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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다섯 살배기의 사치 프로젝트

깜찌기 펭 조회수 : 1,672
작성일 : 2004-05-06 18:59:09
내일은 50년을 두고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사치를 부려볼까 합니다.

사치를 부리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후쯤 해서 시장에 들리겠습니다.
간 고등어 한 손과 전복 세 마리를 사겠습니다.
잠들기 전에 전복은 손질해서 냉장해 놓고,
고등어는 물에 담가 간을 좀 빼놔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약속을 취소하겠습니다.
경주 만화 박람회에 가서 간만에 만나는 벗들과 어울리고,
술도 한잔하기로 한 약속입니다.
나 하나 없어도 그들끼리 잘 어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강 씻고 그 옛날 자취 시절을 기억해내,
양은 냄비에 밥을 앉히겠습니다.
누룽지가 그때처럼 노릇노릇하게 잘 만들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묵은 김치를 꺼내 군내 안 나게 잘 빨아
고등어를 넣고 찌개를 끓이겠습니다.

밥이 지어지는 동안,
전복을 잘게 썰어 당근이랑 시금치를 넣고 죽을 끓이겠습니다.
밥과 누룽지는 제 몫이고, 죽은 아내의 몫입니다.
식사 준비가 끝나면 청소를 하겠습니다.
걸레질까지는 못해도 청소기로 바닥을 미는 건 할 수 있습니다.

잠깐 밖에 나가야 합니다.
쓰레기도 버릴 겸 담배도 한 대 피워야 하니까요.
내일 하루만은 밖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겠습니다.
나흘 전부터 온몸이 욱신거린다는 아내가
오늘은 드디어 이불 펴고 드러누웠기 때문입니다.
하루나마 담배 연기가 아내의 폐에 안 들어가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청소기 소음 들릴 때, 아내를 깨어났을 것입니다.
밤새 흘린 땀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주겠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아내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며,
조금은 쑥스럽지만 "당신 아직도 예쁘네?"라는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겠습니다.

죽은 제가 후후 불어서 입에 넣어줄 생각입니다.
식사가 끝나면 녹차 물을 올려놓고, 설거지도 해 보겠습니다.
아내가 마실지는 모르겠으나, 찻종을 내밀어 보겠습니다.

거실로 나와 늘 하던 경마 ARS 녹음을 마치고,
요즘 거동이 힘드신 장모님께 전화를 하겠습니다.
아내가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듯이
"장모님, 좋은 아내 주셔서 감사합니다."란 말을 하겠습니다.

베란다에 씨를 뿌려놓은 허브 화분에 물을 준 후,
큰놈과 아내, 그리고 제가 벗어둔 빨래를 세탁기에 넣겠습니다.
물론 속옷은 따로 주물럭거려서 삶아야겠지요.

그러다 보면 점심 먹을 시간이겠습니다.
눌려 놓은 누룽지를 끓여서 아내와 마주 앉겠습니다.
아내의 수저에 세로로 찢은 김치나 고등어 등살을 올려 주는 일은
역시 50년 동안 한 번도 부려보지 못한 사치입니다.
아내의 몸을 다시 따뜻한 물수건으로 닦아준 후,
병원까지 동행하겠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일요일 경마 출마표가 올라와 있을 것입니다.
정리하고 나면 다시 저녁밥을 먹어야 하겠습니다.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 다릴 것은 다림질 해 보겠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아내 옆에 누워,
내일만은 늬우스 안 보고 아내가 보는 연속극을 보겠습니다.
잠이 들더라도 아내의 신음이 들리면 얼른 일어나겠습니다.
나흘 전부터 드러누운 아내가
모레쯤엔 옛 활기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쉰 다섯 해만에 처음으로,
(제겐 조금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려볼까 합니다.
ㅡ맨날 국가와 민족 생각한다면서 가족생각 못하는 배 아무개ㅡ


헬로엔터에서 퍼온 글입니다.

내일.. 이분의 사모님은 하루가 행복으로차 짧게 느껴지겠죠.
주부가 늘 하던 일을 남자가 하루 경험하는것일 뿐이기도 한데.. 왜 감동(?)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 하루경험을 분에넘치는 사치라 표현해준것에 작성자분꼐 감사합니다.


IP : 220.89.xxx.20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키세스
    '04.5.6 9:55 PM (211.176.xxx.151)

    이왕이면 내일은... 이 아니라 내일부터면 좋겠네요. ^^

  • 2. 김혜경
    '04.5.6 10:00 PM (211.215.xxx.242)

    저도 감동받은 글이네요...

  • 3. 칼라(구경아)
    '04.5.6 11:36 PM (211.215.xxx.99)

    울남편도 이글을 읽어봤으면.........
    완죤히 조선시대남자거든요.......

  • 4. beawoman
    '04.5.6 11:48 PM (211.229.xxx.146)

    깜찌기 펭님 어머님 이야기 시작하시는 줄 알았어요.
    헤붕의 장미 55송이가 생각나서

  • 5. koalla
    '04.5.7 10:12 AM (211.59.xxx.178)

    저는 잠시 어머 깜찌기 팽님이 중년의 남자분? 하고 깜짝 놀랬더랬습니다.
    정말 가슴찡한 글이네요~ 울 애기 아빠는 제가 애기업고 밥먹고, 설겆이 하는동안 안방에서 편히 기대어 tv봅니다. ^^;;

  • 6. 빨강머리앤
    '04.5.7 11:10 AM (211.171.xxx.3)

    참..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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