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프랑스 파리10대학 경제학 박사의 오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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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1 18:46 posted by 우석훈
꼼꼼한 공부와 사회과학 르네상스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참 설명하기 어려운 일인데, 나도 그렇게 공부를 잘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떤 게 공부를 잘하는 것인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나같은 C급 경제학자가 하는 얘기들은, 어떻게 얘기해도 결국 "바담 풍"에 불과하다. 그래도 한 가지 말할 수 있다면, 나같이 하면 안된다는 정도일 것이다. 어렸을 때, 수학공부를 너무 안 했다. 그리고 시간이 있을 때 독일어 공부를 조금 더 했어야 했는데 그것도 안했다.
그럼 그런 거 빼고 나머지는 다 잘 했냐? 물론 절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이해한 것은, 공부에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이게 나이 마흔이 되어서야 결국 내가 깨달은 작은 사실인 것 같다.
선거가 끝나고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대한 입장들을 정리했다. 물론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것들을 정리해보는 것은 나중에라도 내가 어디에서 틀린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대충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혹은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라는 하나마나한 소리이며, 심지어는 자신마저도 속이게 되는 그런 얘기 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그래도 되지만, 학자가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 상황은, 치명적이다.
“뭘 했느냐?”라는 행위의 알리바이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무슨 상황이 진행되고 있던 것인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뭘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럴 줄 알았어”라는 알리바이는, 이미 수 년전에 그 상황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예견했던 경우, 아주 가끔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도록 뭔가 하는 편이 더 좋은 학자의 경우이다.
생태학의 비유를 들어보자. “나는 사람들이 결국 이 지경을 만들 줄 알았어.” 이렇게 말하는 생태학자가 있다면, 그런 생태학은 아예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오랫동안 필드에서 관찰하고, 또 수리 시뮬레이션 모델까지 돌리면서 결국 “사람이 문제야”라고 허망하게 말하거나, “내 그럴 줄 알았지”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을 좋은 생태학자라고 할 수 있을까?
최소한,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고, 1차 요소는 어떤 것이고, 2차 요소는 어떤 것이라는 얘기는 해줄 수 있어야 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조절변수’가 아니라 상태변수로 설정하고, 차라리 부속 변수 중의 몇 개를 묶어서 조절변수로 만들어보자... 이렇게 얘기를 해주면, 비로소 우리도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면서, 와, 쎈데! 이렇게 말할 것 아닌가.
최근의 서해안 사태를 보면서, 새로 느낀 게 하나 있다. 기자들의 90% 이상은, 눈 뜬 장님들이라는 점이고, TV 방송의 PD와 작가들은, 너무너무 속이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학자들은? 별로 할 말들 없을 것 같다. 이 거대한 90% 정도 되는 거대한 사기극에 대해서 “이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생태학자와 생물학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런 걸로 볼 때, 우리는 속고 또 속고, 앞으로도 계속 속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 속에서 진리는 무엇인가, 이런 황당한 프레임 속에서 잠시라도 “이게 옳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열리지 않을 것인가?
하여간 나도 조금이라도 열어보기 위해서 시간을 들이지만,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아보인다.
사회과학으로 돌아와서 얘기를 해보자. 인문과학까지 포함해서 조금 넓게 내가 ‘사회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걸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가설 하나를 세워보자. 한국 사회과학의 르네상스는 대체적으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를 얘기하는데, 이 시기의 풍부했던 사회과학적 독서 혹은 사유가 90년대 한국 경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억지로 추정하자고 하면, ‘축적변수’로 사회과학 출판량이라는 변수를 넣고, 생산함수에 지식함수를 일부 수정해서 모델을 돌려보면, 90% 이상 상관성 있다는 결과가 나오기는 할 것이다. 물론 논문 쓸 때에 해보는 일이고, 어차피 동어반복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실제 실증분석을 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여간 이 가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사회과학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혹은 경제가 산다, 이런 얘기들이다.
원한다면, 여기에 가지를 붙여서 사회과학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인접 학문에 미치는 영향, 혹은 사회적 갈등 비용 축소에 해소에 미치는 영향과 같은 몇 가지 메카니즘을 달아서 얘기를 엄청나게 늘릴 수도 있고, 상당히 복잡하게 1,000개 이상의 방정식으로 동학모델을 만들 수도 있기는 하다.
