 몰아치게 된다는 것.
그렇다고 여론(어쩌면 '언론')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인데...
음... 아... @..@ 복잡해용. 아직 생각이 정리가 안되서... @..@
노 전 대통령께서 서거 직전까지 읽으셨다던 <유러피언 드림>을 짬짬이 읽고 있습니다. 그 중에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이라는 챕터가 있더군요. 흥미롭게도 '평화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다루면서 가장 먼저 사형제도에 대한 유럽의 태도를 언급합니다. 미국인들과는 달리 유럽인들은 사형을 정말 혐오한다고. 프리댄서님 글을 읽다 보니, 어쩌면, 중세 마녀사냥 때부터 시작되어 온 '죄'(사람이 다른 사람을 '보복' 차원에서 죽이는 일)에 대한 유럽인들의 집단적 고백이 바로 사형제도 폐지 운동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는군요. 죄에 대한 대가가 '보복'이어야 하는가 '갱생'이어야 하는가. 이것이 생각의 출발점이다. 여기서부터 '전쟁'과 '평화 유지'(또는 '전쟁 후 평화 회복')에 대한 태도가 갈리는 것이다. 뭐, 이런 내용이 그 챕터에 나옵니다. '사형'과 '전쟁'이 맞닿아 있다는 관찰은 무척 흥미롭고 중요한 것 같아요. 아무튼, 프리댄서님 글을 보다보니 <유러피언 드림>이 잠깐 떠오르네요. 아, 그리고 위 챕터에도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공습이 다루어져 있습니다. 아직 다 읽진 못했지만.;;;
음냐. 무지하게 긴 댓글이 되어버렸네요. 아... 나불나불 가벼운 주둥이 같으니라고... '남자'라면, 좀 진득한 무거운 맛이 있어야 되는데...;;;
아무튼 좋은 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4. phua
'09.8.6 10:22 AM (114.201.xxx.157)지난 번 글도 잘 읽었는 데요..
쩝... 한글은 잘 읽었는데 내용을 잘 몰라서 댓글을 뭐라고
쓸 수가 없더 라구요.
잘 읽었습니다,, 라고 쓰는 것도 한 두번이지...
그런데 오늘도 걍~~ 패쓰하기에는 웬지 섭해서....5. ???
'09.8.6 10:31 AM (218.52.xxx.20)원글이나 댓글이나..........
6. 우왓
'09.8.6 11:19 AM (203.229.xxx.234)원글도 좋고 댓글도 느무 좋아요.
하늘을 날자님.
저는 저 옛날에 전공투에 관한 책을 읽었엇는데 그 기억을 되살려 주셨어요.
일본은 전공투가 사라진 이후 부터는 정치적으로 진공 상태의 국가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프리댄서님이랑 하늘을 날자님은 (두 분 다 미혼 이시라면) 사귀셔도 될 듯 합니다요. ㅎㅎ7. ...
'09.8.6 11:23 AM (124.169.xxx.248)얼마 전 신문에 적군파 결성에 관한 비화가 실렸어요. 적군파 결성을 촉발시켰던 한 대학생의 죽음은 동독 경찰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 주요한 내용이었지요. 동독의 스파이였던 그 서독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과격진압의 선두에 섰고, 한 서독의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았으며, 그 죽음은 당시 서독사회를 테러의 화염에 휩싸이게 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어요. 그리고 서독의 역사는 다시 쓰여져야한다, 고 누가 말했더라. 그게 이제 통일된 독일이 내놓는 적군파에 관한 논평이었을까요, 아니면 우리나라 보수신문의 오지랖이었을까요. 수구 신문들이 그 토픽을 보고 지었을 얇은 미소를 생각하니 아직도 치가 떨립니다. 어쨌든 애초 그 기사를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읽었던 저는 그게 유독 우리나라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어요. 보수화는 어쩔 수 없는 대세이고 역시나 젊음은 제어되어야 할 광기일 뿐인건가요.
이 글이 반갑네요. 프리랜서님꼐서 추천해주신 영화를 보려합니다. :)8. ...
'09.8.6 11:26 AM (124.169.xxx.248)추신> 사실 저는 저 기사 후에 <허공 속의 질주>를 다시 봤어요. 그리고 이미 결론은 내렸지요. 설사 진정 박종철씨가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한들 그것이 그들의 면죄부가 될 수 있지 않을테니까요.
9. 프리댄서
'09.8.7 3:42 AM (218.235.xxx.134)하늘을 날자님. 으아, <허리케인 죠>! 하얗게 불태웠어. 하나도 남김없이...ㅠㅠ 지금 떠올려 봐도 가슴 속 한켠이 뜨거워져오는 작품이죠. 그냥 슬프다고만 하기에는 부족한. 뭔가 서러운.... 전에 (제목은 잊어버렸지만) 어떤 책에서 ‘동시대인’을 동시대인일 수 있게 해주는 제일 강력한 요소가 감정대(感情帶)라고 한 것을 봤었어요. 번역서였는데요, 원서에서는 저 단어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거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은 나네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저는 저 말을 ‘특정 시대를 제일 뜨겁고 드넓게 관통하는 감정에 대한 호응도’라고 이해했습니다. 사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적 조류가 있게 마련이고 그 사상적 조류에 따라 각광받는, 그 시대의 표상이라 할 만한 감정의 양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죠. 이때 감정은 정서적 기반이라고 바꿔써도 될 테구요. 그러므로 그 책에 따르자면, 동시대인이라고 하는 존재들은 그 시대에 제일 각광받는 감정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그것에 열렬히 호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지금 시대를 가장 드넓게, 열렬한 호응을 받아가며 관통하는 감정의 양상은 쿨함일 테고. 따라서 저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은 쿨함에 대해 적어도 ‘뭐 그런 개뼉다귀가...’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겠죠.^^
그런 면에서 <허리케인 죠>,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만화가 궁극적으로 드러내는 감정의 양상은 서러움인 듯합니다. 깊은 결핍이나 상실에서 기인하는. 혹은 억압으로 유발되는.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긴 결핍이나 상실, 억압이 아니라 공동체나 시대가 유발한 결핍이나 상실, 억압이었고... 초창기 적군파는 그런 설움에 깊이 공감했고, 그래서 그것이 추동하는 파토스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그들이 보여준 모험주의적 행위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우면서도 그들을 마냥 부정하거나 미워할 수만은 없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니 <허리케인 죠>와 <공포의 외인구단>의 탄생연도가 대략 20년 정도 차이가 날 것 같은데(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게 한편으로는 일본과 한국의 발전 정도의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인 것도 같네요. 그래서 탄생연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만화에서 조금 유사한 정서가 느껴지고, 또 전공투->적군파로 이어지는 일본의 학생운동 및 혁명운동이 대략 20년의 시간 차를 두고 한국에서 조금 비슷하게 전개된 건 아닌지... (임수경 씨 방북을 시발로 전대협, 한총련이 남쪽 학생 대표를 북한에 파견해서 범민족대회를 치른 것... 이것도 어떤 면에선 적군파 투쟁방식의 한국식 변용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쓰다 보니 문득 생각난 건데, <허리케인 죠>가 보여준 그 설움이 <파트라슈의 개>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 같네요.^^ 전공투 세대들이 문화계의 주역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들의 청춘을 사로잡았던 감정대를 표출했기 때문일까요? 그러고 보니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도 그 짙은 허무의 밑바닥에는 서러움이 깔려 있는 것 같네요. 아, 그 영화 보기 전에는 어찌나 긴장했었는지! ㅋㅋ 근데 막상 보니 꽤 괜찮았고 주인공들의 심리도 막 이해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더라는.^^
