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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광대

무우꽃 조회수 : 901
작성일 : 2004-05-27 04:21:50
종교 때문에 고민하는 글을 자주 접하게 되는군요. 시부모님이나, 심지어는 친부모, 배우자 될 사람.
글쎄요, 종교가 뭐길레 그러는지 ...
여기서 가급적 종교 얘기는 꺼내지 않으려 했는데, 고민들을 읽다 보니 결국 나오게 되는군요.
전에 다른 사이트에 올렸던 글을 손봐서 올립니다.

"사제"라는 말 아시죠?
인간의 뜻을 신께 고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그런 직책 말입니다. 천주교 신부나, 개신교 목사, 불교의 스님들이 여기에 속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제가 한 때 목사 지망생이었습니다. 그게 뭐 소명감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사제를 지향한 것은 아니었고, 작은 교회의 목회자를 꿈꾸는 소시민적인 소박한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간직했던 그 꿈은 70년대 유신시기가 아니었다면 이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때 소설을 잘 썼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공부도 잘했고 아주 곱상하게 생긴 녀석이었습니다. 그녀석이 대학에 들어간 후 어느날 이마에 흉터를 남긴 채 나타났습니다. 전단지의 글때문에 끌려갔던거지요.
그때부터 모든 게 달리 뵈더군요.
조찬기도회에 참석해서 대통령의 안위를 기도하는 신학계 윗대가리부터,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목에 근엄을 깐 채 "안녕하쉽니까?" 인사하던 동급생까지 모두들 삐딱하게 뵈기 시작한 겁니다.
스물에 맞부닥친 사회에 대한 혼란과 목회생활에 대한 회의로,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 나오는 한스처럼, 결국 저는 혼란 속에서 반년간의 신학대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한동안 방황하다가 다시 시험쳐서 들어간 곳이 동국대입니다. 묘한 것이, 목사지망생이었던 제가 고등학교(동대부고)부터 대학까지 칠년간을 불교 동네에서 지낸거죠.
그래서인지, 아니면 불교식으로 말해서 인연이 있는 것인지, 스님 친구들도 생기고, 불상에 절하는 것도 우상숭배가 아니고 저의 불성에 대한 경배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불교신도라고 할 것은 아니구요.
몇년 전에는 아는 사람의 권유로 계도 받았지만(법명 大空) 제 사고의 바탕은 여전히 기독교적입니다.
불경을 제대로 공부해 본 적도, 설법을 들으려 쫒아다닌 적도 없는 반면, 성서와 예수의 삶은 오래동안 제 생활에 녹아있었으니까요.
이것이 함석헌님을 접하면서 무교회주의가 되기도 하고, 평생 큰스승으로 섬기게 되는 안병무님을 만나면서 민중신학이 되기도 하고, 이현주 최완택 목사님을 만난 후에는 종교의 벽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벌써 이십오년 전 얘깁니다.  이제는 종교에 대한 개념이 빛바랜 색마냥 거의 희박해졌습니다.  그래서  바탕을 "기독교"라 하지 않고 "기독교적"이라고 한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연히 알게 된 탈놀음을 통해 우리것을 하나 둘 접하게 되면서 굿판을 드나들게 됐는데, 무당들을 만나고 그들의 삶에 대해 어느정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신부고 목사고 중이고 모두들 자기가 하고싶어서 하는 거지만, 무당은 그렇지가 않습니다(무당에도 신내린 강신무와 대물림하는 세습무가 있는데, 여기서는 강신무를 말하는겁니다). 그 길을 피하려고 피하려고 하다가 결국 신의 손길에 붙잡힌 것이 무당입니다.
신부나 목사, 중들은 대접이나 받지, 무당은 사람 대접도 못받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이 살았을 때는 안녕을 빌고 죽으면 혼백을 극락으로 보내는 무당. 이거야 말로 숭고한 사제가 아니고 뭡니까?
한동안 저는, 혹시 제게 신내림이 생긴다면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 참으로 어줍잖은 생각까지 했었지만, 그 욕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탈놀음판에서 몇년 놀다 보니까 춤도 익어지더군. 춤으로 제가 하고싶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지면서, 저는 스스로를 춤꾼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공옥진씨의 일인 창무극 "병시ㄴ춤"(금칙어라 풀어썼습니다)을 보고서는 ... 그만 전율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 창극을 보고서 (칭찬하는 뜻으로) 춤이 어떻네 병시ㄴ 흉내가 어떻네 하는데, 그건 본질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립니다. 하긴, 춤과 소리와 연기를 혼자 끌어가며 사람들 마음을 어루만지는 광대 공옥진의 끼를 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마는.

그 춤을 보면서 짜릿짜릿한 전율을 느낀 제 심정, 이해하시겠는지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나 핑크 플로이드의 "월"을 들었을 때는 저녁을 못먹었지만, 공옥진의 창무극을 본 후로 며칠간은 밥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광대"가 어떠했는지 제대로 본거지요. "내가 과연 저런 광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백번 죽었다 깨도 저런 광대는 될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행스럽게도 저는 이 시대에 공옥진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춤꾼"이었지만, 예전같으면 광대의 신명을 보며 얼쑤거리는 평범한 "구경꾼"의 한사람에 불과했던겁니다.  그 이후로 광대가 되겠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다음 생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저는 여자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가수가 되겠습니다.  이미자나 한영애처럼 가슴속을 후벼파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는 광대가 되겠습니다. 광대만한 사제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번 생에서는 그저, 용이 못된 이무기마냥, 무당도 광대도 못된 아쉬움을 남긴 채, 나를 닦는 의미로 공덕을 쌓겠습니다. 혹시 압니까, 공덕을 많이 쌓으면 다음 생에는 뭐 하나가 될지.
(그러고 보니 이 생각은 상당히 불교적인가요? 후훗)
IP : 210.118.xxx.196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솜사탕
    '04.5.27 8:17 AM (68.163.xxx.96)

    무우꽃님~
    무우꽃님 글 오랜만에 읽으니까 넘 좋네요...
    저두 지금은 종교관이 뒤죽박죽... 하긴.. 이제는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분류하는 종교란 한낱 인간이 만들어낸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남들 보긴 뒤죽박죽일지 모르지만, 저는 제 종교관이 확고하다 이거지요. ^^

    무당이나 광대만한 훌륭한 사제이지만, 전 그저 개인 한명 한명 모두가 훌륭한 사제가 될수 있다고 생각해요. 받아들이는가 못, 혹은 안받아들이는가의 차이이겠지요.

    요즘 무우꽃님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제가 넘 오랜만에 와서 혼자만 소식을 못듣고 지내는건지... 건강하세요!!!!

  • 2. june
    '04.5.27 8:35 AM (64.136.xxx.230)

    아. 핑크 플로이드,. 종교관에 대한 이야긴데 제 눈엔 그 이름이 제일 강하게 들어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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