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과 노무현
‘노무현의 한국형모델은?’
게시판 리플을 고쳐 씁니다. 지식인들이 노무현의 진정성보다 김대중의 식견을 더 높이 평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독자의 질문에 답. 과연 김대중은 노무현조차 한수 접고들어가야 하는 산과 같은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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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 개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경우가 많다. 개인으로 말하면 ‘내가 더 낫다’고 말할사람 우리나라에 백 만명 있다. 특히 지식인들은 다들 자신이 최고인줄로만 안다. 그런거 있다.
진정한 평가는 역사의 맥락 속에서 파악되는 것. 많은 시간이 흘러 노무현이 뿌린 씨앗을 수확할 때가 되고서야 진정한 평가는 가능하다. 그 시기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 더 앞당겨질 수 있다.
현 시점에서 단순비교하면 김대중이 노무현보다 윗길이다. 김대중에 대해서는 ‘민주 대 독재 구도’로 보아야 한다. 노무현의 진정성에 대해서는 ‘진짜 대 가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이건 다른 거다.
김대중의 평가기준인 ‘민주-독재’ 구도로 보면 노무현은 제 2의 김대중이다. 아류다. 노무현의 ‘진짜-가짜’ 구도로 보아서는 아직 평가할 그 무엇이 나오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
김대중이 민주시대의 왕조창업자라면 노무현은 승계자다. 김대중은 조(祖)(태조, 세조처럼 무업을 일으킨 왕), 노무현은 종(宗)(태종, 세종처럼 중흥시킨 왕)이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설계범위 안에 건축하였다.
이 점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관찰해야 한다. ‘역사 관성의 법칙’이 있다. 이명박이 후달리는 이유도 국민정서상 크게 보아서 이명박의 존재 자체가 노무현의 밑그림 안에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설계한 구도 안에서 이명박이 컸기 때문에 노무현의 설계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죽는다. 이는 이명박의 숙명. 김대중 역시 김영삼 시대에 이루어진 ‘군정종식’이라는 흐름은 안고가는 것이다.
이명박의 실용주의가 원래 노무현 그림이다. 노무현의 동북아중심국가론-5퍼센트 경제성장-FTA추진 등으로 만들어진 역사 관성의 법칙이 이명박의 실용주의로 전개하여 나아간 것. 이는 국민의 요구.
이명박이 관성의 법칙을 부정하고 근본을 틀었으므로 국민이 등을 돌린다. 노무현이 실용주의로 당선된건 아니지만, 국민은 실용주의를 요구했고, 노무현은 국민의 그러한 요구를 수용하는 흐름에 있었다.
국민은 그 가치를 더욱 구체화해서 이명박으로 나아갔다. 반면 김대중은 박정희와 투쟁하면서 컸다. 이 점이 다르다. 김대중은 역사의 방향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그러나 이명박은 노무현과 투쟁한 바 없다.
국민은 ‘노무현과 국민이 타협한 결과’인 실용을 이명박이 더욱 발전시킬 것으로 기대했다. 이명박이 몰락한 이유는 본인이 내세운 공약과 달리 뉴라이트에 끌려다니느라 전혀 실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전과 14범이지만 대통령 당선으로 인하여 ‘정치적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이 노무현에 대해서는 그 ‘정치적 사면’이 의도하는 관습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이게 실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명박은 오히려 노무현 이상의 까칠함을 드러냈다. 국민정서상 이건 반칙이다. 이심전심으로 성립된 무언의 약속을 깼다. 민심에 대한 반역. 이명박은 자기 존재의 근거를 스스로 허물었다.
김대중은 정치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공약해서 당선되었다. 노무현 역시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회창은 차떼기 하고도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명박은 10년간 이어온 그 관습헌법을 깼다.
이명박이 당선으로 얻은 민심의 ‘정치적 사면’은 스스로의 도발에 의해 무효화 되었다. 국민이 이명박을 사면해 주었으나 제 손으로 무효화 시켰으므로 이제 추궁될 일만 남았다. BBK부터.
결론적으로 노무현의 정체성은 김대중의 평가기준인 민주-독재 구도에 있지 않으며, 좌파들이 좋아하는 사회주의-자본주의 구도에 있지 않으며, 국민이 노무현-이명박에게 요구한 실용주의에 있지도 않다.
노무현의 슬로건이라 할 원칙과 상식도 아니다. 노무현 외에도 고집센 원칙가는 이 나라에 많다. 노무현의 청렴결백한 이미지, 서민적인 이미지, 보통사람 이미지도 아니다. 이건 진짜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슬로건은 가짜다. 인간이 만든 이념은 전부 가짜다. 인간이 만든 이미지는 모두 가짜다. 서민이미지로 말하면 강달프가 더 서민이고 원칙가다. 보통사람 이미지는 노태우도 써먹었다. 그건 아니다.
진짜는 역사가 요구하는 것. 백범-장준하-김대중-노무현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그 무엇. 그것은 인간이 의도하여 설계한 것이 아니라 지구촌 인류문명이 구대륙의 끝단에 위치한 한국사에 요구하는 것.