근데 <바더 마인호프>는 적군파 단원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급진주의자들이 됐는지가 생략돼 있습니다. 가정사 같은 개개인을 이룬 배경들도 최대한 배제한 채 그들이 급진주의자가 된 이후부터 보여주기 때문에 <허리케인 죠>와는 많이 다를 거예요. 제 생각엔, 감독은 자기는 자기는 테러리즘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그와 관련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영화는 독일 적군파가 전개했던 ‘투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적군파 단원들의 인간미랄까, 그런 게 잘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냉혹한, 피도 눈물도 없는 테러리스트로서의 면모만 두드러지게 부각된 측면도 있어요. 특히 전 유명 좌파 언론인인 울리케 마인호프가 ‘테러리스트’로 변모한 과정이 참 설득력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만 그런 것일 수 있겠지만, 영화만 보면 그녀가 그 가시밭길을 가게 된 게 잘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돈과 명예, 사랑스러운 아이들, 알아주는 직장 모두를 가지고 있던 마인호프가 테러리스가 된 것이 당시 서독 사람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을 주었다 하더라구요)
에고, 또 길어졌네요.^^ 음, 언급하신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도 제 생각을 좀 밝히고 싶지만 이미 쓸데없이 길어져서...^^ 하여 나머지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또 하기로 하구요. (실은 <바더 마인호프>의 배우들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ㅎㅎ--;) 뭐 기본적인 생각은 하늘을 날자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근데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쑴풍쑴풍 읽히는 소설이 아니더라구요. 하인리히 뵐이 쑴풍쑴풍 읽히게 안 써놔서.... 도리어 쑴풍쑴풍 봐질 것 같지 않았던 <로만 폴란스키 : 원티드 앤 디자이어드>가 쑴풍쑴풍 진도가 나가더군요.
어쨌든 와, 원문을 압도하는 댓글, 저 또한 감사X100만 배를 전합니다.^^ 그리고 오 노~, 이런 식의 나불나불(?)은 바람직한 거랍니다. 그러니 계속 나불나불(?)해주시고요, 드라마 대본 미끼도 계속 던져주세요.^^ (검사A를 최대한 멋지게 그려서, 으아, 현빈이 맡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모쪼록 ‘육아전선 이상없다’가 지속되시길 바랄게요~~~.^^10. 프리댄서
'09.8.7 4:38 AM (218.235.xxx.134)흐흐 푸아님, ‘???’님, ‘우앗’님. 한 마디로 이런 걸 ‘원문을 압도하는 댓글’이라고 한다죠?^^
그리고 우앗님, 크... 저 뿜었습니다.^^ 근데 어쩌나. 모두 임자 있는 몸이구요, 게다가 하늘을 날자님께선 애아범님이세요.^^ 제가 막낸데, 형제들 하고 나이 차가 좀 많이 나요. 큰언닌 거의 엄마뻘...^^;;; 외려 조카들하고의 나이 차가 적은 편인데, 큰언니네 연년생 딸들이 모두 30대 초반이랍니다. 예, 같이 늙어가는 거죠. ㅠㅠ 걔네들이 옛날부터 협박하길, 자기네한테 잘해주지 않으면 스무 살 되자마자 결혼해서, 바로 애 낳아서, 절 할머니 만들어버리겠다나요? -_- 이제 줄줄이 결혼할 예정인데 지금도 할머니 만들어버리겠다면서, 그날이 다가온다고, 한 번씩 협박하고 그럽니다. (내가 그렇게만 하면 니네 아기들 몰래 꼬집어버린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하늘을 날자님께서도 30대 초반이라고 하신 것 같은데, 흑흑 부디 나이 차가 적은 이모나 고모가 안 계셔서 그 분들이 30대나 40대 초반에 졸지에 할머니 소리 들으시는 일이 없기를 바래요. 중년이라는 말도 아직 적응이 안 됐는데, 애가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할머니! 해버리면. 엉엉...
그리고 점 세 개님. 그런 기사가 있었군요. <바더 마인호프>에서 보니, 그 젊은이가 죽은 게 이란의 팔레비 국왕 서독 방문 반대 시위 때였더군요. 시위대 한쪽에 아마도 서독에 거주하는 (잘 사는) 이란인들이나 팔레비 왕측에서 고용한 듯한 행동대원들로 이루어진 환영인파가 섞여 있었는데, 영화에선 그 사람들이 먼저 들고 있던 피켓으로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으로 그려지더군요. 그래서 혼란이 발생하자 기다렸다는 듯 경찰이 개입하면서 시위대를 마구잡이로 폭행했는데 음, 저는 그 기사 내용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동독 쪽에서 그랬을 수 있죠. 팔레비 왕을 환영하는 쪽에도 스파이를 심어두고 서독 경찰 쪽에서 스파이를 침투시켜서 시위대를 자극하는...
근데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은 학생들의 시위를 격화시키는 기폭제가 됐을 뿐이고 적군파 결성은 이미 그 전부터 예견돼 있는 것이었죠. 또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학생들의 시위는 다른 계기를 만나 폭발했을 것 같아요. 이미 분위기가 그렇게 형성되어 있었으니까요. (걍 제 생각에 그렇다는 거예요.^^) 하지만 재밌네요. 동독의 시나리오라...^^ 80년대의 독일 적군파 모습을 그리고 있는 <리타 오브 레전드>를 보면요 (그러니까 후기 적군파의 행로를 그린 영화죠), 적군파 단원들 일부가 서방의 수배를 피해를 동독으로 잠입하더라구요. 동독 정보부 요원들의 지원 아래. 그러면서 공식적으로는 적군파 단원들이 동독에 있다는 걸 부인해요. 그들은 국제적으로 지명수배된 테러리스트고, 그 테러리스트를 은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국제적으로 따 당하거나 제재가 가해올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영환 좀 스산하고 쓸쓸했어요. 동독에서 살게 된 적군파 단원, 리타는 이전의 자신을 싹 지운 채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는데, 서독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그렇다고 동독에도 완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져요. ‘자기 땅에서 유배된 자’라는 말이 어울리게. 그런 데다 당시 동독은 붕괴 직전이었기 때문에 동독 사람들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이 심했죠. 그건 리타가 추구한 이상이 배반당하는 것이기도 했어요. 그래서 리타가 공장 동료들에게 모두가 평등한 게 왜 좋지 않냐고, 능력 없으면 못 먹고 아프고 그러다 죽어가는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체제가 좋은 것 같냐고 항변하는 모습이 참 쓸쓸하게 다가오죠.