억지로 얘기를 더 붙인다면, 서태지 등장 이후 왜 위기가 시작되었는가를 설명할 수도 있기는 하다. 물론 별로 중요하지 않은 논란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에, 꼭 서태지의 표절과 표절에 대한 열광적 지지와 같은 얘기들은 보통 분석에 넣지는 않는다. 게다가 본 흐름에서는 약간 곁가지 같은 얘기들일 뿐이다. (그러나 조금 더 경제철학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면, 서태지와 표절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훨씬 더 근본적인 위기의 요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런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한국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몇 개의 외국 사례로 본다면, 진짜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외국에서는 74년 석유 파동을 이후에 등장하는데, 그런 식으로 본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문제는 경제적 위기의 속도이다. 네덜란드처럼 경제적 위기가 너무 금방 닥쳤다가 바로 사회가 몰락해버리면 아예 이론이 자생적으로 발생할 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18세기에 네덜란드에서 경제학자가 등장하지 않은 것을 경제인식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의 사회과학 르네상스의 경우도 어느 정도는 속도의 함수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가 ‘collpase' 혹은 ‘melting-down’으로 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면 이론이고 사회과학이고 그딴 거 없다. 98년의 IMF 경제위기 때 딱 그랬는데, 우파들은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다운사이징’이라고 그냥 받아다 썼고, 좌파들은 ‘신자유주의’라는 말 한 마디만 놓고 경전 외우듯이 죽어라고 반복했다.
한국 사회과학은, 서태지의 표절에 대해서 지적하지 못하던 순간에 1차 위기, 그리고 IMF 경제위기 때, “어, 어” 하다가 한 마디도 못한 2차 위기이자 근본위기에 부딪히면서, 그냥 날라갔다고 보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속도 말고도 또 다른 변수를 생각해보면, 결국은 ‘학자군’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꿰는 사람이 있어야 사회과학 르네상스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 이건 예측하기가 쉽다.
2~3년 내에 한국에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등장할 수 있다면, 지금 뭔가 꼼꼼히 들여다보는 사람들과 집단들이 있어야 할 것인데, 이건 참... 눈을 씻고 봐도 잘 안 보인다.
필요조건은 있는데, 충분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표현하면 아무 비슷할 것 같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보면, 지금 30대 초중반 그 어느 지점에서인가, 일군의 사회과학 학자군이 등장하면, 한국에서도 제2의 르네상스가 오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조용히 고개 숙이고 생활인으로 살거나, 그래도 아직 학풍과 학계가 남아있는 외국, 하다못해 일본으로라도 가거나... 그렇게 선택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주변을 살펴보니, 30대 초중반의 그런대로 성실하고 꼼꼼하게 공부하려고 했던 젊은 박사들이, 마치 거대한 엑소더스처럼 외국으로 떠나는 중이다. 작년부터 속도가 점점 붙기 시작하더니, 아마 내년에는 거대한 물결이 될 것 같다. 예를 들면, 가장 떠나지 않을 것 같은, 지난 총선 때 민주노동당 경제공약을 총괄했던 젊은 박사는... 내년에 떠난다고 날 받아놓고, 결혼 준비하는 중이다. 그리고 또 비슷한 상황해서 버텼던 사회학 박사들은, 중국으로, 일본으로, 심지어는 호주로... 떠날 계획을 잡느라고 분주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좀 미안한데, 일찌감치 학계의 영감쟁이들에게 줄 서면서 비굴하게 살거나,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도망가거나... 그 둘 밖에는 꼼꼼하게 공부할 길이 없는 것 같아 보이기는 한다.
서울대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들은 보니까 90% 이상, 한국에서 도저히 공부 못하겠다고 짐싸는 중이고, 여성학자들의 경우는 그야말로 100%에 가깝게, 못해먹겠다고 짐싸는 중인 것 같다.
물론 말리지 그랬냐고? 상황이 너무 뻔한데, 어떻게 말리냐.
지금 죽거나, 조금 있다 죽거나... 모르고 죽거나, 울다가 죽거나... 배고파서 죽거나, 속상해서 죽거나... 억울해서 죽거나, 분통터져 죽거나...
이게 한국 사회과학에서 꼼꼼하게 공부하려고 했던 젊은 학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인데, 그들이 개별적으로, 그러나 거의 대부분 짐을 꾸려 외국으로 나가는 상황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수 년 동안 나와 같이 작업하던 젊은 학자들이나 그들의 친구나, 또 그들의 친구 중에, 당분간 남아서 한국의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채 10%가 안 된다. 그나마 그들 중 대부분은 너무 일찍 결혼해서 남편이 외국에 죽어도 못가겠다고 하는 경우, 아니면 정신적으로 외국 생활의 고통을 견디기 어렵고, 집도 너무 어려워서 출발할 물리적 근거를 못 찾는 경우... 이게 나의 관찰이다.