‘역사 관성의 법칙’이 있다. 근원에서의 끌림이 있다. 원효가 화쟁을 주장하고, 태고보우가 회통을 주장하여 한국불교가 통불교 되고, 율곡이 기일원론으로 정리하여 길을 뚫은 바 끌어온 사상의 흐름이 있다.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면면히 이어온 통합의 흐름에 거역하는 자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왜 한국의 사상가들은 모두 통합-통일을 주장해서 떴는지, 왜 그랬어야만 했는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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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나아가는 필연의 법칙 있다. 그 법칙을 따라가야 한다. 노무현은 ‘진보-보수’ 혹은 ‘민주-독재’ 구도로 평가할 사람이 아니고, 필자가 주장하는 ‘진짜-가짜’ 개념으로 볼 사람이다.
이는 한국인만이 가지는 기질. 또 한국만의 추구해야할 무언가가 있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이야기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다 부질없는 논의로 된다. 노무현은 아무 것도 아닌게 된다.
오백만 조문 헛일한게 된다. 도도한 민주화 투쟁 헛일로 된다. 그 많은 열사들의 죽음 헛죽음이 된다. 민주화만 되면 다인가? 아니다. 전두환 노태우 쫓아냈으니 이제 전쟁끝 평화가 왔는가? 아니다.
이제 무장해제하고, 대오해체하고, 소집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가야하는가? 아니다. 아직 우리에겐 임무가 있다. 수행해야할 역사의 미션이 있다. 우리는 아직 끝을 보지 못했다. 꽃 피우지 못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은 그 점을 고민했다. 자서전 출간계획이 있었는데 ‘내가 DJ처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의 물꼬를 텄나. 뭘했나! 뭘 한게 있어야 자서전을 쓰지!’ 하며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직까지 학자들은 서구식 사민주의-보수주의 대결구도와, 미국식 자유주의(민주당)-제국주의(공화당) 대결구도 외에, 21세기의 또다른 역사의 대립지점이 있다는 점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사가 유럽형으로 가느냐, 아니면 미국형으로 가느냐, 아니면 제 3의 방향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에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가 중요하다.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서 증명해야 한다.
노무현의 업적 중 상당수는 김대중의 것. 10.4정상회담은 6.15의 속편인 거다. 마찬가지로 노무현이 당선되지 못했다면 김대중은 평가절하 된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우리가 일구어낼 업적은 노무현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가 해내야 한다. 어떤 모델이 있을 수 있는가? 한국처럼 희귀한 지정학적 구도에 속한 나라들은 독특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유럽과 달리 다른 나라가 따라하기 어렵다.
일본은 유럽형도 아니고 미국형도 아니면서 독특하게 가지만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지 못한다. 반면 고대 그리스는 ‘그러다가 망했다’는 점에서 실패한 모델이었지만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버리고 제국주의를 추구했다면? 로마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 경우 성공한 모델이지만 역시 보편성은 없다. 페르시아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처럼 잘나가는 제국이 되어도 역사적 의미가 없다.
그리스가 보편적인 민주주의 모델을 만들수 있었던 이유는 산악국가 특유의 지형 덕분이다. 평야지대라면 결국 중국처럼 되고 만다. 그리스 모델은 보편적이만 2천년 전에는 지형이 특수한 나라만 가능했다.
오늘날 발달한 자본주의 시스템 중 상당히는 네덜란드가 만든 것이다. 네덜란드 역시 반도국가로 특이한 지형과 역사적 체험을 가졌다. 특수한 나라가 보편적인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홍콩이나 싱가포르는 잘나가고 있지만 보편성 없다. 섬나라 혹은 작은나라 현상이다.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의 강소국들 역시 잘나가긴 해도 보편성이 없다. 인구가 적으니까 가능한 거다.
우리나라 인구가 1천만명 이하라면 국민소득이 두 배는 높을 터. 적은 숫자로 성공하기 쉽다. 조세피난처 만들고 후진국 독재자 부패자금 흡수, 도박장 개설로 틈새시장 개척하면 된다.
나는 우리나라가 과거 한동안 네덜란드가 일구었던 보편성 있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노무현이 중요한 이유는 세계사 안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보편성 있는 모델의 성공가능성 때문이다.
아직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확정된 정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 관성의 법칙 안에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남의나라 모델을 단순히 수입만 하려면 그냥 민노당 하자는데로 하면 된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안 되게 되어 있다. 유럽은 남쪽은 보수, 북쪽은 진보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으므로 안정감이 있다. 급진적인 정책을 펼쳐도 두려움이 없다. 이웃나라 하는것 봐가면서 속도조절 하면 되기 때문.
그러나 일본을 보라. 북한이나 쿠바처럼 고립된 나라가 급진적인 정책을 쓰다가는 장기독재로 가는 수 있다. 고립된 일본이 우경화 하는 이유는 그러한 두려움 때문이다. 진보에 대한 막연한 공포.