결국 그렇게 동독으로, 중동으로, 아프리카로 흩어져 살던 그들에게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요. 리타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없게 된 거죠. 하여 마지막에 검문을 피하다 죽고 마는데 그 스산한 여운이 좀 가슴을 저며오더라구요.ㅠㅠ 그에 비해 <바더 마인호프>는 참 냉정한 시각을 유지하죠. 영화 규모도 크고.^^ 그래도, 러닝타임이 2시간 30분!이었는데 지루한 줄 모르고 꽤 재밌게 봤답니다. 게다가 <바더 마인호프>에는 그 당시를 대표하는 노래들이 딱 필요한 만큼 선곡돼서 적재적소에 쓰였어요. 그거 듣는 재미도 컸구요.^^ 영화 시작하자마자 흘러나온 재니스 조플린의 <Mercedes Benz>에서 막 감동, 베트남전이나 마틴 루터킹 목사 연설 등 당시 시대의 흐름을 간략히 훑어주는 장면에서 나온 딥 퍼플의 <Child in Time>에서 또 감동(아하하, 아아아... 하는 클라이막스 부분만 깔리긴 했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온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에서도 감동 줄줄...ㅠㅠ
앗, 밥 딜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미 미국 적군파에 대해 다룬 영화도 있다고 하네요? 미국 적군파는 ‘weatherman'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을 밥 딜런의 노래 <Subterranean Homesick Blues>에서 따왔답니다. 가사에 ‘You don't need a weatherman to know which way the wind blows..’라는 부분이 있는데, 거기에서 웨더맨을 따와서 자신들의 조직명으로 사용했다는군요. 그 웨더맨에 대해 그린 영화가 <웨더 언더그라운드>인데 <바더 마인호프> 못지 않답니다.^^ (오히려 더 낫다는 얘기도...) 그것도 함 봐야지..^^
그리고 <허공에의 질주>는 저도 진짜 감동적으로 본 영화랍니다. 아아, 리버 피닉스! 앗, 그러고 보니 리버 피닉스 부모님이 히피였네요.^^ 그래서 아이들 이름도 river, rainbow, leaf, summer... 저 중에 <글래디에이터>에 나왔던 리버 동생 호아킨 피닉스가 레인보우였던가요, 리프였던가요. 암튼 그랬네요.^^ 아, 말이 나온 김에 <허공에의 질주>도 다시 보고 싶네요. 그거 보고 리버한테 뿅 가서 헤롱헤롱했었는데. ㅋㅋ
암튼 댓글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11. 프리댄서
'09.8.7 4:56 AM (218.235.xxx.134)그리고 '댓글부터담'님. 언냐라고 불러주셔서 부끄부끄...ㅎㅎ
(하긴 마트 가면 아내 손에 이끌려 와서는 피곤한 듯 연신 하품해대는, 덩치는 곰 같고 얼굴은 술에 찌들고 일에 찌들고 어느덧 인생에 찌들어가는 남자들이 저보다 어린 경우가 많더라구요. 아, 오블라디 오블라다ㅠㅠㅠㅠㅠ)
근데 고종석과 복거일을 보면 진정한 자유주의자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은지..^^
한쪽은 무늬만 자유주의자.^^ 저는 <고종석의 유럽통신>도 좋았어요.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자유주의자로서의 고종석의 면모가 잘 드러났달까요?^^12. 하늘을 날자
'09.8.7 12:07 PM (121.65.xxx.253)하하. '우왓'님 댓글이 재밌는데요. ㅋ 아내가 혹시 이 댓글을 보면, 질투를 느끼려나...? 제 아내도 82에 아주 가끔 들어오거든요. 아마 이 글을 못읽지 않을까 생각되긴 하네요. 주로 살림정보 글만을 보는 터라... 제가 글을 몇 개 썼다고 시간 나면 좀 봐달라고 얘길 몇 번 했는데도, 제 글도 안보는터라...;;; 제 글은 뭐, 어차피 평소 말로 얘기하던 것이니 굳이 읽을 필요까진 없더라도 '프리댄서'님 글은 챙겨볼 만하다고 추천까지 했는데도 아직 안읽은 듯 해서... 뭐, 바쁘니 그렇겠지만요.;;; (아내 험담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헉. 근데, 생각해보니 만에 하나라도 이 댓글 보고, 아내가 화내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 문득 들면서 등에 한줄기 땀이...;;;)
그리고 제 막내 이모가 올해 마흔이시랍니다. 그래서 첫째 태어났을 때 30대 후반임에도 벌써 할머니가 되셨었지요.;;; 첫째 돌 무렵에 지하철 타고 저희 집에 놀러오신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지하철에서 통화 중에 "응, 지금 손주 보러 가고 있으니 걱정 마."라고 얘기하시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이상하단 눈으로 막내 이모를 쳐다보셨다고 하시더군요. 음냐.;;;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은 여러 모로 제겐 벅찬 주제인데, 어쩌다 말이 나와버렸네요. 이왕 말 나온김에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뭐, 헌법보다 상위법으로 '국민정서법'이 있다는 농담조차 있다고 하니 여론을 어찌 무시할 수만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여론' 덕분에 우리는 자칫 기소유예로 그냥 흘려버릴 뻔 했던 광주학살의 주역들을 기소할 수 있었고, 결국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필두로 한 전직군인들을 유죄판결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여론'이란 것이 혹시라도 '조작'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칫하면 '공포정치'와 '칼바람'으로 변해버릴 수 있는 것이어서, 저는 항상 겁이 나요. 국민들의 '여론'이란 것이. 게다가 '공포정치' 이후에는 종종 '반동'적인 결과가 오기도 하는 것 같아서 더욱 겁이 납니다.
드라마 대본은... 음냐... 잠정중단 상태입니다. 국가보안법 피의자를 주된 인물로 다루자면, 역시 80년대와 반미운동, 통일운동을 다루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제 생각엔) 그 대표적 인물인 문익환 목사님과 김남주 시인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해한, 내 안의 문익환, 김남주의 모습을 대본 상의 피의자에게 투영시키자...는 것이 제 목표였는데요. 그래서 그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책인 <문익환 평전>과 <김남주 평전>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어요. 근데... 영 진도가 나가질 않네요. 단순히 책 읽을 시간이 있고/없고의 문제가 아니고, 영 불편해서... 특히, 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은 역시 김남주 시인인 것 같은데, 도대체 그 시들이 친해지지가 않으니...
정말 이렇게 말하기 싫은데, 이렇게 밖에 표현을 못하겠어요.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제겐 <김남주 평전>도 <문익환 평전>도 너무 '교조적'이다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남주 시인의 시들도. 그의 <아버지>는 너무 마음이 아팠고, <진혼가>는 정말 섬뜩했으며, <나의 칼 나의 피>는 정말 강렬했지만, '반미감정'이 전면에 등장하는 시들은 참... 잘 못읽겠더라고요. <조국은 하나다>도 좀... 제가 이미 '김남주 시인의 시를 불편해하는 기득권층'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인가...하는 자책감도 들고요. <김남주 평전>도 1부 중간 정도 읽다가 멈춰버렸어요. 평전을 쓴 강대석 교수님의 언급들이 영 불편해서 더 못읽겠더라고요. <문익환 평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형수 시인의 언급들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불편해서 중간쯤에서 멈춰버렸어요. 게다가 김형수 시인은 김지하 시인의 '죽음의 굿판'에 대해서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르자'고 날선 비판을 하신 바 있는 분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고선 더욱.