이런 젊은 학자들은 모두 좌파 계열의 사회과학자들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사회과학 연구여건의 붕괴에는 좌우가 없고, 남녀가 없고, 주류, 비주류가 없어보인다. 오직 일찌감치 학계의 원로들에게 잘 줄을 섰고 고분고분하게 - 속으로는 분통이 터지더라도 - 보이는 전략을 썼느냐, 그렇지 않느냐, 그 차이만이 존재한다.
그래도 누군가는 지금 상대적으로 꼼꼼하게 현재의 변화와 앞으로의 추이 그리고 근본적인 차이점 같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꾸 분석해보고, 말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이건 당위인데, 세상일이 당위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외국에 가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이 꼴을 당하면서도 당분간은 버텨보려고 하는 것은, “한국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어”라고 중년이 되었을 때 말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는 한데...
30대 초중반의 젊은 박사들이 내게 해주는 얘기는, “그 한 마디를 위해서 죽을 수도 있나요?”... 그렇긴 그렇다.
다들 공부는 잘 했다고 하고, 학문에 대한 열성 하나로 삼십 줄을 넘어와 지도교수 종살이 하면서 겨우 박사학위 손에 쥔 3~4년차 박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 밖에는 없어보인다.
이들에게 “이명박 시대를 참고 견디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원로 교수들이나 원로 학자들이기는 한데, 이 할아버지들은, 꼼짝도 않고, “어이, 순리대로!”를 외친다. 참, 죽겠다...
한국의 제2의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다. 여건상, 올 확률이 높고, 주체분석상, 안 올 확률이 높다.
그래도 이런 사회과학의 희망의 불이 아직 완전 꺼지지 않은 것은, 좋은 책을 내는 것이 자신이 태어난 이유라고 생각하는 ‘씩씩한 에디터’와 그들과 매일 아웅다웅 싸우면서도 사회과학만은 지켜내겠다고 하는 출판사 사장들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종이신문에서는 소위 ‘서평권력’이라는 것이 너무 막대해서, 30대 초중반의 학자가 나름대로 고심작을 냈다고 해도, 한 줄, 정말 한 줄짜리 소개도 안 해줄 것이 너무 뻔하다.
하여간, 2만여명 정도로 추산되는 사회과학 독자, 그리고 아직은 수 십개 이상 남아있는 사회과학 출판사들, 그리고 아직은 꼼꼼히 공부해보고 싶다는 열정을 가지고 있는 30대 초중반 학자들, 그게 우리가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회과학을 위한 자산의 거의 전부일 것이다.
그야말로 high risk, low profit, 안되는 시장의 구조를 전형적으로 갖추고 있는, 자영업 시장과 똑같은 구조이다.
그런데도 꼼꼼하게 사태를 짚어보는 학자가 필요할까? 물론 필요하다.
러시아의 투강가 극단이 파리에 왔을 때, ‘죄와 벌’ 공연을 하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스크린 자막에 뜬 마지막 대사가 다음과 같다.
“La vie n‘est pas la mathematique."
삶은 수학이 아니다...
이미 죽어버린 한국의 사회과학이라도 붙들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 망해가는 한국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는 없다. 우리는 이렇게 파시즘에 가까워지고, 퇴행적 사회로 뚜벅뚜벅, 그리고 점점 빨리 나아가는 중이다.
정당은 무너졌고, 시민사회는 붕괴하고, 학문은 고사하는 중이다. 여기에서 과학기술과 예술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가? 나는 그렇게 믿기지 않는다.
외통수라고 표현하면 진짜 외통수인데, 정 안되더라도 나중에 역사에 한 마디가 기록된다면 그야말로 이 시대의 학자들에게는 최고의 영광일지도 모른다...
“그 혼돈의 시기에 학자들은, 한국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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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도 읽어두면 한국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글
베를린 조회수 : 750
작성일 : 2007-12-22 07:35:45
IP : 84.171.xxx.212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감사
'07.12.22 9:43 AM (67.85.xxx.211)베를린님,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2. 아줌마도..
'07.12.22 12:22 PM (59.150.xxx.103)어쩐지 제목에서 이 말이 걸리네요. 아줌마도....
그럼 아저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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