혼자 가는 길에 대한 두려움. 주변에 봐가면서 속도조절 할 이웃이 없다는 약점.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처럼 삼각협력할 그 이웃 말이다. 한국 역시 고립된 환경이므로 유럽처럼 되기 어렵다.
한국인의 잠재의식 깊숙히 자리잡은 불안감이 있다. 일본이 우경화 하는 이유는 일본역사 2천년 내내 작동하는 극단적인 쏠림현상의 경험 때문이다. 일본은 섬이기 때문에 패자가 달아날 곳이 없다.
고립된 섬에서 어디로 튀겠는가? 승자독식의 구조. 도쿠가와 막부를 연 세키가하라전투와 같은 건곤일척의 큰 싸움판이 벌어지면 중간에서 눈치보던 제후들이 일제히 이기는 쪽에 붙는다.
일본에서는 군대가 전진할 수는 있어도 후퇴할 수가 없다. 등을 보이는 순간 전멸. 판세가 결정되는 순간 중간에서 관망하던 자들이 승자의 질책을 피하고 전공을 세우기 위해 야차같이 몰아댄다.
그 때문에 진보-보수가 50대 50으로 팽팽하게 갈등을 보이는 것을 국민이 싫어한다. 야구를 해도 요미우리 하나에게 몰아주려고 한다. 갈등을 못견뎌 하는 그러한 경향이 일본의 전반적인 보수화를 부른다.
한국이 그나마 약간의 진보성향을 보이는 것은 유교주의적인 명분론, 대의론, 정사론이 혈관 깊숙한 곳에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실용에 집착하는 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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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한국인들은 노무현의 본질을 보지 못했다. 노무현 자신도 용이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청렴결백 이미지, 원칙과 상식, 바보이미지 이런건 곁가지다. 본질은 역사가 추동하는 것이 무엇인가다.
한국만의 미션이 있다. 한국인들은 모두 느끼고 있다. 그것은 진보-보수를 넘어, 사회주의-자본주의를 넘어, 민주-독재를 넘어, 중도실용을 넘어 그 모든 대립과 갈등을 넘어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다.
진짜로 가짜를 깬다. 밑바닥 서민들이 가진 진정성의 파도로 지식인들이 쌓은 정교할 뿐 위태로운 탑을 허물어버린다.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 백퍼센트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노무현, 그 진정성으로 밑바닥 민중의 에너지를 끌어낸 사람. 그것은 하나의 단초.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더 멀리 보고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세계를 통째로 아우를 수 있는.
그것은 부자만의, 기득권만의, 재벌만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요 빈자만의, 아웃사이더만의, 젊은이만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요 대한민국 백퍼센트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말싸움하는 정치만의 에너지가 아니요, 돈자랑하는 경제만의 에너지가 아니요, 멋자랑하는 문화만의 에너지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근원에서의 혁신이다. 거대한 에너지의 파도가 몰아쳐온다.
나는 노무현이 그 촛불에 점화했다고 본다. 500만 조문인파가 다 FTA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니다. 다 진보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진보-보수하는 그 식상한 놀음을 지겨워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걸음 더 다가서서 마음을 들여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한국인 원형의 모습이 있다. 이미 보았는가? 아직 보지 못하였는가? 역사는 흐르고, 세상은 진보하고, 아는 사람은 기쁨을 느끼고, 모르는 사람은 어리둥절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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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의 군정종식은 국민 백퍼센트가 동의하지만 1회성. 게다가 3당야합으로 인하여 김영삼은 자격이 없어졌다. 어떤 역사가도 ‘3당야합의 김영삼’으로 쓰지 ‘군정종식의 김영삼’으로 쓰지 않는다.
김대중의 정권교체-통일초석은 물론 위대하지만 김정일의 거듭된 배신 때문에 일부 빛이 바래졌다. 진정성의 힘으로 민중의 에너지를 끌어낸 노무현은 무모했다. 결과는 님의 죽음으로 돌아왔다.
열광적인 찬사와 차디찬 배반이 함께하는 위험한 길. 진보와 보수 양쪽의 찬사를 받지만 동시에 양쪽의 화살을 받게 된다. 성공하기 힘든 길이지만 누군가는 그 길을 가야했다. 뚜벅뚜벅 그 길을 갔다.
왜? 한국인 마음의 뿌리가 그것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의 가는 방향이 그 쪽에 있기 때문에. 진보나 보수의 논리에 매몰된 인물도, 진보와 보수 중간에서 어물쩡한 인물도 필요없다.
화살은 양쪽에서 빗발처럼 날아온다. 교착을 타개하고 난국을 해결하며 공존의 논리, 공존의 룰, 공존의 문화를 만들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래도 제 2의 노무현은 나와야 한다.
http://gujoron.com
김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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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노무현(펌)
pp. 조회수 : 222
작성일 : 2009-06-16 13:15:54
IP : 211.176.xxx.169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pp.
'09.6.16 1:16 PM (211.176.xxx.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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