저 스스로부터 이해할 수 없고, '화해'할 수 없는데, 어떻게 제 분신들을 등장시킬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더 뭘 쓸 수가 있겠습니까... 휴우... 그래서 <내가 만난 김남주>, <김남주론> 등의 다른 책들을 좀 읽어보려고 찾아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모두 절판. 에고... 정말... 그러다가 그래! <머리 속의 악마>에도 테러리스트가 나오는구나! 그거라도 한 번 읽어보자! 하는 마음에 일단 <머리 속의 악마>를 구입해 놓긴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이 글을 보니 너무 반갑더라구요. 일본 전공투, 적군파로부터 시작해서 김남주에 접근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들구요.
사실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프리댄서님의 '김남주론'이 궁금해서에요. 휴우... 혹시나 저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실 시간과 여유가 되신다면, 부디 제게 한 수 가르침을... 꾸벅. ('김남주 시인의 시는 말이야... 어떻게 읽어야 하냐면... 바로... 잘 읽어봐야 한다!' 같은 대답을 하시면, 정말 절망...ㅠ.ㅠ)
에고. 답답한 마음에 긴 투정만 늘어놓았네요. 에고. 머쓱해라;;;
그래도 혹시 여유가 생기시면, 꼭 좀 부탁드립니다~~~ '김남주론'이요~~~!!!13. 하늘을 날자
'09.8.7 12:24 PM (121.65.xxx.253)아... 쓰고 나서 제 댓글을 다시 읽어보니 <문익환 평전>과 <김남주 평전>을 도매금으로 묶어서 비판해버린 것 같아서 좀 후회되는군요. 제가 읽으면서 느낀 바로는 그래도 <문익환 평전>이 <김남주 평전>보다는 훨씬 섬세하고 감동적인 책이었는데... 아웅... 그래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지만요.;;;
아, 그리고 '원문을 압도하는 댓글'이라뇨. 헐.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럴 리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래도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무척 좋네요.^^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공부 열심히 했다고 상으로 손에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주시면서 머리 쓰다듬어 주실 때 느꼈던 그 뿌듯함. 그런 기분이랍니다.^^
좋은 하루 (및 주말) 보내세요~~~^^14. 프리댄서
'09.8.8 1:59 AM (218.235.xxx.134)아유 뭐 그렇습니다. 우리 유재석이 <해피 투게더>에서 그러죠. 꽁트는 꽁트일 뿐이라고. 날도 덥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꽁트를 톨스토이 작품으로 바꿔서 생각할 여력이 있나요?--; 뭐 그건 그렇구요, 케켁, 정말로 나이 차가 적은 이모가 계시네요. 더구나 그 이모님께서는 저랑 동갑이시고! 그런데 그런 이모님을 일찍(?) 할머니로 만들어버리셨군요.-_-;;; 어째쓰까나. 손주...ㅎㅎㅎㅎㅎ 저라면 아기가 말을 배울 즈음에 으슥한(?) 곳으로 데려가서 절대 할머니라고 부르지 못하게 교화(?)를 좀 시키겠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건 간에. 푸흐흐흐. (근데 조카사위는 뭐라 불러야 하나? 지금은 이름으로 부르는데... 아흠.--;)
헌데 예심판사 제도가 그런 거였군요. 카프카와 체호프, 고골리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예심판사. 그게 어떤 걸까 궁금했었는데 (물론 책장을 덮는 순간 그 궁금증은 사라져버리곤 했지만) 으흠, 끄덕끄덕, 그런 거군요. 오우, 쎄네요.^^ 저도 마니풀리테와 베를루스코니 얘기는 들었었습니다. 그러게, 그게 참....
이스라엘이 남미에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납치(!)’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웠을 때 미국에 있는 한나 아렌트가 <라이프>지로부터 취재 위촉을 받아 예루살렘을 방문했었죠. 그녀가 어느 책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아렌트는 그때 예루살렘의 군중을 보고 시오니즘과 깨끗하게 결별했다고 고백합니다. 그 자신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십대 때 테오도르 헤르츨의 저서를 읽고 시온주의야말로 자기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마음먹었었다고 해요. 근데 그 시오니즘을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 동포들이 아이히만 재판을 둘러싸고는, 빌라도를 향해 무조건 예수를 죽이라고 외쳤던 먼 옛날의 조상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재판정 주변에 구름떼처럼 모여들어서는 ‘죽이자! 처단하자! 무조건 죽여!’를 외쳤던 거죠. 한나 아렌트는 야수처럼 으르렁대는 동포들의 모습에서 시오니즘 또한 하나의 광기에 불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앞으로는 굳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고 합니다.
대중은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존재인 것 같아요. 봉건시대에 흔히 있었던 ‘광장에서의 처형’만 봐도 그렇죠. 꼬챙이를 항문에 집어넣어 내장을 일일이 다 통과시킨 다음 다시 입이나 콧구멍으로 나오게 만드는, 그래서 최대한 숨이 오래 붙어있게 하면서 고통을 최대한 많이 주다가 죽이는 의식을 보면서도 “벌써 죽으면 안 되지! 더 찔러! 더 깊게! 꼬챙이를 더 날카롭게 만들라구! 저것 좀 보라지, 놈의 눈알이 튀어나왔네. 오, 저 피가 튀는 것 좀 봐. 젠장, 그래도 부족해. 더 세게, 더 깊이 찌르라구! 비틀면서 찔러. 놈의 뇌수까지 흘러나오게 말야!”라고 흥분하는가 하면 영특하게도 형의 집행을 막아 죄수를 빼돌림으로써 군주의 폭정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죠. 그래서, 이미 역사가 증명하듯이, 대중들이 집단적으로 표출하는 의견 역시 항상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현실적으로 현명한 것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누군가의 선동에 쉽게 휩쓸리는 경향이 있죠, 분명하게.
저는 ‘다구리’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단어가 주는 기묘한 느낌 때문에 참 당황스러웠었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노골적인 상소리처럼 명백하게 혐오스러운 것도 아니고 일 때문에 같이 식사를 하게 된 사람이 아주 음탕한 농담을 했을 때처럼 뚜렷하게 기분이 더러운 것도 아닌, 이유를 알 수 없게 은근히 뭔가 계속 찝찝한 어떤 느낌, 그런 게 느껴지더라구요. 전에 TV 다큐멘터리에서 수컷 개구리(무슨 종류의 개구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암컷 한 마리 등짝에 붙어서 교미를 하려고 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게 연상되기도 하고, 초등학교 때 몸집도 작고 공부도 더럽게 못하는 남자 아이 한 명을 다른 남자 아이들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괴롭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게 ‘다구리 틀다, 다굴 당하다...’ 식으로 활용이 돼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죠. 암튼 그 말처럼 정말 기묘하게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온 단어도 없었지 싶네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를 읽을 때도 딱 떠올랐던 게 저 말이었습니다. 다구리.)
그러니까, 말이 좀 장황하게 흘렀는데,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에는 ‘다구리’적인 게 분명 있는 것 같아요. 이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근대적 질서에 익숙하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현대 국가의 ‘시민’들도 그 속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건 아니구요...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당연한 말을 반복하는 거지만, ‘여론’에 무조건 승복하는 것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거죠. 하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여론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무시할 수 없을 때가 있는 건 아닌지.... 그게 압도적 다수의 의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잠복해 있는 어떤 진실 때문에. 가령 이번 강호순에 대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잔혹한 복수의 열망 같은 것들. 저는 어떤 경우에라도 결단코 사형은 반대하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의 질만큼 그가 당하기를 바라는 열망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그런 존재이고, 그런 작자들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게 사필귀정의 진리가 존재한다는 단순명료한 예로 군림할 테니까. 그래서 그로부터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의지가지가 되는 어떤 심리적 위안 같은 것을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음... 불교에서 우리 중생들이 윤회를 거듭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삼계(三界)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제일 하부에 있는 것이 욕계(欲界)입니다. 유정(有情)이 사는 세계로, 바로 인간들이 소속된 곳이죠. 또한 욕계는 인간과 함께 악귀, 축생이 살아가는 곳이기도 하여 지옥, 아수라를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다 ‘유정’과 관련된 것이니까요. 여론이라는 것에는 때로 욕계의 어쩔 수 없는 본성을 드러내는 바도 포함되는 것 같다는 말이죠. 그래서 올바르지는 않지만 어떤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구요.
쩝쩝... 저도 잘 모르는 걸 쓰려다 보니 또 길어지네요.-_- 그렇지만, 그렇다 하여, 그 진실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이유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또한 바람직하지 않겠죠.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그에 대해선 시어머니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지 않을까..^^;;; 근데 그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면도칼로 불필요한 가지들은 잘라버리라는 오캄의 말처럼 복잡하고 그래서 판단이 어려운 문제일수록 단순하게 생각하면, 어쩌면 최상은 아니더라도 적절한 해답은 찾을 수도 있지 않을지.... 예를 들면, 이런저런 문제가 있지만 공동체의 이익이 우선이다, 라는 생각에 입각해서 불필요한 가지들은 쳐낸다든가... 아웅, 물론 어렵겠지만 어떤 깃발을 기준점으로 삼을 것인가를 먼저 정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 해봅니다.--; 그래야 여론과 정면으로 부딪히게 돼도 자신있게 대중들을 설득하려 할 수 있을 것이고...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역시 어려운 문제네요.^^
근데 <원티드...>의 판사는 좀 또라이 같은 사람이더라구요. 거기에 그려진 모습만 놓고 판단하면.^^ 그 다큐에서 그 판사를 집중적으로 ‘깠던’ 건 감독이 ‘로만 폴란스키가 정말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을 정도의 문제아인가, 혹시 타자를 향한 우리의 비관용적인 태도가 그런 이미지를 낳은 것은 아닌가, 그 태도가 언론과 사법부를 부추기고 언론과 사법부의 결탁이 다시 우리 안의 그 태도를 더욱 고양시켜 로만 폴란스키를 쫓아낸 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마침 자청해서(언론에 자주 노출될 수 있는 사건이니까) 그 사건을 맡은 판사가 우리(미국인) 안의 비관용적인 태도에 적극 동참할 태세가 되어있는 또라이였기 때문에 그 사건이 더더욱 그렇게 흘러갔다고 주장하는 거죠.--; 암튼 결론은 버킹검... 이 아니라 그 다큐가 저한테는 꽤 재밌었다는 것.^^ 덧붙여, 로만 폴란스키 영화는 전에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누르다 우연히 EBS에서 해주는 <악마의 씨>를 봤었고, 그 후 DVD로 <차이나타운>을 봤는데 영화의 주제를 떠나 그 감독, 물건이더라구요. 개인사도 참 파란만장하고...^^
음... 그리고 김남주 시인은 저도 이제는 읽지 않습니다.--; 그게 죄책감을 느껴야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남주 시인 본인도 자신의 시를 그 시대에 필요한 바를 이끌어내는 데 쓰이길 원했더랬죠. 바로 지금, 자신의 시가 남김없이 하얗게 불태워져서 이 엄혹한 장막을 찢는 데 이바지하길 바랬달까? 너무 뻔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하여 본인의 희망처럼 그분의 시는 그때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덥히는 역할을 충분히, 훌륭히 했고 김남주 시인 역시 허리케인 죠 못지 않게 완전연소의 생을 살다가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원하는 만큼 이루어지진 못했지만요. 그분의 시가 일견 불편하고 지나치게 전투적인 건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이 바로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구요.
그런데 김남주 시인은, 제가 보기엔 시인으로서의 자질이 매우 뛰어나신 분이에요. 정말루. 일부러 전투적으로 쓰셨을 뿐.^^ 전투적인 것과 거칠다는 건 좀 다르죠. 저는 시도 시지만 옥중연서나 이런저런 글을 통해 밝히신 그분의 문학이론에 많이 매료됐었어요. 아니, 그걸 통해 많이 배웠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특히 옥중연서는 대학 1-2학년 때 정말정말 좋아하고 열심히 읽었던 책입니다. 김준태 시인이 쓴 김남주론도 재밌게 읽었었구요. 그런데! 어느 시점이 되니까 그 책에 거부감이 느껴지더군요.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인가요, 감옥에서 아내와 처형에게 보낸 편지묶음 책... 그것에 대한 느낌도 비슷했는데요,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김남주 시인과 그람시의 ‘선생님적인’ 태도 때문이었어요. 어느 순간 제가 그들로부터 편지를 받는 대상이라면 숨 막혀서 한번 터트렸을 것 같더군요. 됐어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거 읽어라, 저거 읽어라, 이건 이렇게 봐야 한다, 저건 저렇게 봐야 한다... 하는 가르침은 지겨워요! 하고.-_-;;;;;;;;
저 또한 김남주 시를 다시 읽는다면 아마 20년 전과 같은 감동을 받지 못할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남주 시인을 떠올리면, 마치 군대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온 오빠를 떠올릴 때처럼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해지고, 그러는 한편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건 그가 진정으로 순연한 전사였기 때문이 아닌지.. 다시 말해 우리의 순결한 적군파였기 때문이 아닌지...
그러므로 결론은, 김남주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냐면.... 잘 읽어야 한다는 거죠.^^ 저 또한 늘 좋은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고요, 님도 좋은 주말 되시길! (아아, 어쨌든 손주...ㅠㅠ)15. 프리댄서
'09.8.8 2:15 AM (218.235.xxx.134)아, 그리고 <머리 속의 악마>는 테러리스트로서의 면모보다 현대 프랑스인, 더 넓게는 현대 유럽인이 안고 있는 '원죄'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아요. 나치즘과 그것에의 부역. 그 원죄가 결국엔 괴물들을 낳았다는... 아닌 게 아니라, <바더 마인호프> 볼 때 <머리 속의 악마> 인물들이 겹치기도 하더군요.
16. faye
'09.8.9 9:17 PM (209.240.xxx.218)일본의 적군파, 유럽의 적군파..... 결과론적으로 국론분열에 기여했지요.
특히 일본의 적군파는 자민당 장기집권에 혁혁한 기여(?)를 했습니다. 식민지하에서 그런식의 운동은 결국 식민지체제를 연장하지요. 이런 의심이 들면 당연히 미국의 개입을 의심해야 합니다.17. 프리댄서
'09.8.10 1:57 AM (218.235.xxx.134)문득 홀연히 나타나셔서 핵심만 툭, 짚어놓고 또 홀연히 사라지시는 faye님.ㅎㅎ
미국. 음...--; 암튼 그러게요, 거대한 열정이 회오리치고 간 자리엔 반동의 계절이 찾아오고 그랬네요. 뜬금없는 얘기지만, 적군파에 좀 관심을 가지니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제대로 이해될 것도 같습니다. 전 하루키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제 취향은 아니라서-_-) 그 작품은 묘하게 여운이 남더라구요. 전에도 그게 전공투 세대의 (학생운동의 좌절로 인한) 허무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허무의식이 깊게 다가오진 않았었거든요. 아마 우리나라 독자 대부분이 그랬을 텐데 무엇보다 그 소설이 걸치고 있는 감각적인 세련미에만 도취됐었죠. 근데 이젠 그 허무의식이 뭔지 좀 알 듯 말 듯싶달까요? (아, 살다 보니 제가 하루키를 품평하는 날도 있네요.ㅎㅎ) 그리고 정말 오시나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 보여주는 그 짙은, 탈출구라고는 없는 꽉 막힌 절망감도 조금은 더 잘 이해할락말락해지는 듯싶어요.^^ (물론 전 <감각의 제국>을 삭제판, 즉 쎈^^ 장면은 편집된 것으로 봐서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전공투 투쟁 이후 반동의 바람이 불어닥친 일본사회의 숨막힘을 그 질척질척한 은유로 드러낸 게 아닐까...
음... 어제 친척 결혼식엘 다녀왔는데(우르르 모였다가 밥 먹고 우르르 헤어지는 그놈의 결혼식-;), 거기 다녀온 후 시게노부 후사코 얘기를 접하고는 기분이 좀 묘했었답니다. 저녁에 쉬면서(?) 인터넷으로 적군파 관련 자료를 좀 뒤적여봤거든요.--; 결혼식장에서 누구네 승진 얘기, 집값 얘기, 아이들 진학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듣고 왔는데, 거 참 스물여섯 살에 혈혈단신으로 아랍으로 날아가 평생 전사로 살아온 일본여성이 있다니. 전장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마치 짐처럼 가방에 넣어 다시 이 전장, 저 전장으로 옮겨 다닌 삶. 그 잘난 엄마 덕분에 27년간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던 딸 아이. 그 아이는 저보다 세 살이 어리구요... 그리고 ‘조국의 해방’을 위한 싸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 집을 털었던 김남주 시인. 그 때문에 감옥에 갇힌 그가 감옥 안에서 일어, 스페인어, 독어 등을 독학해 관련자료 하나 없이(!), 그것도 종이가 주어지지 않아서 우유곽 빈자리에다 간신히 번역해놓은 브레히트, 네루다, 마야코프스키, 아라공의 시들.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 나오는 70년대의 서독 감옥과 비교하면 얼마나 천양지차인지... 독일 적군파 죄수들한테는 책장, 노트, 펜은 물론이고 TV까지도 주던데..) 참 답답하고 무모한 낭만주의로 가득 찬 삶이지만, 결코 부럽지도 동경하고 싶은 삶도 아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그들의 싸움을 단지 ‘그런 식의 투쟁’이라고만 치부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더군요.-_-;; (어제까지는 뭐 습도도 높아서 비일상적인 것에 이끌리기가 쉬웠으니까요^^)
암튼 그렇네요. 제가 위에서 링크한 바더-마인호프 그룹의 테러활동 중에는 한스 마르틴 슐레이어라는 독일 전경련 회장을 납치해다가 결국 살해한 사건도 있는데,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그 사람이 나치 부역자더군요. 전후에도 나치 자금의 도움으로 부를 일구고 유지한. 그렇다 해도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기성세대의 업보가 그들을 낳았고 사회의 부조리가 그들의 등을 떠민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 하여 그들의 투쟁방식이 정당화 내지는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마침 어제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그 전경련 회장을 납치, 살해했던 적군파 멤버에 관한 기사가 있더군요. 바로 요거. http://media.daum.net/foreign/asia/view.html?cateid=1042&newsid=2007021318292...
오늘은 밤이 되니까 아우, 초가을처럼 선선하네요. 문득 어렸을 때 동네 ‘리민회관’에서 열렸던 ‘리민 노래자랑’이 생각납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는데요(TV 채널이 하나밖에 안 나왔음! 그래서 <은하철도999>와 <호랑이 선생님>을 못 보고 자랐다죠? MBC가 안 나와서..), 추석을 앞둔 무렵이었어요. 한창 동네 언니오빠들, 아저씨 아줌마들이 나와서 노래 부르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좀 춥더라구요. 근데 그때 사회자 오빠가 갑자기 “점방집 전지현 어린이. 점방집 전지현, 앞으로 나와라. 아버지께서 잠바 가지고 오셨다. 감기 걸린다, 빨리 앞으로 나와서 잠바 입어라...” ㅎㅎ 그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을 일으키던 선선한 초가을바람. 거기에서 느껴지던 냄새가 오늘 밤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나더군요.
걍 잠이 안 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봤습니다.^^ <-- 이런 게 바로 늙어가는 증거라던데.. (누가 보고서는 이 밤에 저 여자 미쳤나, 할 것 같다는... 아웅.-_-;;;;)
어쨌든 faye님, 건강하세요. (근데 이 답글을 보실랑가???)18. 프리댄서
'09.8.10 1:59 AM (218.235.xxx.134)아고, 댓글 고쳐서 다시 등록하다가 시게노부 후사코 얘기 적은 댓글을 실수로 지우고 말았네요.--;
19. faye
'09.8.10 7:45 AM (209.240.xxx.245)잘 알지도 못하면서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그런식의 투쟁'이라는 말이 그 투쟁에 뛰어든 많은 사람들을 모독하는 말이 될 수도 있겠네요. 제가 딴지를 거는 부분은 그런 조직들의 우두머리들에 대한 것들이라고 해두죠. 'Invisible Curcus"란 영화를 본적이 있는데요. 순수한 참여자들은 그렇게 비극적인 최후(자살)를 맞는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은 식자일수록 유럽에 대한 사대주의가 뼈속까지 박혀있습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지만) 절대고독 이나, 극심한 허무함 등은 그 사대주의의 끝에서 갈곳 잃고 헤메는 중에 지나지 않아요. 존 레논의 노르웨이의 숲이나, '69 우드스탁이나, 일본 지성들이 입이 침이 마르도록 부러워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69우드스탁이 일궈낸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냥 반항하는 청춘들의 쇼이고, 배설구의 역할을 톡톡히 했죠. "우리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베트남)에 항의한다. 그래서 모였다. 그리고 노래한다. 춤춘다." 그리고 대마초피고, 뽕하고, 자유연애하고... 간판만 그럴듯하게 바꾸면, 우리의 80년대 3S 정책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결과적으로 그런 무브먼트들이 이룩한것은 '저항세력'의 자위와 해소입니다.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저항운동'들이 결국은 그런식의 자위와 해소, 혹은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 상층부에는 cia와 연결이 되어 있지요. (최근 이란 사태를 면밀히 바라보면....)
몇년전 타계한 정운영선생이 그러셨죠. 60,70년대 운동권 서적의 종이질은 (갱지도 귀한 시절에) 최고급 백지였다. 그 이유는 그 책들의 출처가 미국정부이기 때문이다..20. 하늘을 날자
'09.8.10 9:20 AM (121.65.xxx.253)아, 프리댄서님의 적군파에 관한 링크 댓글이 없어졌네요.;;; 지난 밤 초저녁에 둘째 분유 타서 먹이면서 꾸벅꾸벅 졸다가 의자에서 둘째 안고 한 1시간 잤더니 도저히 밤에 잠이 안와서 굉장히 늦게 잠들었습니다. 새벽 1시 30분 정도에. (아... 결혼 전에는 이 시간이 오히려 초저녁이었는데... ㅠ.ㅠ) 덕분에 82에 접속해서 프리댄서님 댓글을 볼 수 있었지요.^^ 휴우... 다행...
김형수 시인에 대한 언급은 잘 읽었습니다. 예, 좋은 분인 것 같아요.^^ 저는 그 분의 시는 읽은 것이 없고 <문익환 평전> 밖에 읽은 것이 없지만, 읽으면서 느끼기에 그리 느꼈습니다. 제가 그려내고 싶은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이것저것 잘 잴 줄 모르고, 답답할 정도로 순수한. 근데, '동아시아의 근원'을 탐구하는 김지하 시인과 주인공이 만나게 된다는 그 일본 다큐멘터리는 도대체 어디서 구해볼 수 있는 것인지... 일단, 그런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놀랍군요!!! 헉!!! 근데, '어둠의 경로'를 통하더라도 구하기가 영 쉽지 않을 것 같군요. 아... 정말... 독립영화들이 유통되는 방식에 불만이 많습니다. 홍보도 할 겸 해서 유튜브로 한 절반 정도는 볼 수 있도록 유통시켜주고, 나머지가 궁금한 사람은 애플 앱스토어 같은 것을 만들어서 인터넷으로 구매해서 pmp로 볼 수 있게 해주면 정말 좋으련만... 그게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만요.
'일본인들은 식자일수록 유럽에 대한 사대주의가 뼈속까지 박혀있다'? 음... 좀 성급한 단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에 대한 지나친 폄훼가 아닐지요? 독일 법학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평가조차 있는 일본 법학을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일본 법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분야는 아무래도 민법학인 듯 하고(우리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습니다만), 일본 민법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람은 아무래도 我妻 榮인데요. 我妻가 과연 독일 민법학의 '지배'를 받아왔는지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적어도 일본 민법학은 (우리와는 달리) '외국의 법개념 등을 완제품으로서 수입적용하려는 경향'을 어느정도 넘어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는거죠. 가령, 양창수 교수님 같은 분께서.
오히려 저는 '일본은 어떻게 서구문물을 수용해 왔는가' 진지하게 검토해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일본 비교법학을. 저는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당연히) 많다고 생각하고요. 갑자기 독일 적군파와 일본 적군파가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을 비교해보고,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네요. 우리 비교문학의 양상과 일본 비교문학의 양상도 비교해보고, 알아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음냐. 시간이 없어서 힘들 듯 하지만.;;; 시게노부 후사코라는 여성에 관해서도 궁금해지고요. 음... 서평 링크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검사 A는 '보수'적인 인물이에요. 양창수 교수님을 보면서 '양 교수님이 보수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면, 저런 보수가 보수진영을 주도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검사 A는 양 교수님을 모델로 하고 싶어요. 검사 B는 '진보'적인 인물이고요. 윤진수, 한인섭 교수님을 보면서 '저 분들이 진보개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면, 저런 진보가 진보개혁진영을 주도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었구요. (역시 할 수만 있다면) 검사 B는 윤, 한 교수님을 모델로 하고 싶고요. 음냐. 근데, 아무래도 제 역량이...;;;
아무튼 그래서 검사 A는 제일 좋아하는 시가 김수영 시인의 '거대한 뿌리'랍니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제발 벗어던져야 할 전통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전통이란 게 있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이게 '보수'인 검사 A의 기본생각이죠. 실제로 양 교수님께서는 그 논문들에서 우리 (민)법학에서 제일 아쉬운 것이 '전통의 부재'라고 여러 번 언급하신 바 있고요.
음... 역시 김남주 시인의 시는... 어떻게 읽어야 하냐면... 잘 읽어야 하는 거였군요.^^ 옥중연서도 샀답니다. <편지>라는 제목으로 나와있더군요.^^
늘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세요~~~^^21. 프리댄서
'09.8.10 2:58 PM (218.235.xxx.134)앗. faye님께서 잘 모르신다고 하시면 저는 더더욱, 진짜로 잘 모르면서 떠들어대고 있는 거예요. 에구구...--;
‘Invisible Curcus’라는 영화를 구글에서 검색해보니, 카메론 디아즈가 출연한 영화네요. 정확한 제목은 'Invisible Circus'인 것 같은데 다행히 ‘Invisible Curcus’라고 쳐도 설명이 나오는 게 하나 뜨네요,^^ 이제 막 18살, 즉 성인이 된 미국의 소녀가 유럽에서 자살한 언니의 자살 원인을 파헤치기 위해 유럽으로 날아갔다가 언니가 독일 적군파에 가담했던 사실을 알게 되는 내용인가 보죠? 결국 언니의 자살원인은 광기 어린 이념에의 집착, 그 무모함이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는 비극적이고도 쓸쓸한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어쨌든 저도 원칙적으로는 faye님처럼, 적군파가 벌인 ‘그런 식의 투쟁’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게 우두머리가 치밀한 정치적 계산 하에 주도한 것이든 순수한 참여자가 그저 단순히 숭고한 의도로 한 것이든 간에요. 다만 그들이 떨쳐 일어서게 된 사회역사적 배경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달까요? 그걸 강조하려다 보니 지난밤에는 다소 장황하게, 그리고 조금은 감상적으로 주절거렸던 것 같네요. ㅎㅎ
음... 하지만 69우드스탁에 대해서는 faye님과 조금 의견이 다른데요, 물론 그들이 대마초 피고, 뽕하고, 자유연애라는 말로도 부족한 성적인 자유를 주창한 건 사실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대마초 피고 뽕만 한 게 아니었죠. 마약이 인간 해방을 위한 혁명적 수단이 될 수 있다면서 마약을 신성화, 종교화하다시피 했죠. 분명 그들이 남긴 폐해도 적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거창한 대의명분 아래 우드스탁에 모여서 지들이 꼴리는 대로 행동했을 뿐인, 떼거지로 한 판 거나한 마스터베이션을 행한 것뿐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겠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 중에 미셸 우엘벡이라는 프랑스 작가가 있는데요, 그 사람이 쓴 <소립자>에 그런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68세대 중에서 극단적으로 개인의 해방에 집착했던. 어쩌면 적군파의 이란성 쌍생아라 할 수 있는 그들은 적군파와는 다른 측면에서 극단적 모험주의의 길로 나섰습니다. 전적인 성해방을 통한 개인의 완전한 자유 쟁취. 우엘벡은 소설 속에서 그들을 아주 냉소적으로 그리면서 68세대의 신화화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소설이 나오고 나서 68세대의 열성적인 일원이었던 카트린 밀레라는 여성 미술평론가가, 68세대를 옹호하기 위해 자신과 남편의 성생활을 다룬 <카트린 M의 사생활>을 펴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 책은 아직 안 읽어봤기 때문에 어떻게 옹호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것 말고도 68세대가 남긴 폐해는 또 있겠죠. (어쩌다 보니 저도 잘 모르는 서구의 69세대 전체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네요.-_-) 아웅, 또 말이 장황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68혁명의 의의는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아니라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서 일으킨 ‘문화혁명’이 아니었던가 하는 겁니다. 단적으로 68년 파리의 5월도 대학의 여학생 기숙사에 왜 남학생이 드나들면 안 되는지,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촉발됐죠. 거기에서 출발하여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모든 것을!’이라고 외쳤던 68혁명은, 의당 혁명이라면 이룩해야 할 정치권력의 전복으로까지는 가지 못했으나 사회 전반에 거대한 문화적 충격을 가함으로써 일정 정도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세히는 모릅니다만..-_-)
그런 차원에서 69우드스탁 또한 어떤 폐해에도 불구하고 ‘사랑, 평화, 자유’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라는, 곱씹어볼 만한 유산을 남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록음악 특유의 방탕하고 버르장머리 없는^^ 방식이라 할지라도요. 그 페스티벌이 벌어진 바로 다음 해에 태어난 저도 그 자리에서 불려졌던 재니스 조플린이나 조안 바에즈, 밥 딜런 등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이 주장하고자 한 메시지를 되새기곤 하니깐요.^^ 그리고 저 유명한 존 레논의 <Imagine> 또한 69우드스탁이라는 난장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있었을지... 그 노래가 사람들의 가슴에 잔잔하면서도 묵직하게 전파했던 그 무엇을 생각하면...
음.. 급하게 쓰느라 제 생각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암튼 faye님께서 현자처럼 툭, 던져주신 화두를 가지고 이러저렇게 생각을 정리해보는 일도 즐겁네요.^^ 근데 정운영 선생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군요. 와... 새로 알게된 사실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저런 내용을 더 풀어놔주시길...^^
그리고 하늘을 날자님. 잘은 모르겠지만요, 일본이 서구를 받아들인 방식은 난학(蘭學)의 성립과정을 살펴보면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쇄국정책을 쓰는 가운데서도 일본은 이미 15세기 때부터 스페인, 포르투갈의 상선들과 교류하며 ‘서양문물에 익숙해지기’를 연습했죠. 그걸 남만학이라고 하는데, 그게 밑거름이 돼서 16세기에 이르면 그 다음으로 일본을 찾아온 네덜란드와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합니다. 특히 네덜란드와의 교류는 서구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훌륭한 창구가 됐답니다. 그때 네덜란드어를 배운 일본인들이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지고 온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 관련 서적들을 일본어로 착착 번역을 했더랬습니다. 그 결과가 집대성된 것이 서양 해부학 서적을 번역한 <해체신서>이에요. <해체신서> 발간을 계기로 일본의 지식층 사이에서는 대대적인 서양의학 열풍이 불었다고 합니다. (<해체신서> 번역도 참 흥미로운 것이,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에서 보니 서양의학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던 당시의 일본인들은 그 책을 전적으로 문맥에 의존해서, 이건 이런 뜻이 아닐까, 저건 저런 뜻인 것 같군... 하면서 번역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잘 했다는. @.@) 일단 사람의 몸을 해부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서양의학이 서양의 과학기술, 더 나아가서는 서양문명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책이 가져다준 충격이 어마어마했었다고 해요. 하여 그 책이 본격적으로 불을 붙인 서양문물에 대한 관심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기치로 내세운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로 이어졌다는 거죠.
근데 그때 일본인들이 정말 부지런히 네덜란드 책들을 번역했다고 하는군요. 오죽하면 ‘난학’이라는 말이 다 생겨났을 정도로. (그때부터 이미 외국의 책들을 발 빠르게 번역하는 일본의 전통이 확립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일단 그 내용을 알건 모르건, 그것이 우리한테 도움이 되건 어쨌건 간에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지고 온 책들을 무조건 일본어로 번역한 뒤 집요하게 그 내용을 파고들었다는 말이죠. 그러면서 점차 ‘자기 몸에 맞는 것’으로 만들어나갔고 그 중 일부는 원본보다 더 나은 것으로, 역으로 일본이 서구에 자랑스레 수출하게 된 무엇으로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시게노부 후사코 얘기를 접하면서 제가 또 놀랬던 것이 ‘또 한 명의 당돌한 일본여성의 출현’이었답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미 혼자 몸으로 이탈리아에 건너 갔었죠, 오노 요코는 (물론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민간 것이긴 하지만) 쟁쟁한 백그라운드 하나 없이 미국에서 전위예술 활동을 하다가 존 레논을 만나 비틀즈 앨범 제작에까지 ‘얄밉게’ 관여를 했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 행동 자체만을 놓고 보자는 겁니다, 여기서는...) 거기에 시게노부 후사코까지. 뭔가, 그 행동들에서는 주눅이란 걸 찾아볼 수가 없죠. 제 생각엔 그 ‘무모함’들이 난학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막상 부딪혀보니 겁낼 것도 쫄 만한 것도 없더라, 뭐 그런?
또 일본의 난학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실학으로 생각이 옮아가죠. 그때 우리도 일본 못지않게 서양문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우리는 왜 일본보다 늦었을까, 하는. 그러다 보면 중요한 건 다이렉트냐, 아니냐의 차이라는 결론에까지 다다르게 되는 듯싶습니다. 중국의 속국으로 철저하게 중국이라는 통로를 통해서만 서양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우리와는 다르게 일본은 다이렉트로 접촉했다는 거죠. 중국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자신들이 작접 해석할 수 있는 여지. 거기에 우리는 성리학이 지나치게 무게를 잡고 있었던 탓도 있는 것 같고... 뭐 암튼.-_-
그리고 faye님의 지적하신 ‘사대주의의 끝에서 갈곳 잃고’ ‘극심한 허무함’에 사로잡힌 사람의 대표로 전혜린과 그 다음으로 (제가 아는 한에서는) 박인환 시인을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사대주의의 끝’이라는 말씀에서는 살짝 의견이 엇갈립니다만^^, 암튼 뿌리 깊은, 어떤 면에선 경멸해도 마땅한 서구 지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저 두 사람이 아닌가 해요. 하지만 저는 특히 박인환 시인을 도저히 미워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답니다. 그가 보여주는 그 도저한 센티멘탈리즘을, 김수영 시 못지않게 좋아하고 그의 그 부박한 ‘서구 지향의 겉멋’에 깊이 동감하기까지 해요.--; 언제 한번 김수영과 박인환에 대해서도 말해보고 싶네요. 고종석이 박인환 시인에 대해 얘기한 게 있는데, 저는 일단 저 지적 모두에 동의하는 바구요, 그러면서도 고종석이 수긍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박인환을 수긍한답니다.
고종석 칼럼은 요기.http://news.hankooki.com/lpage/life/200510/h2005100417573867740.htm
그리고 그 댓글은, 혼자 하도 많은 댓글을 달다보니-_- 이게 저건지, 저게 이건지 헷갈려서 문득 '어? 같은 걸 왜 두번 등록했지?' 하면서 지워버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